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에세이의 살아 있는 전설
‘원조 쿨 걸’ 조앤 디디온의 세계
2021년 현재 뉴욕에 살고 있는 86살의 조앤 디디온은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를 넘어, 신화가 되었다. 미국에서 통찰력 있는 에세이나 회고록을 쓰는 여성들은 물론, 음악을 만드는 여성들까지도 디디온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그 리스트에는 『트릭 미러』의 지아 톨렌티노와 『면역에 관하여』의 율라 비스, 킴 고든, 라나 델 레이 등이 있다). 여러 매체에는 “디디온풍”Didion-esque, “디디온 같은”Didion-like, “디디온스러운”Didion-ish 같은 형용사, “우리 시대의 디디온”과 “다음 세대의 디디온”, “디디온을 비롯한 작가들의 전통 속에서” 같은 표현들이 범람한다.
디디온이 관찰과 분석과 문장이 탁월한 에세이스트의 압도적인 대명사, 나아가 형용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부터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영향력 있는 작가와 배우와 뮤지션들이 디디온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그에 대한 애정을 피력했으며, 미셸 딘에 따르면 “후대의 젊은 여성들은 디디온이 글에서 자신들 내면의 가장 깊숙한 생각을 표현해주었다고 주장”했다. 은둔으로 악명 높던 이 고령의 작가는 2015년 패션 브랜드 셀린의 모델이 되었고, 같은 해 700페이지가 넘는 디디온 평전이 출간되었다. 2017년에는 디디온에 관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이 공개되었고, 2019년 디디온의 소설을 영화화한 <마지막 게임>The Last Thing He Wanted이 개봉했으며, 올해는 디디온의 미발표 에세이를 묶은 책 『내가 하고 싶었던 말』Let Me Tell You What I Mean이 출간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디디온은 1934년에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나 다섯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패션잡지 《보그》 에디터를 거쳐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으며, 여러 편의 소설과 논픽션, 희곡, 시나리오를 썼다. 국내에는 지금은 절판된, 남편의 죽음 이후를 다룬 『상실』The Year Of Magical Thinking, 그리고 딸의 죽음을 둘러싼 자전적 에세이 『푸른 밤』이 소개되어 상실과 애도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영미권의 ‘디디온 르네상스’는 “원조 쿨 걸”이자 “영원한 쿨 걸”의 이미지에 기인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찍힌 사진(줄리언 와서Julian Wasser가 촬영한 사진들이 유명하다) 속 수려한 스타일과 무심한 듯 꿰뚫어보는 표정, “명민하고 창의적이고 모호하게 반항적인” 아우라가 디디온을 이룬다. 리지 굿맨이 《엘르》에 쓴 글에 따르면, 디디온은 “캘리포니아의 우울한 여자애들에 관한 쿨한 소설을 쓰는, 마찬가지로 우울한 새크라멘토의 소녀이자 버클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지식인”, “셀러브리티 문화의 기민한 비평가이자 스타들의 친구”, “깊숙한 개인적 고백을 쓰는 에세이스트이자 냉철한 기자”, “보헤미안”, “WASP”, “노련한 뉴요커이자 노련한 캘리포니아인”, “진보이고 보수”, “패션 아이콘”, “문학 아이콘”, “페미니스트 아이콘”, “궁극의 인사이더이자 궁극의 아웃사이더”이다.
이처럼 복합적이며 “기묘하게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에 기대어 구축”(「옮긴이 해제」)된 디디온이라는 아이콘, 시대를 앞선 스타일로 열풍을 일으킨 디디온의 세계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초기 작품들이 중요하다. 1968년 출간되어 20세기 후반 미국 문학의 정전正展 반열에 오른『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디디온 스타일의 시발점이다. 이 책은 디디온이 1960년대에 취재한 기사와 에세이를 엮은 첫 논픽션으로, 디디온 글쓰기의 원형과 정수를 만날 수 있다.
50년 만에 도착한 뉴저널리즘의 고전
미국의 적확한 초상, 퇴색되지 않은 현재성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지난 60년간을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에세이 선집”(《뉴요커》)이자 미국 뉴저널리즘의 고전으로 꼽힌다. 조앤 디디온은 톰 울프, 노먼 메일러와 더불어, 1960년대 새롭게 출현한 저널리즘의 흐름인 뉴저널리즘을 대표한다. 당시 잡지에 주로 실렸던 뉴저널리즘 기사들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문학적 스타일의 글쓰기와 주관적 관점을 특징으로 하며,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강조했다. 책 제목과 동명의 표제작이자 디디온에게 명성을 가져온「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렸던 기사다. “글쓰기가 무의미한 행위고 내가 아는 세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10쪽)던 서른두 살의 디디온은 다시 일하기 위해 “무질서와 화해”해야 했고, 그래서 1967년 늦봄에 샌프란시스코에 갔다. 디디온은 헤이트 애시베리 지구에 머무르면서, ‘히피’라고 불리는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이 글을 썼다. 하지만 이 글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장면들을 혼란스럽게 파편처럼 늘어놓는 구성을 통해, 그 형식 자체로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장소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동안 언론에 알려진 바와 달리, 샌프란시스코는 “사회적 출혈이 드러나고 있는 곳”(125쪽)이며,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175쪽) 곳이라고 디디온은 쓴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글을 비롯해 1부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반문화counterculture를 대표하는 인물과 현장들을 탐사하며 1960년대 혁명의 격변기를 거치는 미국을 가감 없이 기록해낸다. ‘히피’와 같은 사회 현상, 조앤 바에즈와 평화주의 운동, 민주주의연구소와 인문학, 마이클 라스키와 노동자국제서점에 이르기까지 디디온은 사람들을 “악인으로 몰지도 않고 화려하게 미화하지도 않”(댄 웨이크필드)으며,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디테일한 구체성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옮긴이 해제」) 미국의 적확한 초상을 그려낸다. 1부에 실린 다른 글들 또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황금의 땅”의 “황금빛 꿈”, 즉 1960년대 미국의 삶과 아메리칸드림을 둘러싼 미국의 정신을 묘파한다. 디디온은 배우 존 웨인에게서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을, 괴짜 백만장자 하워드 휴스에게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을 본다. 또한 남편을 살해한 가정주부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하는 어린 커플들에게서는 ‘결혼’과 ‘스위트홈’이라는 환상과 그 배반을 본다.
