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序言)
고려 성종(成宗) 재위 13년,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 대감(大監)이 평장사(平章事)로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수복한 영토 강동6주(江東六州)는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 등에 현재 중국과 북한 국경인 압록강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본문에서는 먼저 장위공이 개척한 강동6주의 원래 위치를 고찰해본다. 먼저『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 기록된 6주는 흥화(興化)·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구주(龜州)·곽주(郭州)이고, 장위공이 이 지역에 새로 쌓았다고『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기록된 6성은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성(郭州城)·귀주성(龜州城)·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이다.
‘강동 6주’와 ‘강동6성’의 위치를 파악하는 작업에 있어 참고자료와 연구방법으로는 다음과 같다. 위에 기록된 지명의 원래 위치를 찾는데 참고한 자료는『신교본요사(新校本遼史)』·『고려사절요』·『속자치통감』·『원사(元史)』·『하북정구연혁지(河北政?沿革志)』·《중국고대지명대사전(中國古代地名大辭典)》·《고금지명대조표(古今地名對照表)》중국의 북경(北京)·승덕시(承德市)·영구시(營口市)·호로도시(葫蘆島市)·향하현(香河縣) 등 지방행정기관의 인터넷 홈페이지, 기타 중국인 역사가들의 글 등이다.
중국의 여러 문헌 중 간체(簡體)로 기록된 것은 번체(繁體)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였다.
지명과 위치를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는「원사지리지(元史地理誌)」였다.「원사지리지」의 동녕로(東寧路)조에는 아래에서 다시 인용하겠지만, “당나라 말기에 고려에 편입된 60여성은 고려·원에서 당의 옛 명칭을 그대로 썼다[雖仍唐舊名]”고 하였다.
따라서 원래의 주(州)·성(城)의 명칭, 관할하는 현(縣)의 명칭을 연결고리로 하여 원래 위치를 찾아보았다.
필자의 탐구 결과 장위공이 제1차 여요전쟁(麗遼戰爭) 이후 수복한 6주와 6성은 국사 교과서의 기술과는 다르게 현재의 요령성(遼寧省)·길림성(吉林省)·하북성(河北省)·산서성(山西省)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강동6주’라는 용어는 우리 스스로에게 6주의 위치가 압록강 동쪽에 있다는 최면을 거는 효과로 작용한다.
필자는 ‘강동6주’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장위공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서희 수복 6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고, 장위공이 쌓은 6성은 ‘서희 개척 6성’으로 부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이 6주의 위치가 현재의 압록강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압록강 동쪽을 의미하는 ‘강동’이란 용어가『요사(遼史)』나『고려사절요』·『속자치통감』등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어느 사서(史書)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국사 교과서에는 ‘강동6주’라는 용어를 버젓이 사용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이것도 혹시 쓰다 쓰요키치[津田左右吉]·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등 일제식민사학자들과 그들을 계승한 이병도(李丙燾)·손진태(孫晉泰)·신석호(申奭鎬) 등 친일사학자들이 고안해낸 고도의 최면술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2. ‘서희 수복 6주’와 ‘서희 개척 6성’ 관련 국내의 기록 실태
인터넷 포털 사이트《야후코리아》〈백과사전〉을 접속해서 검색해보면 소위 ‘강동6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려 성종 때 평안북도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설치한 흥화(興化)·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구주(龜州)·곽주(郭州) 등 6주(州). 고려 때 군사상 교통상 요지였던 강동6주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993년(성종 재위 12년)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徐熙)가 거란장군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압록강의 동쪽지방을 개척한 뒤에 거란과 국교를 열 것을 조건으로 고려는 강동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6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6주 개척 후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흥(長興;泰川)·귀화(歸化;郭山)·선천(宣川;宣州)·안의(安義;定州)·흥화(興化;義州東)·구주(龜州;龜城) 등지에 강동6성을 쌓고 거란에게 적의를 보였다. 이에 거란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약속불이행을 추궁하고 국왕이 친히 내조(內朝)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강동6주 반환을 요구하여 왔다. 고려에서 이를 듣지 않자 거란은 1018년(현종 9년) 이래 3차에 걸쳐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우고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고려의 항전으로 이득을 보지 못하였으며, 특히 제3차 침입 때 소배압(蕭排押)이 거느린 거란군은 구주(龜州)에서 강감찬(姜邯贊)에 의해 대파되어 돌아갔는데, 이를 구주대첩이라고 한다. 두 나라는 서로 적대관계에 지쳤기 때문에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대신 거란은 강동6주의 요구를 철회하였으므로 강동6주는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서 압록강은 현재의 중국과 북한 국경인 그 압록강을 가라키고 있다.
