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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NBA 원문보기 글쓴이: jongheuk
현실에 정우성이 있다면 바로 카이리 어빙이 아닐지.. 하는 마음으로 번역해 봤습니다.
http://espn.go.com/nba/story/_/page/kyrieirving_120224/nba-father-laid-plan-kyrie-irving-followed-it
By Jackie MacMullan
아들은 아버지가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맹세했다.
카이리 어빙은 그 획기적인 사건들에 대해 마치 매주 수퍼마켓에 가서 구입하는 물건들의 목록처럼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8학년때 쯤이었을 거예요." 어빙이 말했다. "아버지는 제가 뉴저지에서 최고의 가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고등학교 3학년때 그분은 제가 이 나라에서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대학에 들어간 뒤 아버지는 제게 드래프트 넘버원 픽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고요."
"그는 제게 필요한 모든 과정을 다 보여 주셨어요. 그러한 과정들을 소화하는 것은 제 몫이었죠."
어빙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젊은 주춧돌이 되기 위한 그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그는 게임당 18.1 점을 기록하면서 루키들중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리고 있다. (그는 또한 게임당 5.1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번 금요일 저녁 벌어지는 NBA 라이징 스타 게임에서 Team Chuck 의 일원으로 뛰게 된다. 그는 클리퍼스의 스타 플레이어 블레이크 그리핀에 이어 두번째로 뽑혔다.
"제가 생각할 때 아버지는.." 어빙이 말했다. "그분은 전통적인 과정을 중요시하셨어요. 지름길은 없었고, 보장되는 것도 없었죠."
어빙의 아버지는 그의 저서 "GOAL: PLAY IN THE NBA" 에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었다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당시 5-8 에 불과했고 많은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그 시절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바로 아들 자신이었다고 회고했다.
Drederick Irving 은 카이리의 체척계(measuring stick) 와도 같다. 매년 여름 그는 집 벽에 아버지의 6-4 키를 마크해 놓고 그에 맞추어 자신을 재어 보곤 했다.
"저는 아버지보다 더 크고 싶어요." 카이리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넌 그렇게 될거야" 아버지가 약속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사실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NBA 선수가 되고자 했던 드레데릭의 꿈이 셀틱스와의 트라이아웃에서 낙방함으로써 좌절된 후, 그는 뉴욕의 프로암 리그에서 뛰었고, 아스팔트 코트를 전전하며 궁핍한 삶을 이어 나가야 했다.
카이리는 당시 유모차안에서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였다. 하지만 이 어린아이의 눈은 아버지의 동작 하나 하나를 쫓으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이후, 유모차 시절에서 벗어난 후 카이리는 공을 달라고 떼를 썼고, 한 손으로 드리블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눈은 드레데릭의 동작 하나 하나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태어난지 단지 13개월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 그걸 증명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죠." 드레데릭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모든 곳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했을까? 카이리가 네살이 되었고 카이리의 한살 위 누나인 Asia 가 다섯살이 되었을 때 그들의 어머니 Elizabeth 는 갑자기 사망했다. 드레데릭에게 혼란스럽고 상처받은 두명의 아이들만을 남긴 채. 그의 슬픔은 활동적인 두명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정신없고 고단한 삶에 의해 빨리 잊혀져야 했다. 오직 그가 편안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시간은 잠들기 전 잠깐뿐이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의 아이들에게 해주기를 원했다. 드레데릭은 뉴욕주 브롱스에서 자란, 미첼 하우징 프로젝트의 도움아래 성장한 여섯명의 아이들중 한명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6세때 그의 가족을 버렸고, 어머니 Lillian 은 두개의 직장을 뛰며 여섯명의 자녀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마약과 범죄, 총기 사고는 항상 그의 주변에 득시글거렸다. 드레데릭은 교육과 농구만이 유일한 탈출구임을 깨달았다.
"나는 내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단다." 드레데릭이 언젠가 카이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래."
드레데릭은 그의 두 어린 자녀들과 함께 뉴저지로 이사했고 사립 학교에 등록시켰다. 하지만 그들을 종종 미첼 프로젝트에 데리고 갔다.
"저는 거의 매주 그곳에 갔어요." 카이리가 말했다. "전 제 아버지가 겪었던 것과 흡사한 상황에 있게 되었죠. 전 그 프로젝트의 정글짐에서 노는 아이들중 하나였어요."
드레데릭은 월스트릿으로 출근했다. 그곳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105층, Cantor Fitzgerald 에서 그는 파이낸셜 브로커로 일했다.
