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인들은 악마를 쫒거나 질병을 해충 등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의해 염색된 천을 몸에 걸치거나 몸에 색을 칠하였다.
사회가복잡해짐에 따라 사회적으로 계급이나 빈부의 차이를 나타냈고,종교적 또는 민족적 상징이나 감정을표현에 색이 이용되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자연물에서추출한 천연염료를 사용하면서 염료를 발달 시켰다. 일반적으로4대 신석기 문명의 발상지역의 하나인 인도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붉은색 면직물이 염색의 기원에 대한 세계적인 실증유물로 인정되고 있다. 인도 지방에서는 쪽풀에서 감색의 염재인 인디고를 이집트에서는 꼭두서니의 뿌리에서 추출한 빨간색 페니카아 지방에서는 뿔고동의 조개에서 보라색을 얻었다. 약3000년전에는 아라비아와 인도지방에서 나무에 기생하는 연지충으로 홍색의 염료가 만들어졌다. 페르시아및 근동에서는 수목등에 기생하는 패각충에서 보라색염료를 추출하여 사용한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농경생활의 시작과 함께 식물의재배가 시작된것으로 짐작되며 섬유를 꼬아서 실을 만드는데 사용된 방추차 적지않게 출토되고 있다. 고대 한국직물문화는 북방계 문화의 인도에서 전래된 화남문화가 수용 되었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인도의 아유타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임에 따라 문명의 발생지인 인도의 문화를받아들이게 되었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불교와 도래와 함께 본격적으로 중국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삼한시대에는 이미 마포,면포,회,금,수,등의비단과 계 와 모포등 다양한 포가 생산되엇다는것을 알수 있다.
1.상고시대: 우리의 선조인 5000여년 전에 정착한 신석기인들은 저급한 원시적인 의류생활을 벗어났다토기 문화의 유입으로색료의 채취및 응용은 색의류 실려의 가능성도 생각 할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토,즙 등의 식물성 염료등을 사용하여 천에 도포하는 염색법이 있었다는 것은 쪽염색도가능 했으리라 생각된다.
2.삼국시대: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염료는 보다다양하게 그리고 널리사용되었다. 고구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에 와서 쪽물의 염색은 비록 상류계층에 국한되었지만 널리 쓰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가)고구려: 고구려의 의복을 살펴보면 주부의복색은 음양오행설에 의한 복색임을 짐작할수 있으며 갈의표현된 서민의 복색은 갈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수있다. 고구려에서는 풍부한 색의 염색술이발달하였으며, 여러 방법으로 문양도 나타내는 염색이있어서 침염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복색으로 사용된 색은 赤(적)黃(황)靑(청)白(백)등으로 직물염료인 쪽,홍화 그밖의식물를 우려낸 즙을 사용했던것으로 추정된다.
나)백제:백제는 부여 국가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마한을 기준으로 하여 건립된 국가인만큼 일찍부터 중국의공복제도를 받아 들여 직급에 따라 의복의 구분이 어느정도 되어 있었다. 왕을 비롯한 관료들은 복색이 붉은색 계통 이며 이 당시 많이 사용한 색은 赤(적)黃(황)靑(청)白(백)紫(자)색등이다. 백제의 특징은 일반 평민에게 자의 와비의 착용을 금함으로써 치자와 피치자의 구별이뚜렸하기 의하여법으로 규제 하였다.