『고려사절요』제2권 성종(成宗) 문의대왕(文懿大王) 계사(癸巳) 12년(서기 993년)의 기록을 살펴본다.
〃?曰,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若論地界,上國之東京,皆在我境,何得謂之侵蝕乎,且鴨綠江內外,亦我境內,今女眞,盜據其間,頑?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朝聘之不通,女眞之故也,若令逐女眞,還我舊地,築城堡,通道路,則敢不修聘,將軍如以臣言,達之天聰,豈不哀納,辭氣慷慨,遜寧,知不可强,遂具以聞,丹帝曰,高麗,旣請和,宜罷兵,?,留丹營,七日而還,王,大喜,出迎江頭,卽遣侍中朴良柔,爲禮幣使,入覲,?,復奏曰,臣,與遜寧約,?平女眞,收復舊地,然後朝覲可通,今?收江內,請俟得江外,修聘未晩,王曰,久不修聘,恐有後患,遂遣之。〃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서기 993년에 이미 고려가 압록강 안쪽은 수복하였고, 바깥쪽에 대한 수복을 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희 수복 6주’와 ‘서희 개척 6성’이 압록강 안과 밖에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다음은『고려사절요』에 기록된 6성의 내용을 살펴보자.
『고려사절요』제2권 성종 문의대왕 갑오(甲午) 13년(서기 994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命平章事徐?,率兵攻逐女眞,城長興歸化二鎭,及郭龜二州。〃
˝평장사(平章事)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도록 하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 두 진과 곽주(郭州)·귀주(龜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절요』제2권 성종 문의대왕 을미(乙未) 14년(서기 995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是歲,命平章事徐?,帥兵,城安義興化二鎭。遣李知白,如契丹,貢方物。〃
˝이 해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 두 진에 성을 쌓게 하였다.˝
『속자치통감』제30권 송기(宋紀) 30년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己未,高麗王詢遣刑部侍?田供之奉表於遼,稱病不能朝。遼主怒,命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六城。〃
˝기미년에 고려왕 순(詢)이 형부시랑 전공을 시켜 요에 표를 보내, 병을 빙자하여 입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요주가 노하여 화주·통주·용주·철주·곽주·귀주 6성을 취하도록 명하였다.˝
『속자치통감』에도 ‘서희 수복 6주’가 압록강의 동쪽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3. ‘서희 수복 6주’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제, ‘서희 수복 6주’의 위치를 찾아 본다. 6주의 위치를 찾는데 있어 다행스러운 것은 당이 고구려를 강점한 이후 붙인 지명을 고려도 그대로 사용하였고, 요나라나 원나라도 지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고『원사』에 기록되어 있다.『요사』와『원사』의〈지리지〉에는 그 명칭과 관할하는 현(縣)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사지리지」59권 제11지의 동녕로(東寧路) 관련 부분이다.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西京.元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州縣?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婆娑府.本路領司一,餘城?廢,不設司存,今姑存舊名.錄事司.土山縣.中和縣.鐵化?.都護府,自唐之季,地入高麗,置府州縣?六十餘城,此?都護府,雖仍唐舊名,而無都護府之實.至元六年,李延齡等以其地來歸,後城治廢?,僅存其名,屬東寧路.定遠府.郭州.撫州.黃州.領安岳、三和、龍岡、咸從、江西五縣,長命一?〃
˝동녕로, 본 고구려 평양성. 장안성이라고도 함. 한이 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토군을 두었는데, 이곳에 낙랑을 두었다. 진 의희 이후 고구려 왕 고련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그 나라는 동으로 옮겨갔다. 압록수 동남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원나라 지원 6년, 이연령, 최탄, 현원열 등이 부주현진 60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8년 서경을 동녕부로 고치다. 13년.(…) 현재도 옛 명칭 그대로다(今姑存舊名). 토산현, 중화현. 철화진. 도호부. 당나라 말에 고려에 편입되어 부주현진 60여성을 두고 이곳은 도호부가 되다. 당의 명칭을 그대로 쓰다(雖仍唐舊名).(...) 이연령 등이 항복한 뒤 성의 치소가 훼손되었으나 그 이름은 그대로 남아있고(僅存其名) 동녕부에 속하다. 정원부(定遠府), 곽주(郭州), 무주, 황주는 안악, 삼화, 용강, 함종, 강서의 다섯 개 현과 장명진을 관할하다.˝