9/11 이 발생하기 8개월전, 그는 직장을 바꿨다. 같은 빌딩의 40층에 있는 Garvan Securities 로 옮긴 것이다.
"전 그곳에서 3주간 일했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드레데릭이 말했다. "그것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전 단지 그 일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들었을 뿐이었어요."
그는 3 Financial Square 에 있는 Thomas Reuters 로 옮겼지만 여전히 매일 아침 기차역에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지나쳐 걸어가곤 했다.
9/11 아침, 엄청난 굉음이 그의 뒤에서 발생했을 때 그는 트윈 타워의 로비 근처를 걸어가고 있었다.
"전 보일러가 터진 줄 알았어요" 드레데릭이 말했다. "그 폭발음은 정말 컸고, 그로 인한 광풍은 정말 엄청났죠. 거기에는 깨진 유리 파편이 널려 있었어요."
몇초안에 카오스가 발생했다: 벽들은 무너져 내렸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으며 연기는 그들을 질식시켰다.
"제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내 아이들에게 가야 해' 라는 것 뿐이었죠." 드레데릭이 말했다.
그는 출구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문은 이미 무너져 내려 있었다. 사람들은 패닉 상태였고 하늘에서 수많은 파편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전 고개를 돌려 출입구를 찾으려고 했지만 거기에 대체 무엇이 있었는지도 분간하기 힘든 상태였죠." 그가 말했다. "빌딩의 파편들, 비행기의 파편들, 흩날리는 종이들..."
그는 철골 구조물을 건너 뛰어 길을 건넜고, Cantor Fitzgerald 에 있는 친구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는 그의 전 보스, 전 비서, 그리고 그의 꿈과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아이들이 이룩한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들을 찾기 위해 애썼다. 아무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빌딩을 올려다 보았다. 꼭대기에서 풍겨져 나오는 연기와 함께 빌딩은 불타고 있었다.
"저는 그곳에 서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재를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이건 재가 아니야. 시체들이야.'" 드레데릭이 말했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서 몇년이 걸렸어요. 전 사실 요즘도 9/11 에 대한 꿈을 꿉니다. 끔찍한 날이었죠. 전 많은 친구들을 잃었어요."
드레데릭은 그가 타워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재와 연기로 인해 죽을 수도 있을 정도의 질식상태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전화기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고 모든 도로는 막혀 버렸다. 그 순간 패닉이 찾아 왔다. 그가 그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의 아이들은 대체 누가 돌보지?
당시 10세였던 카이리와 11세였던 아시아는 9/11 이 일어나던 당시 학교에 있었다. 카이리는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다른 부모들은 잿빛이 되어 학교로 달려와 그들의 자녀들을 품에 끌어 안았다.
"많은 선생님들이 울고 있었고, 그들중 많은 수는 교실을 떠났어요." 카이리는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모두가 그들의 부모들과 함께 떠났어요. 제 누나와 전 학교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려야 했어요."
베이비시터는 집에서 테러 상황을 티비로 지켜보며 공포에 질린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통한 속보들은 공포심에 질린 두 어린 아이들이 자신들의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면서 느끼는 초조함을 달래주지 못했다.
드레데릭은 그들에게 갈 수 없었다. 휴대폰은 다운되었고, 기차는 멈춰 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예전에 살던 곳까지 걷기 시작했다.
"저는 아시아와 카이리가 아직 Cantor Fitzgerald 에서 일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을 까봐 걱정이 되었던 거죠." 그가 말했다. "직장을 바꿀 때 아이들은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잖습니까."
"전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카이리가 말했다. "전 아버지가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또한 전 그가 트윈 타워를 매일 지나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죠."
"걱정이 됐죠. 아주 많이."
드레데릭은 월스트릿 에서 9마일을 걸어 브롱스에 있는 137번가/알렉산더 아베뉴에 도착했다. 6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는 그곳에서 친구인 Larry Romaine 을 만날 수 있었고, 그는 드레데릭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의 자녀들에게 그가 아직 살아 있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전 제 아이들에게 저를 지켜주는 수호 천사가 있다고 말했죠." 드레데릭이 말했다. "그것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그 비극적인 날은 그를 몇년간 옭아 메었다. 그의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드레데릭은 점점 학교 교육의 중요성과 학원 스포츠를 중요시하게 되었고,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8학년때까지 카이리를 직접 가르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아들이 상당히 균형잡힌 아이이고 굳은 의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카이리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드레데릭은 그를 Montclair Kimberley Academy 에 등록시켰다. 카이리가 그의 팀을 프렙 챔피언으로 이끈 후 그가 더 높은 수준의 농구팀을 원한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고, 그 결과 그의 고등학교 마지막 2년을 St. Patrick's in Elizabeth 에서 보냈다. 카이리는 그곳에서 역시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즈음 거의 모든 대학들이 그를 원했다.