다)신라: 신라의염색기법은 일찍부터 발달한 것으로 보이는데 법흥왕 1년에 육부인 색존비의 제도를 정하여 그 직의에 따라 자색,비색,청색,황색 즉 태대각간으로부터 대아찬까지는자주색 아찬에서 급찬까지는붉은색 대나마에서나마까지는 푸른색 대사에서 선저까지는 노란색을 착용케 하였다. 삼국사기40권에도 법흥왕 7년 정월에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들이 공복을 정하여 옷 색깔의 순의를 정하였다. 일반 평민들은 천연섬유 그대로를 입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백색을 숭상했다는 것이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3.고려: 고려시대에 와서는 통일 신라 정권이 순조롭게 이양된 문화가 신라 문화 계승이라고 할수 있을만큼대책없는 현화이 나타난다. 왕의 복색이 신라와 같은 자황색으로 말엽인 32대에 자황색 의복이 대황색으로 변해 왔던 것이다. 재정 된 공복제도를 보면 고려시대의 색을 살펴볼수 있다. 이 세대 와서는 전대와 달리 복장에 금색의하는 일이 성행하였던것 같다 일반 백성에서도 의복에 염색을 하는 일이 성행하였던 것 같다. 후대에와서는 계급을 나타내는 것으로계급 관직에 있어 년한 저근에 따라 이동되며 의복 모양을 달리 하였던 것같다. 이때 사용된 빛깔이 대체도 청색 자색이중심이었던 것 같고, 청색의 염료는 쪽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송의 각색 문화 직물이 고려의 직물과는 비교가 되며 여말에는 조복에 쓰이는 고구려가 이니므로 조복을 동서 오품 이하에 착용케 함은 고려말 염직물의 생산을 막는 일이다 고려의 상공업을 크게 둘로 나무면관영공업과 사영공업으로 나눌 수 있다.관영직조는 수공업장인 "도염서"등을 두어 전문 장인인 염료공장과염색공을 두어 염색을 담당하였다.사영공업은 귀족자의 사용으로 임여 생산물을 교환무역에서 소비하게하였고, 여성에 있어서 사원에 직조된직물은 조정 및 의료에 유당 하였으나 염색직물은 없었다. 고려에서는 이런 일부 특수층을 위한 것이나마 염직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삼국을 거치는 동안의 훌륭한직물과우수한 기능인이 고려에 와서는 더욱 심해짐으로 훌륭한 기능인을 외국에 빼앗기는 한편 남아있는사람들은 또한자손에게 계승시켜 대대손손의 자랑스런 가업으로 남기지 않으므로 국내의 경제사정과 고급견직믈을 장려할수 없었던 여러 가지 원인이 고려 염직물의 저조한 현상을 나타냈다.
4.조선시대: 복식의 염색이나 모양을 국가에서 통제하여 어느시대보다 복식에 의한 계급의식을 선연히나타냈던시기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염색도 고려시대에 이어 발전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쪽물염색과 홍화염색의 비약적인 성장이다. 우리나라의 염료의 시종은 유청, 혹은 쪽물인데 이것은 잎과 줄기를 이용하여 착염한 것이었다. 옷감을 염색하기 시작한 것은 상류 상회에 제한되어 있었지만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이것이 조선추에 백색의 착용을 금함으로써 조선시대에는 보다 활기찬 염료의 개발이 가능했던 것이고 이중에서 대중을 이루는 삼국시대부터 일반화되지 않았지만 그 제조방법은 쪽물 염색이다. 관복과 제복의 대부분이 쪽물을 염색한의복이대중을 이루고 있다 평민 생활에서 사용 했던 삼베 보자기그리고 염색하기 전에 색에 대한 심리및 철학적 배경을 논하면 조선시대 복식은 암시대와 마찬가지로 그 중심은 중국의 음양오행실에 한본을 둔 오방정색이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새로운 철학이론이 등장하였다 오방정색인 황,적,청,흑,백색을 중심으로 살피면 각색에 해당하는 직물염료를 살펴보았다 붉은색 계통에 속 했던 조선시대의 복색으로 정색과 흙색을 비롯하여 다홍색, 꼭두서니,연지색,비홍색자색 등이 이었다. 조선조에는 홍색을 왕의복색으로 정하였던것이다.
자색 등이 이었다. 조선조에는 홍색을 왕의복색으로 정하였던것이다. 청색은 일반인에게도 허용되었던것 만큼 조관에서는 선비 그리고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웃옷으로 입혀졌던 도포의 길복이 청색이기도 하였다. 푸른색의 염료는 남 닭의장풀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고 그밖의 닥나무잎, 수장나무열매등이 쓰여지기도하였다 . 검은색 계열에 포함되었던 조선시대의 흑색,검정색,현색등이 있었다. 검은색을 물들이는데 사용했던조선 후기 영정조시대 이후에는 산업이 발달하고 실학이 들어옴에따라 문화수준이 수직 상승을 일으켜염색의 수요를 따라 잡기 어렵게 되었고 일반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염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건국초기 공조에 각종 기능장인들을 두는 제도는 정조3년에 전부 폐지 되었다.
5.근대이후: 영.정조 이후 많은발전을 이루었던 조선시대의 염색법은 그 뒤 국운의 쇠락과 함게 하나둘없어지기 시작하여 개화기 이후 서양에서 합성 염료가 도입되면서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일제 강정기와 광복 뒤에는 어수선한 상황 때문에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기우릴만한 형편이 못 되었고그 뒤 새마을운동 시작하면서 염색은 그 흔적 조차 희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