따라서『고려사』·『요사』·『원사』등에 기록된 지명과 관할하는 현의 지명은 원래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서희 수복 6주’부터 살펴본다.
하북정구연혁지(河北政?沿革志) 승덕시(承德市) 홈페이지(http://post.baidu.com/f?kz=19828745)의 기록이다.
〃??中京道北安州?化?地。金承安五年(1200年)置?州,治?化?(今?河街西南里?),?北京路;??化?、宜??地。元?上都路?州?安?、宜??地。〃
˝요나라 때에 중경도 북안주 흥화현. 금 승안5년(1200년) 흥주를 설치, 치소는 흥화현(현 난하거리 서남 지점)에 두었다.˝
즉, 고려의 흥화주(興化州)는 요의 북안주 흥화현으로서 현 하북성 승덕시 난하거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요사지리지」제38권 제8지 동경도(東京道) 용주(龍州)조의 기록이다.
〃龍州,黃龍府.本渤海扶餘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軍將燕頗叛,府廢.開泰九年,遷城于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統州五、縣三: 黃龍縣.本渤海長平縣,?富利、佐慕、肅?置. 遷民縣.本渤海永寧縣,??水、扶羅置. 永平縣.渤海置.〃
˝용주. 황룡부. 발해 부여부.(..) 황룡현, 천민현, 영평형 등 3개 현이 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기록이다.
〃通州,安遠軍,節度.本扶餘國王城,渤海號扶餘城.太祖改龍州,聖宗更今名.保寧七年,以黃龍府叛人燕頗餘黨千餘戶置,升節度.[二一]統縣四: 通遠縣.本渤海扶餘縣,?布多縣置. 安遠縣.本渤海顯義縣,?鵲川縣置.歸仁縣,本渤海?帥縣,[二二]?新安縣置.漁谷縣.本渤海縣.〃
˝통주 : 안원군, 절도, 본래 부여국 왕성. 발해시대 부여성이라 부름. 태조가 용주로 개명, 통원현, 안원현, 귀인현, 어곡현 등 4개현이 있다.˝
〃通遠縣 遼置,今遼寧省開原縣地〃
˝통원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安遠縣 遼置,今遼?省開原縣地。〃
˝안원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漁谷縣 遼置,今遼寧省開原縣地。〃
˝어곡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즉, 통주(通州)는 현 요녕성(遼寧省) 개원현(開原縣)에 치소를 두고 개원 일대를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요사지리지」38권 제8지 동경도(東京道) 철주(鐵州)조의 기록이다.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八]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湯池縣.〃
˝철주, 건안군, 자사, 본래 한의 안시현, 고구려 안시성, (..) 탕지현을 관할˝
영구시(?口市) 홈페이지(http://www.runsky.com/homepage/dl/spec/2004/forum/cities/userobject1ai449765.html)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口市基本?? : 唐末,北方先后有契丹、女?、蒙古3?民族政?更迭,?在?口市境??置地方 政?。??渤海?的一些州??到?口地域?,在今熊岳???州?熊岳?,在今?池?置 ?州??池?,耀州?岩??,?州????,??曷??大王府和辰州?建安?。〃
˝영구시 기본개황 : 당말,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 등 3개 민족정권이 번갈아 일어날 때, 요나라는 발해의 주현을 영구시 경내에 옮겼다. 현 웅악진에 노주를 설치하여 웅악진을 거느리고, 현재의 탕지진에 철주를 설치하여 탕지현을 거느리고, 요주는 암연현을 거느리고, 귀주는 귀승현을 관할하고, 그 외에 갈소관대왕부와 진주(건안현을 관할)를 설치하였다.˝
즉, 철주는 현재 요녕성 남부 영구시 탕지진(湯池鎭)에 치소를 두고 영구시 일대를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귀주(龜州)는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이 1019년에 소배압(簫排押)이 통솔하는 요군(遼軍)을 격멸하여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므로 특별히 유의하여 찾아보았다.
