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병단의 공격은 여러 곳을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 1해병사단과 미 24사단이 버티고 있던 곳은 아무래도 힘에 겨웠다. 우선 미 1해병사단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북한강을 도하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아울러 미군이 지닌 화력과 전투력을 생각하지 않았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중간에 있던 한국군 6사단이 가장 뚫기 쉽다고 봤던 것이다. 참전 이래 줄곧 국군을 먼저 노리고 덤벼들던 중공군의 공격 방식 그대로였다. 이 무렵의 중공군은 나름대로 포병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격은 22일 오후 5시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강력한 포격을 먼저 실시했다. 9병단 예하 제20군 소속 3개 사단이 국군 6사단에 몰려들고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을 막아내기에는 6사단의 힘이 크게 달렸다.
중공군은 6사단의 틈을 찾아 뚫는 데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사단의 퇴로가 막혔다. 횡성의 전투에서 국군 8사단이 당한 경우와 같았다. 바로 통신선이 먼저 끊기고 말았다. 사단의 각급 부대에 대한 통제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대 사이의 소통이 멈추고, 사단본부의 일관된 지휘마저 불가능해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좌전방의 19연대는 일찌감치 중공군의 포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앞과 뒤에 모두 중공군만이 보이는 상황이었다. 우전방의 2연대와 그 뒤를 받치기 위해 진출해 있던 예비 7연대의 상황도 절망적이었다. 2연대와 7연대는 적중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차량과 장비 등을 모두 버리고 후퇴에 나섰다.
- 6.25전쟁에 참전 중인 중공군이 수심 깊지 않은 강을 건너 공격에 나서고 있다.
두려움 속 급격한 패퇴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문제였다. 6사단이 급격히 무너졌던 배경에 관한 얘기다. 아무래도 6사단은 1950년 10월 말 북진 당시 압록강 앞 초산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참담한 패배를 맛봤던 두려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듯하다. 6사단으로서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서전(緖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초산 일대에서 벌인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아주 커다란 패배를 당한 6사단으로서는 좀체 당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창리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흘렀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졸지에 중공군의 대병력을 만나 앞과 뒤로 포위를 당한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좌전방의 19연대는 중공군이라는 바다에 갇힌 섬이었다. 고립은 점점 더 깊어졌다. 중공군의 막대한 병력이 뚫린 구멍을 타고 계속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2연대와 7연대는 두려움에 젖어 모든 장비와 화력을 버린 채 방향을 잡지도 못하고서 마구 도망쳤다. 두 연대의 장병은 무질서하게 살길을 찾아 나섰다. 좌우로 인접한 아군 부대로 도망치거나 일부는 중공군 포위를 뚫고 후방으로 달아났다. 6사단의 종심이 깊지 않은 점이 문제였다. 중공군은 옆으로 길게 거점을 형성한 뒤 늘어섰던 국군의 저지선을 뚫고 금세 후방으로 내달렸다. 이들은 곧장 7연대의 후방에 있던 국군 제27 포병대대, 미 제2 박격포대대 C중대를 공격했다. 먼 곳으로 쏘는 화포(火砲)를 지닌 포병부대는 적의 보병 공격에는 지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들 또한 성난 물길에 밀린 모래처럼 마구 무너졌다.
문제는 역시 퇴로(退路)였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6사단이 적에 밀려 후퇴할 때 갈 수 있던 길은 하나였다. 사창리로부터 춘천을 잇는 국도였다. 포병 병력과 후방의 인원들은 곧장 이 도로로 몰려들었다. 길을 따라 먼저 신포리로 철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방어선 자체가 모두 무너진 상태였다. 사단 전체가 무너지는 낌새를 보이자 후방에서 이를 지원하던 미군 포병 병력도 동쪽의 북한강 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갈팡질팡 하면서 이리저리 깨지고 뜯어져 없어지기도 하는 상황이 바로 지리멸렬(支離滅裂)이다. 당시의 상황이 꼭 그랬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도로는 곧 철수하는 병력으로 가득 메워졌다. 장비를 지니고 갈 수 없던 포병대대가 일부 장비를 유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