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大君)은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에 왕자들에게 내려진 작호의 일종이다. 조선의 경우 정실 왕비 소생의 왕자들에게만 대군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였으며, 첩(후궁) 소생에게는 "군(君)"의 호칭을 부여하였다[1][2]. 단 조선 초기에 한해 왕의 서자에게도 대군의 호칭이 내려진 적이 있다[1].
고려
대군의 호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 시대 때이다.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公)·후(侯)·백(伯)의 작호를 각각 부원대군(府院大君)·대군(大君)·부원군(府院君)·군(君)·원윤(元尹)·정윤(正尹) 등으로 개편한 것이다. 다만 부원대군(府院大君)이라는 호칭은 고려 초기에도 발견된다(태조의 아들 의성부원대군 등)[2]. 고려에서 대군의 호칭이 사용된 예를 보면, 충혜왕(忠惠王)의 후궁인 은천옹주(銀川翁主)의 경우 단양대군(丹陽大君)의 여종이었다는 기록이 있고[3], 현종(顯宗)의 후손 제안공(齊安公)은 훗날 대군으로 진봉되어 제안대군(齊安大君)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4]. 이밖에도 대군에 봉해진 이들에 대한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조선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는 정실 왕비 소생의 왕자들에 대해 고려 왕조를 모방하여 공(公)을 칭하였다. 그러나 참람되게 중국을 모방할 수 없다는 이유로 1401년(태종 1년) 음력 1월 25일 공(公)이라는 호칭은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고쳐졌다. 더불어 함께 쓰이던 후(侯)·백(伯)의 호칭은 각각 군(君)과 부원군(府院君)으로 고쳐졌다. 이때 "공"에서 "부원대군"이 된 사람은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 익안공(益安公) 이방의(李芳毅),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 등의 3명이었다[5]. 이후 부원대군은 폐지되고 대군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2].
다만 이 당시만 해도 환조(桓祖)의 서자인 이화가 대군에 봉해진 것으로 볼때 체계적으로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왕비 소생의 아들에게만 대군의 작위를 부여한 것은 사실상 1414년(태종 14년) 음력 1월부터였다. 이때서야 왕비 소생의 왕자에게 "대군(大君)"을, 빈(嬪,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군(君)"을 봉하기 시작했다[1].
한편 조선 건국 초기 대군에게는 정1품의 품계가 있었으나, 《경국대전》에서는 대군에 대해 무품으로 정의하고 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