『고려사(高麗史)』58권 제12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龜州本高麗萬年郡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龜州顯宗九年爲防禦使. 高宗三年丹兵來寇州人拒戰斬獲甚多至十八年蒙兵來侵兵馬使朴犀盡力禦之力屈猶不降以功陞爲定遠大都護府. 後爲都護府又改定州牧.〃
˝귀주: 본래 고려 만년군, 성종13년 평장사 서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귀주성을 쌓다, 현종 9년 방어사. 고종3년 거란병이 침입해 항전하여 적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많았다. 18년에 이르기까지 몽고병이 내침하여 병마사 박서(朴犀)가 진력하여 싸우고 항복하지 아니한 공로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도호부를 정주목으로 고치다.˝
귀주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귀주가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와 정주목(定州牧)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즉, 귀주가 정주(定州)라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하여『고려사』와『요사』의 기록을 보자.
〃定州古稱巴只[一云宣威.]靖宗七年爲定州防禦使置關門恭愍王五年陞都護府別號中山. 有鼻白山.[春秋降香祝行祭.]〃
˝정주, 옛 이름은 파지(일명 선위) 정종7년 정주방어사를 두고 관문 설치. 공민왕5년 도호부로 승격, 또 다른 이름은 중산도호부라고도 하였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
중산(中山)에 관한《고금지명대조표》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中山??①中山?,??都?(今河北定?)。一度?魏所?,??后???(今平山?北)。公元前296年??所?。②?郡、?,治?奴(今定?)。后燕以?都城。隋?。⑧宋以定州?中山府,治安喜(今定?)。④今中山?,宋以??香山?。1925年?中山逝世后改今名,中山故里在?南翠亨村。〃
˝중산-②한나라때, 군, 국, 치소 노노(현 하북 정현) 후연의 도성. 수나라 때 폐함. 송은 정주를 중산부로 하다. 치소 안희(현 하북 정현)˝
〃定州??北魏改安州?定州,北?改其治所?奴?安喜?,?今河北定?。北宋末定州?中山府。明改定州。〃
˝정주: 북위때 안주를 정주로 개칭. 북제는 그 치소 노노를 안희현으로 하다. 즉 현재의 하북 정현이다. 북송말 정주는 중산부가 되다. 명나라때 정주로 고치다˝
현재 하북 정현(定?)이 정주의 치소였고, 전국시대 중산국의 도성으로서, 북송과 고려가 각각 중산으로 불렀다는 것이『고려사』와 중국의《고금지명대조표》가 일치한다.
「요사지리지」제38권 제8지 동경도(東京道) 정주(定州)조의 기록이다.
