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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것 같다. 여름 방학이 되자마자 지리산을 오르기로 했다. 지금은 등산이 쉬운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큰 맘 먹어야 하는 복잡한 행사다. 우선 장비가 문제다. 등산장비라고 시장에서 파는 것은 없고, 6.25전쟁을 겪으며 군장비가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군에서 쓰다버린 도구를 동대문시장이나 청계천에서 구할 수 있었다.
군용 배낭과 워커라 불리는 군용 신발, 모자, 버너, 항고라고 군인들이 밥해 먹는 그릇인데 냄비나 솥 같은 것이다. 수통도 군용밖에는 없었다. 거기다 파카, 텐트며 우의까지 전부 군용이었고, 도끼 삽 괭이로 같이 쓸 수 있는 기구까지 한꺼번에 팔고 있었다. 복장도 군 야전복을 그대로 팔고 있는데 염색약까지 있어 검정색으로 염색만 하면 누구나 군복을 입을 수 있었다.
원래 지리산은 큰 산이기 때문에 2박3일은 잡아야 한다. 이 많은 장비를 다 준비하고 식량도 넉넉히 준비해야 하는데, 요즘처럼 인스턴트 식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라야 밥 해먹을 쌀과 된장, 고추장, 묵은 장아찌, 밑반찬 정도뿐이다. 그 시절에는 항고 밥에 깻닢 장아찌를 올려서 먹는 맛이 정말 꿀맛이었다.
처음부터 인원을 결정하고 장비를 구입하고 새벽차를 타고 남원역에 내려서 합류한 다른 대원들과 산내라는 협곡을 지나 경상도 마천을 거쳐 백무동 마을에 들러 일박 하고 벽소령을 넘어 1,915m의 천왕봉에 올랐다가 세석평전으로 내려갔을 때다. 내가 보기에 세석은 언젠가 산불이 나서 나무는 다 타버리고 여기저기 고사목이 있을 뿐인 허허벌판이었다. 거기 한복판에 토막집이 하나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키가 크고 건장한 노인 한 분이 근엄하게 앉아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취사도구가 없었다. 아마도 생식을 하며 사는 것 같았다.
존함을 물어보니 이름은 없고 도 닦는 ‘허’라고 했다. ‘허도인’이다. 솔잎과 나물을 먹고 살며, 평생 불을 피운 적이 없고 추운 겨울에는 토굴 속으로 들어가 칩거한단다. 산에서 사는 도인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체질의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첫눈에 허도인이 소양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선 체격이 건장하고 어깨가 쩍 벌어지고 이마가 넓다. 성격은 친절하고 매우 사교적이며 대화를 즐긴다. 성품이 정결하며 표정이 밝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산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속세에 물들지 않고 참 깨끗해 보였다.
원래 소양인은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다고 들었다. 감기에도 냉수 한 그릇으로 치료되고, 마음고생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언제나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 있고, 불의를 보면 화를 내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원체 비위가 좋아서 무엇이든지 잘 먹지만 특히 돼지고기를 잘 먹고 등산을 즐긴다. 허도인과 산행해 보았는데 네 사람 분량의 짐을 다 지고도 비호와 같았다. 평생 숨찬 줄 모르고 산행했단다.
한번은 조난당한 학생들을 구해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상한 독초를 먹고 벼랑에서 떨어져 온몸에 멍이 들어 꼼짝도 못하는 학생을 나흘만에 일으켜 하산하게 했다 한다. 그때 쓴 약 처방을 보여주길래 적어두었다가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렸더니 “독활지황탕이라고 소양인이 골병든 데 특효약”이라고 하셨다. 놀라운 일이다. 의사도 아닐텐데 응급환자에게 대처하는 능력도 전문의 수준이다.
이튿날 대성리 마을로 해서 하동 쌍계사로 내려오는 길을 안내해줘서 전 대원이 무사히 지리산 등산을 마칠 수 있었다.
절단할 뻔했던 처녀 다리 체질 처방으로 살려내
1962년 동양의과대학을 졸업한 나는 고향 남원에서 삼세(三世)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학생이던 시절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리고 당시 대신당(大信堂)한의원을 하고 계시던 아버지에 이어 3대째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어느날 이른 아침, 문을 열었는데 안면이 있는 할아버지 친구 분이 불쑥 들어섰다. 나는 자리를 권하며 그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아닐세. 여보게 들게나!”
그 분은 문을 돌아보며 누군가에게 말했다. 건장한 한 사내가 들어오는데 그의 등엔 한 젊은 여인이 업혀 있었다. 등에 업힌 여인은 오른쪽 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 애가 내 손녀일세.”
사내가 여인을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손녀의 얼굴은 매우 초췌해 보였다. 그는 손자뻘인 나에게 예를 갖추어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손녀의 병증 탓인지 적잖이 흥분한 눈치였다.
“달포 전에 산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전주에 있는 병원에선 악성 골수염인가 뭔가라면서, 대뜸 우리 손녀딸 다리를 잘라내야 한다는 거야. 내 그 소식을 듣고 전주로 올라가 그 길로 손녀를 데리고 내려왔네. 자네가 한번 보게나!”
