보현 보살의 게송
혹은 중생들의 마음에 즐겨함을 따라
생각하기 어려운 갖가지 승乘을 나타내 보이며
혹 어떤 때는 일승법一乘法만 펴사
하나 속에 한량없는 방편을 나타내도다
법화경과 화엄경
첫 번째 어려운 고비를 만난 것 같습니다.
꼭 해야 할 설명이 몇 가지 있으니 차분히 정리를 하겠습니
다. '승乘'이란 한자는 아시다시피 '타다'라는 뜻입니다.
엘리베이터를 '승강기'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통상적으로 승乘이란 글자에서 바로 연상되는 불교 용어는
소승과 대승입니다.
소승은 말 그대로 '작은 탈것' , 대승은 '큰 탈것'을 의미하는
데, 이는 기원 전 후 일어난 보살 사상이 중심이 된 대승 불
교에서 그 전까지의 불교를 폄훼하여 부르는 말이라고 앞에
서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아주 쉽게 비유하면 소승 불교는 자기만 깨달음을 추구하
는, 즉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오토바이 불교'이고, 대승 불
교는 나는 물론 다 같이 깨닫자는 이타적인 '버스 불교'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태국이나 스리랑카 등 남방 불교를 소승 불교라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 곳의 스님들이나 불자들에게는 오히
려 소승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승의 개념은 일승一乘 , 이승二乘 , 삼승三乘과 일
불승一佛乘이 있습니다.
네가지 승 중 앞의 세 가지는 결국 일불승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방편설方便說에 불과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첫째, 일승은 성문승聲聞乘을 말하는데, 한자 뜻 그대로 부
처님의 말씀을
'듣고 터득했다'는 경지를 말합니다. 부처님
의 10대 제자 대부분이 이에 속합니다.
둘째, 이승은 연각승緣覺乘을 말하는데, 12연기법을 '홀로
터득했다'
는 경지를 말합니다.
홀로 터득해서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아라한, 또는 줄여서 나한이라고 하며, 큰 절의 나한전에
모셔진 분들이 바로 이 경지를 이룬 분들입니다.
셋째, 삼승은 보살승菩薩乘을 말합니다. 자기의 이익보다는
이타적인 행을 하는 모든 보살을 뜻합니다.
게송에 '갖가지 승을 나타내 보이며, 혹 어떤 때는 일승법만
펴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화엄경 독경만 만3년을 하였습니다.
감히 그 뜻을 이해하려고 시작하였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독경기도로 하였던 것인데, 그 때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이 게송이 지금 드러난 것을 대단한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곧 그 이유를 밝혀드릴 것입니다.
이제 게송의 '갖가지 승'이 지금까지 설명드린 세 가지 승임
은 이해 되셨을 것입니다.
남은 것은 '일승법'이란 말의 뜻인데, 저는 이것을 법화경의
'일불승'(부처님의 깨달음에 들게 하는 법) 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니 분명 일승一乘에 법法 자를 붙였으니 성문승의 일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법화경을 최고의 경전이라고 주장하
는 소위 법화행자들은 목청을 높일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 다시 확인하면, '갖가지 승을 나타내
보이며, 혹 어떤 때는 일승법만 펴사,' 즉 분명히 먼저 갖가
지 승을 앞세우고, 뒤에 이를 다 포섭하는 의미로 일승법一
乘法(부처님의 깨달음에 들게 하는 법)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어 그리 중요한 문제인가 의구심이 드는 불자들을
위해 법화경의 관련 대목과 법화사상을 설명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법화경 비유품의 그 유명한 '화택火宅' 의 비유입니다.
덕망있고 자식도 많고 재물도 많은 한 장자의 집에 불이 났
습니다. 자식들은 아직 어려 만약 장자가 큰 소리로 집에 불
이 났으니 빨리 나가라고 하면 아이들이 당황하여 오히려 우
왕좌왕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얘들아, 집 밖에는 너희
들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 보배로 만든 수레가 있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들이
있다.
대문 밖에는 이런 수레들이 많이 있으니 너희들 마음대로
타고 끌고 놀아라"라고 유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수레가 있다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서로 다투고 밀치
면서 그 집에서 뛰쳐나와 모든 환란을 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나아가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세 가지 좋은 수레를 저희들에게 주십시오. 아까 말씀하시
기를 너희들이 대문 밖에 나오면 세 가지 좋은 수레를 주마
하셨으니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인 장자는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금은보화가 창고마다 가득
했습니다.
그래서 큰 수레에다 온갖 보물로 으리으리하게 치장하고 부
드러운 고급 비단을 자리에 깔고 하여 더할 수 없이 화려하
게 꾸몄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고 살지고 기운도 세고 잘생긴 흰 소를 매어
끌게 하였습니다.
거기다 하인들이 앞뒤로 호위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수레들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니 아이들은 기뻐 뛰
놀면서 수레를 타고 사방으로 달리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이렇게 비유들 드신 후에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리불이여, 나도 또한 그와 같다. 나는 온 세상의 아버지이
고 일체중생들은 모두 나의 자식이다.
모두들 세상 낙에 집착하여 지혜는 전혀 없고 삼계가 불안하
기가 불타는 집과 같다.
사리불이여, 나는 중생들을 위하여 이러한 비유로써 일불승
一佛乘을 말하노라.
너희들은 이 말을 잘 믿고 이해하여 실천하면 누구든지 이
순간부터 부처님으로서의 삶을 살리라. 이 도리는 미묘하고
청정하고 제일이니라."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서 끝 부분의 일불승이 화엄경 게송의 일승법一乘法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이것이 왜 그리 중요
한가 하면 법화경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 대목을 들어 '봐
라, 다른 경은 모두 법화경의 이 일불승으로 들어오게 하는
방편에 불과하지 않느냐?' 라는 결정적 단서로 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법화경 특유의 태도, 즉 법화경을 만나고 이
해하는 사람은 '선택 받은' 사람이고, 또 '핍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어찌보면 불교의 근본 정신으로 보면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좀 독특한 분위기도 한몫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
시오. 법화경의 의미가 과대평가되거나 왜곡되고 있다는 의
도가 있는 것은 추호도 아니고, 다만 법화경 성립 시의 시대
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반영된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법화경은 화엄경과 더불어 대승 경전의 최고임이 분명합니
다. 저는 법화경 독경과 사경도 5년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판단은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
로 바랍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법화경 만이최고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게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제가 게송을 통해 밝혔
듯이 화엄경에도 일불승의 개념이 있습니다.
실은 현실적인 신행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문제는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염려하는 것은 '법화경 아니면
안 된다' 혹은 '법화경 외에는 볼 필요가 없다'라는 태도입
니다.
심지어 법화경만을 높이 사는 이들에게 다른 경의 사상을 말
하려 해도 '너희들은 이해하지 못 하고, 우리는 핍박 받고 있
다, 법화경에도 부처님이 그리 예견하지 않으셨느냐?'라거
나, 더 더욱 일본의 종파인 '일련정종'과 같이 '경의 제목만
외워도 다 된다'라는 식의 생각은 결코 불교적이지 못하다
는 것입니다. (일련정종은 소위 남묘호렌케쿄인데, 이는 나
무묘법연화경의 일본어 발음입니다.)
이번 게송의 마무리 설명을 하면, 이런 모든 승乘의 개념도
결국은 '중생들의 마음에 즐겨함을 따라' 법을 펴시는 부처
님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성법 스님 저서 '이판사판 화엄경'의 글
첫댓글 _()()()_
_()()()_
...()()()...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