〃定州,保寧軍.高麗置州,故縣一,曰定東.聖宗統和十三年升軍,遷遼西民實之.?東京留守司.統縣一: 定東縣.高麗所置,遼徙遼西民居之.戶八百.〃
˝정주, 보령군, 고려때 주를 설치, 정동현이 있다.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였다. 동경유수사에 속하다. 호수는 팔백이다.˝
즉 요서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한 것으로 보아 정주는 요서군과도 가까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정주의 위치는 아래의『요사』「지리지」동경도 보주(保州)조를 보면 정주와 보주와 연접한 것으로 나타난다.
〃保州,宣義軍,節度.高麗置州,故縣一,曰來遠.聖宗以高麗王詢擅立,問罪不服,統和末,高麗降,[七]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於此置?場.?東京統軍司.統州、軍二,縣一: 來遠縣.初徙遼西諸縣民實之,又徙奚、漢兵七百防戍焉.戶一千.〃
˝보주, 선의군, 절도, 고려때 주를 설치. 래원현이 있다.(..)통화말 고려가 항복하여 개태3년 보주 정주 두 개주를 취하여 이곳에 각장을 설치하다. 동경통군사에 속하게 하다. 래원현이 있다.
래원현,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다. 또 해(奚)의 한인 병사 칠백을 옮겨 방어하게 하다. 호수는 일천이다.˝
「요사지리지」36권 제6지 경향정(京?丁) 동경(東京)조의 기록이다.
〃東京,本渤海,以其地建南京遼陽府.統縣六,轄軍、府、州、城二十六,[五]有丁四萬一千四百.天顯十三年,太宗改?東京.遼陽府: 定州定東縣丁一千六百. 保州來遠縣丁二千.〃
˝동경, 원래 발해영토. 그 땅에 남경 요양부를 설치. 6개현을 관할. (...) 태종때 동경이 되다.
요양부 : 정주 정동현 장정 일천 육백명, 보주 래원현 장정 이천명˝
귀주가 정주가 되고,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가 되었다는 기록에서 추정되는 것은 정주(定州)의 정동현(定東縣)과 보주(保州) 의 래원현(來遠縣)의 합성지명(定+遠)으로 보여진다.
하북성 보정지구(保定地區)는 북경·천진과 함께 하북의 삼각축을 이루는 중요한 곳이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교통요지로서 하북지구는 당시 남쪽의 송, 북쪽의 요나라, 동쪽의 고려가 서로 각축을 벌이던 요지였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은 바로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정현(定縣)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곽주(郭州)에 대해서는『고려사』데58권 제12지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郭州本高麗長利縣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郭州顯宗九年爲防禦使高宗八年以叛逆降稱定襄. 十八年避蒙兵入于海島元宗二年出陸隸隋州恭愍王二十年復郡號.〃
˝곽주. 본래 고려 장리현. 성종13년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곽주성을 쌓음. 현종9년 방어사가 되고, 고종8년 반역하여 정양(定襄)으로 강등하여 부르고, 18년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海島)에 들어갔다가. 원종2년 육지로 나온 뒤 수주(隋州)에 속하게 하고 공민왕 20년 다시 옛 군 이름을 되찾다.˝
『요사』「본기(本紀)」성종(聖宗) 6년의 기록에는 고려에 포로가 되었던 여진인이 요나라의 황제 성종에게 개경으로부터 곽주에 이르는 노정에 관해 진술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丙寅,詳穩張馬留獻女直人知高麗事者.上問之,曰:「臣三年前?高麗所虜,??官,故知之.自開京東馬行七日,有大砦,廣如開京,旁州所貢珍異,皆積于此.勝、羅等州之南,亦有二大砦,所積如之.若大軍行由前路,取曷蘇館女直北,直渡鴨?江,?大河而上,至郭州與大路會,高麗可取而有也.」上納之〃