이건 드레데릭이 경험한 농구 인생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그는 종종 다른 이들에 의해 가리워졌다. 그의 절친 Rod Strickland d와 같은 이에 의해서 말이다. 스트릭랜드는 후에 NBA 스타가 되었고 카이리의 대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드레데릭은 그의 고등학교 재학 시절 팀메이트들에 의해서도 가리워졌으며, 더 낮은 곳에서 더 적은 조명을 받으며 뛰어야만 했다.
드레데릭은 코네티컷, 제임스 매디슨, 그리고 보스턴 대학으로부터 관심을 받았지만 장학금을 보장해 주는 곳은 없었다.
마침내 BU 가 한명의 리쿠르트를 놓친 후 당시 감독이었던 존 큐스터와 어시스턴트 로드니 존슨이 어빙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한번 더 미첼 프로젝트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타고 있던 좋은 차와 멋진 트렌치 코트가 알람을 울렸다. 드레데릭은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경찰처럼 보인다고 생각할 정도의 멍청이들을 주변에 두고 있긴 했다.
"이봐, 드레데릭 어빙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큐스터가 물었다.
"어.. 그는 죽었어요." 그의 이웃 친구가 대답했다.
"오, 정말 안된 일이구만" 큐스터가 말했다. "우리는 보스턴 대학에서 왔고 그에게 장학금을 주려고 했거든."
"장학금이요? 와우. 그는 사실 저쪽에 살고 있어요. 두번째 문 옆이요." 그 소년이 답했다.
드레데릭 어빙은 보스턴 대학에서 뛰면서 1,931 점을 기록했다. 그는 딱 한번 토너먼트에 진출했고 그의 팀은 듀크에게 패했다. 20년도 더 지난 뒤 카이리가 입학하게 될 그 학교에게 말이다.
그의 아들은 블루 데블스와 사인했다. 그는 프래쉬맨 시즌에 엄지 발가락 부상으로 인해 단 11게임만을 뛰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드래프트에서 최고의 선택이었다. 카이리는 듀크에서 5년내에 학위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하에 프로로 진출했다.
"그는 아직 갈길이 멀어요." 드레데릭이 말했다. "그 녀석은 제게 약속을 했죠."
카이리는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NBA 로의 진출을 이루어냈다. 그의 아버지가 Bullen Bombers 라는 호주 맬번의 팀에서 뛸 당시 태어났기 때문에 카이리는 2012년 올림픽에서 호주를 위해 뛸 수도 있다. 그는 아마도 미국을 위해 뛸 것이지만, 아직 확실하게 정한 상태는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동화와 같아요." 드레데릭이 말했다. "카이리는 항상 NBA 에서 뛰는 것을 꿈꿔 왔어요. 제가 그랬던 것 처럼요."
"그는 결국 꿈을 이루어냈고, 저는 마치 제가 그 꿈을 이룬 것처럼 느껴져요."
카이리는 3월 23일에 20세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아들을 위해 헌신한 한 사람의 인생에 맞춰져 있다.
"만약 당신이 나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행운아라면." 그가 말했다. "당신은 아주 좋은 기반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그 안에 당신을 채울 수도 있고, 그와 함께 성장해 나갈 수도 있죠.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제 아버지는 제게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라고 가르쳤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드레데릭은 재혼했고, 새로운 딸인 London 을 낳았다. 그는 Temple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여전히 눈이 반짝 거린다.
그는 여전히 뉴저지에서 클리블랜드까지 출퇴근을 반복한다. 자신의 아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는 아들이 올스타 기간동안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올랜도로 날라갈 것이다. 매우 피곤한 스케쥴이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이리가 자신의 집인 West Orange, NJ 로 왔을 때 그는 벽에 자신의 키를 대어 보았다. 6-3 1/2 인 그는 아직도 그의 아버지보다 키가 작다.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키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한다.
그의 아버지는 카이리 어빙이 이미 오래전 그것을 달성했다고 맹세한다.
첫댓글 클리블랜드 팬분들이 좋아하실만한 글인 것 같아서 번역해 봤습니다.
감동적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읽고가요~~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뭔가 부모로서 느끼며 갑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어빙은 어릴때부터 이미 심장이 어마어마하게 컸네요. 아버지문제로 불안할텐대도 침착한걸 보니 지금의 클러치능력이 이해가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