“마음의 일곱 장소”를 이야기하는 3부는 물론, “개인적인 글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2부 또한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에 관한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자존감이나 도덕성에 관한 글, 가족이나 샌타애나 바람에 관한 글에서조차 캘리포니아의 과거, 아니 미국의 역사가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디디온은 고향인 새크라멘토에서 “우리가 늙어가면서 잃어버리는 것들, 우리가 깨뜨리는 약속들”을, 휴가를 떠난 하와이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품은 자본주의의 관광지의 모습을 본다. 아주 사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나 손에 잡히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디디온은 세상에 대한 더 큰 그림을 그린다. 또한 디디온이 포착한 “원자화의 증거, 만물이 해체되는 물증”(10쪽)은 당대의 기록을 넘어 현재에도 유효하다. 196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여전히 지속되는, 현대인의 삶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로서, 인물과 사건과 장소들, 자신의 내면을 가로지르며 우리 삶의 ‘중심부’에 다가가는『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서 독자들은 기묘한 기시감, 즉 결코 퇴색되지 않은 현재성과 전혀 낡지 않은 통찰을 만날 수 있다.
여성의 글쓰기를 확장하는
‘터프’하고 ‘샤프’한 디디온의 에세이
2010년대 이후, 국내에서 에세이 장르 및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는 가운데, 20세기 미국 문화사에서 중요한 여성 저자들에 관한 책 두 권이 최근 출간되었다. 여성의 글쓰기를 공감, 감상주의, 온정주의와 연결 짓는 관습으로부터 해방시킨 ‘터프’한 여성들에 관한 사상비평서 『터프 이너프』Tough Enough(2019), 신랄하고 예리한 글을 썼던 20세기 뉴욕의 ‘샤프’한 여성 작가들에 대한 기록 『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Sharp(2020)가 바로 그것이다. 조앤 디디온은 한나 아렌트,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택과 함께 두 책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자기가 본 것과 자신이 느낀 것들을 속이지 않으려는 냉정하고 강인한 삶의 태도, 그리고 그렇게 뾰족한 필치로 써 내려간 글들이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거릿 애트우트, 수전 손택, 패티 스미스, 토니 모리슨 등 수많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그리고 『터프 이너프』)을 우리말로 옮긴 김선형 번역가가 이 책의 섬세한 문장, 특유의 리듬감과 호흡을 노련하게 살려냈다. 특수한 시대성과 지역성이 담긴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꼼꼼한 주석과 「옮긴이 해제」 또한 이 책의 이해를 돕는다.
“혼돈의 무의미에 맞서는 글쓰기의 힘”이라는 제목이 붙은 「옮긴이 해제」는 디디온에게 평생 동안 내면과 세계의 문제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말이 되는 적절한 어휘들을 찾아내는”(『푸른 밤』) 글쓰기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어휘와 맥락”을 찾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첫 논픽션인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 이미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패션 잡지를 위한 소품 「자존감에 관하여」는 “거창한 사회 현상이 아니라 일상의 마음가짐을 다룰 때조차 작가로서 디디온이 얼마나 용감하게 정직한지를 훌륭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 불타협의 정직성이 구체적인 현실을 언어로 포착하는 비범한 능력과 결합해 혼돈의 세계상을 서사적으로 파악하고 지적으로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강력한 사명으로 변한다.”
따라서 “미국에 팽배한 반지성주의, 즉 적절한 어휘를 찾아낼 능력의 부재”는 “이 책에 실린 다양한 글들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디디온은 “미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방향을 지시할 “어휘”를 내려주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리하여 한 세대가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 같이 길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인식을 넘어,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 서사적 일관성으로 정리되지 않는 무의미와 평생 싸우며” “자아를 해체하는 ‘그런’ 슬픔 앞에서 ‘그런’ 공포를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있는 그대로, 여전히 용감하게, 글로 포착하려는 노력을 놓지 않는 지성인의 투지”가 ‘디디온’과 그의 글쓰기를 규정한다고, 옮긴이는 썼다. 독자들은 그 단단한 스타일과 날카로운 지성의 가장 알아보기 쉬운 원형을 이 책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서 만날 수 있다.
2010년대를 지나며 우리는 ‘에세이’의 호황 덕분에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굳이 직업적인 작가가 아니더라도 일기 또는 SNS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자기고백과 자기노출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간다. 이때, 독자들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어떠했는지 기억하라”(193쪽)가 언제나 자신의 글쓰기에서 핵심이었다는 디디온의 경구로부터, 그리고 자기 내면에 관한 토로, 타인과 장소에 관한 개인적이면서 역사적인 기록, 사회적 사건과 현상을 취재해 쓴 사회비평을 모두 ‘에세이’에 포함시킨 디디온의 작업으로부터 에세이의 외연을 확대하는 풍부한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성적이라고 간주된 기존의 글쓰기를 벗어나 자기다운 스타일과 태도를 밀어붙이며 여성의 글쓰기를 확장해온 디디온의 작업은, 자기 글쓰기를 하려는/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굉장한 활력과 자극을 줄 것이다.『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를 읽는 것은 우리가 왜 쓰는지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지점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