˝병인, 장마류가 고려사정을 아는 여직인(주1)을 바쳤다. 왕(요의 성종)이 묻자 대답하기를 “신이 3년전 고려의 포로가 되어 낭관이 되었던 고로 압니다. 개경 동쪽에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대채가 있는데 크기가 개경정도 되고 여러 주에서 보낸 진귀한 공물로 쌓여 있으며, 승주, 나주 등의 남쪽에 또한 두 개의 대채가 있는데 공물의 쌓인 바가 그와 같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직(주2)의 북쪽을 얻고, 압록강을 곧바로 건너서 대하(大河)(주3)를 거슬러 올라가면 곽주와 대로(大路)(주4)를 만납니다. 고려를 가히 취할 수 있습니다.” 왕이 받아 들이다.˝
※ 필자 주 : 주(1) 여직(女直)은 여진(女眞)과 같다. (2) 갈소관여직은 현 요녕성 남부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연윤 이북에 있었었다고 한다.(갈소관로치소고 : 동만군, 북경문물, 1992년 제1기). (3) 대하(大河)는 현 대릉하 또는 난하로 추정된다. (4) 대로(大路)는 단지 큰길을 가리킨 것 같지 않다. 행정구역명칭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요나라에서는 ‘00로’라는 행정구역이 없었다. 요사가 후대의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 기록 된 것을 고려하면, 어쩌면 역사가가 기록 당시의 행정구역명칭을 혼용하여 쓴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즉, 북경지방이 대녕로(大寧路)에 속하였는데, 위의 대로는 대녕로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북방문물(北方文物)》(http://www.bjkg.com/wenxzl-sub1.asp?id=812) 1992년 제1호 갈로관소치소고(曷??路治所考) 동만군(董万?)의 기사에 따르면 이와 같다.
〃?代曷??女?,金曷??路治所,?在?口地?盖?南部和??永?澗以北地域??置〃
˝요대의 갈소관여진, 금대 갈소관로 치소는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영윤 이북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금사(金史)』「지리지(地理志)」24권 5지의 기록을 보자.
〃盖州,奉???度使,下。本高?盖葛牟城,?辰州。明昌四年,?曷??〃
˝개주, 봉국군절도사, 하. 본래 고려 개모성, 요나라 진주. 명창4년 갈소관을 폐하다.˝
위 여진인의 진술을 보면,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현재의 만주를 가로질러 요녕성 남부 영구지구에 도착한 뒤 압록강(현재의 요하)을 건너서 또다시 대릉하 또는 난하와 만나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다소 추상적인 진술이나 대체적으로 현 하북성 중·북부 지구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래에 하북성 향하현의 연혁을 더 살펴보자.
홈페이지(http://www.xianghe.cn/zjxh/xhxz.htm)에 기록된 향하현(香河?)의 설치연혁(建置沿革)이다.
〃公元936年,石敬塘(后?晋高祖)勾?契丹(后??)?后唐,割燕云十六州?契丹,此地?契丹。 契丹?同元年(938年),于武??村置??院,???新?。后居民集聚,?成井肆,遂由武?、??(今?通?)、三河?出部分地域置香河?。??境??,?? 至元九年 (1272年),?大都路大?府。至元十三年,升???(今北京市通????)?州,香河??大都路?州,明洪武元年(1368年),香河??州,?山?行省北平府。〃
˝기원936년, 석경당(뒤의 진 고조)이 거란(위의 요)과 연합하여 후당을 멸하고, 연운16주를 거란에게 할양하여 이곳은 거란에 속함. 거란 회동원년(938년) (..) 무청(武?), 곽현(??, 현재 통현), 삼하(三河)현의 부분을 떼어내어 향하현을 설치(...) 원나라 지원13년(1276년) 향하현은 대도로 곽주(?州)에 속함.˝
향하현은 북경과 천진 사이에 있다.
중국의 어떤 연구자가 쓴 아래의 글(http://www.clcn.cn.net/guest/search/st_dianzi/st_jw/zgny/zgny29.htm)에는 위 하북성 향하현 홈페이지와 내용이 같으나 곽주를 ‘?州’라고 표기하지 않고 ‘郭州’라고 표기하고 있다.
〃天津市的武??和河北省的香河??入二十??村庄,?似元朝的郭州,只是比郭州小得多。《?史》、《元史》、《?宇通志》和《方??要》中??:郭?原名?村?,?代改?郭??,元朝至正十三年升格?郭州,?且管?武?和香河??。明朝初年,降?郭?。〃
˝천진시 무청현과 하북성 향화현의 28개 촌장을 합하면 원나라의 곽주와 유사하다. 요사, 원사, 환우통지, 방여기요에 기록된 곽현의 원명은 곽촌진이다. 요나라 때에는 곽음현(郭陰縣)이었다가, 원대에 곽주(郭州)가 되어 무청(武?)과 향화(香河) 두 개현을 관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곽주는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 기술과 다르게 만리장성 너머 현재의 북경과 천진 사이에 있는 향화현에 있었다. 이것은 위『요사』에 나오는 여직인(女直人)의 진술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4. ‘서희 개척 6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요사지리지」제39권 제9지 중경도(中京道)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조의 기록을 보자.
〃統州十、縣九:10주와 9현을 통괄한다. 大定縣.白?故地.以諸國?戶居之.대정현 長興縣.[三]本漢賓從縣.以諸部人居之.(장흥현, 한의 빈종현, 여러부 사람이 거주하다) 歸化縣.本漢柳城縣地.(귀화현, 본래 한의 류성현지이다.) 〃
위『요사』의 기록을 보면 관할 9현 중에 장흥(長興), 귀화현(歸化縣)이 있다. 장흥진(長興鎭)은 그 중 장흥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의 빈종현(賓從縣)이라 하였다. 노북경망(老北京?)에 실린 당대의 북경지방의 행정구역 설명(唐代地方行政?)을 보면 빈종현은 선주(?州)에 속하였고, 그 치소는 로현 고성(현 북경 통현 동쪽8리 고성촌)에 있었으며 빈종현을 관할하였다고 되어있다.
〃?州,寄治于潞?之古潞城(今通??8里之古城村),???? 〃
˝선주, 로현의 옛 로성에 치소를 설치(현 통현 동쪽8리 고성촌),˝(http://www.oldbeijing.net/Article_Show2.asp?ArticleID=2351)
위『요사』와 노북경망의 기록으로 볼 때 장흥진은 북경시 통현에 있었다. 즉, 장흥진은 그 위치가 곽주와 인접하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에 귀화현(歸化縣)이 있었다. 귀화진(歸化鎭)은 위의 귀화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화현은 한(漢)의 유성현(柳城縣)이라고 하였다. 고대사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바로 그 유성(柳城)이다.
〃柳城?:后?省,故城在今??省?城?西南,?一?志?故城?后魏及唐之?州、?之?中府,今河北省朝??,按后??注,故城在今?州南,??柳城非唐之?州治可知,又李兆洛?在今永平府境,?芳??代地理?革表,?今昌黎西五十里?安社?古柳城。〃
˝한대의 유성은 현 요녕성 흥성현 서남이다. 청 일통지에는 고성이 곧 후위와 당의 영주이고, 요나라의 흥중부는 현 하북성 조양현이라고 하였다. 후한서 주에 따르면 고성은 영주의 남쪽에 있었다. 즉, 한의 유성은 당의 영주치소가 아니다. 이조락은 현재의 영평부 경내라고 하였다. 진방적은 역대지리상혁표에서 현재의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가 옛 유성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일단 진방적의 이론을 택하여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를 귀화진의 위치로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장흥·귀화 설치를 같이 하였고, 군사적으로 서로 상응할 수 있도록 가까이 있어야 하므로 장흥과 가장 가까운 창려 서쪽을 채택하였다.
『고려사』58권 제12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安義鎭顯宗九年築城.〃
˝안의진은 현종 9년에 쌓았다.˝
안의(安義)라는 지명은『신당서』에 나오는데 상곡군에 속한 9개 부(府) 중의 하나이다.
〃易州上谷郡,上.土貢:紬、綿、墨.戶四萬四千二百三十,口二十五萬八千七百七十九.縣六.有府九,曰遂城、安義、脩武、德行、新安、古亭、武遂、長樂、龍水.有高陽軍.易,上.容城,上.本?.武德五年,以容城及幽州之固安、歸義置北義州.貞觀元年州廢,縣還故屬.聖曆二年以拒契丹更名全忠,神龍二年復故名,天寶元年又更名.遂城,上.?水,上.滿城,中.本永樂,天寶元年更名.有?山.有永?軍,貞元十五年置.五回.中下.開元二十三年析易置,?置樓亭、板城二縣.天寶後省.〃
˝역주 상곡군, 현은 6개소, 부는 9개, 수성, 안의(安義), 수무, 덕행, 신안, 고정, 무수, 장락, 용수,…˝
산서성 장치시(?治市)의 홈페이지(http://club.heima.com/show_topic.aspx?forumid=198605&topicid=840003)를 보자.
〃?治市位于山西省的?南部,居太行之?,古?"上?".<?名,?洲?>?:"上?,?,所也,在山上,其所最高,故曰上?."<文?通考>?:"其地?高,?天??,故云."<潞安府志>?:"潞以水名,其?上? 五代后唐庄宗初,置潞州。梁末帝?(913-921年),改?匡??,?余,唐?梁,改?安??。后晋(936-947年),??昭??。后?、后周(947-960年)因之。具治潞州。〃
˝산서성 장치시는 산서성 동남부에 있다. 옛 명칭은 상당이다.(...) 오대 후당시 로주를 설치..당이 량을 멸하고 안의군으로 개칭하다. 후진때 소의군이 되다.˝
후당 때 산서성 장치시가 안의군이 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의 안의진은 산서성 장치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곽주(郭州)·귀주(龜州)·흥화진(興化鎭)의 성은 위 ‘서희 수복 6주’ 중 곽주·귀주·흥화주와 명칭이 같은 것으로 보아 그 곳에 성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여기서 ‘서희 개척 6성’은 ‘서희 수복 6주’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5. ‘서희 수복 6주’는 왜 ‘강동6주’로 알려졌는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희 수복 6주’와 ‘서희 개척 6성’은 현 하북성 북쪽에서부터 요녕성 요하(압록강) 동서에 걸쳐 있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왜 압록강 동쪽 ‘강동 6주’라고 백과사전과 국사 교과서에 기록되고 있을까?
언제부터 ‘강동 6주’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혹시 이러한 용어도 일제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용어라면 우리에게 오랫동안 세뇌교육과 최면을 건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잘못된 용어는 적합한 다른 용어를 찾아서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6. 결언(結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희 수복 6주’ 중 흥화주는 요의 북안주 흥화현으로서 현 하북성 승덕시 난하거리, 용주는 현 길림성 농안현, 통주는 현 요녕성 개원현, 철주는 현재 요녕성 남부 영구시 탕지진, 귀주는 현재의 하북성 정현, 곽주는 현재의 북경과 천진 사이에 있는 향화현에 있었다.
‘서희 개척 6성’ 중 장흥진은 북경시 통현, 귀화진은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 안의진은 산서성 장치시, 나머지 곽주(郭州)·귀주(龜州)·흥화진(興化鎭) 성은 위의 6주 위치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위치 비정은 역사적 사실관계를 충분히 고찰하지 못하고 다만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서, 중국의 고대지명사전에 실려 있는 동일 지명을 찾아서 추정한 것이어서 한계가 있다. 필자의 조그마한 노력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독자 여러분의 의견제시를 기대한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쓰다 쓰요키치[津田左右吉]의 식민사학을 계승한 이병도(李丙燾)와 그 후예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활동 영역을 한반도 내로 축소시키기 위해 얼마나 집요한 세뇌교육과 최면술을 걸었는지 그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이병도학파가 우리나라의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으며 또, 한국인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중국인·미국인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서술해왔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병도사관에 대한 극복이야말로 진정으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우리나라 국민의 역사적·사회적 의식을 바로 세우는 지름길이 될 것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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