상태가 무척 심각했다. 오른쪽 무릎 밑이 검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여기저기 치료받느라 뚫어놓은 상처에서 진물과 피고름이 진득진득 흘러나오고 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다리가 보기 흉할 정도였다.
나는 여인의 병증을 살핀 후에야 그녀의 얼굴을 면밀히 바라볼 수 있었다. 매초롬한 눈썹과 눈매, 달걀형의 얼굴, 그리고 작고 가는 입술과 매끈하게 내려온 코.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녀를 가리켜 남원에서 알아주는 미인이라고 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 이 여자가 바로 이 할아버지의 손녀였구나! 그런데 다릴 잘라야 한다니!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당사자에게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을 것이다.
맥을 짚고 체형을 살피고 음색(音色)도 들어보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진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 그녀의 입에서 심한 구취(口臭)가 배어 나왔다. 용모와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앉아있는 자세나 할아버지를 통해 들은 그녀의 행동거지 등을 통해 그녀가 소양인(少陽人) 체질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내가 자네 할아버지와 벗이니 자네는 내 손자뻘이네. 그리고 자네가 고향에서 삼세한의원이라고 이름을 걸고 있어 나름의 의공(醫功)이 깊을 듯해 찾아왔네. 그러니 내 손녀를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네. 알겠는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성격이 괄괄하기로 소문난 분이기에 충분히 그러리라고 짐작했다. 또한 손녀를 귀애(貴愛)하는 마음에서 턱없이 높은 목소리를 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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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했다. 병원에서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환자였으며, 게다가 한의원을 개업한 이후 이런 환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뭐라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고작 그 대답이 최선이었다. 그리곤 일단 환자와 보호자를 돌려보냈다. 그리곤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무슨 약으로 고쳐야 한다는 말인가. 밤새 의학서적을 뒤지고 마땅한 처방을 찾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를 치료하지 못하면 한의사로서 명성은 둘째 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다리를 잘라야한다는 병원의 권고를 무시하고 내게 달려올 정도라면,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나에 대한 믿음 또한 상당하다고 보아야 했다. 다리를 자르지 않을 경우 생명에도 지장이 있기에 다리를 자르자고 했을 터인데, 손녀의 생명까지 담보로 맡기며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 ▲ 그림·안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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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이 책 저 책 뒤적여보았지만 이렇다할 뾰족한 처방이 생각나지 않았다. 눈은 충혈되고 답답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었다.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한의원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새벽 짧은 꿈속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보였다. 너무 반가워 무척 기뻐하다가 꿈을 깼다.
조부께서는 살아생전 종손인 나를 무척 귀여워하셨다. 아들 내외를 분가시킨 후에도 나만 따로 데리고 계실 정도였다. 퍼뜩 눈을 뜬 나는 뭔가 짚이는 데가 있어 할아버지께서 내게 남겨주셨던 빛바랜 처방전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조혈(造血)을 촉진하고 뼈의 염증치료에 효력이 있다?’나는 할아버지의 비록(秘錄) 중에서 이 같은 주석이 달린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이란 처방을 발견했다. 그 순간, 바로 그 처방이 그녀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한줄기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이때부터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상태가 워낙 심각해 효력을 높이기 위해 뭔가 가미해야 할 듯했다.
소양인의 기를 높이는 데는 봄에 피는 개나리의 양기가 듬뿍 응축된 연교(連翹·개나리씨)가 좋을 듯했고, 뼛속의 농(膿)을 배출하는 배농제로는 금은화(金銀花)를 첨가하기로 했다. 노란 꽃을 말려 쓰는 금은화는 최근 미국에서 암세포 증식 억제와 항암 효과가 있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서양의학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는 한방의 신비성을 하나하나 과학적으로 입증해 오는데, 아직도 한방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몸 안에서 스스로 생긴 병을 그 원인을 찾아 약재의 도움을 받아 치료하는 게 뭐가 비과학적이란 말인가. 서양의학의 주사나 약품 역시 상당부분 생약 성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런 병이 생겼는지 원인도 모르는 채, 일단 뼛속이 곪았으니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의학이 과학적이란 것인가.
조혈기관인 골수에 염증이 생긴 골수염은 열의 시작시지(時作時止)증상을 보인다. 열이 수시로 올랐다 내렸다 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또 한기(寒氣)가 수시로 찾아온다는 특징도 있다.
나는 아침 일찍 형방패독산 10일분을 조제해 할아버지 댁을 찾아갔다. 그녀의 불편한 거동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 집에서 직접 약을 달여 먹인 후 돌아왔다. 이제 초조한 쪽은 오히려 내쪽이었다. 열흘 후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빨리 포기 선언을 해줘야 했다.
다른 환자들을 보면서도 틈틈이 할아버지의 비록을 뒤적거렸다. 소양인의 골수염에 대한 더 이상의 처방이 없는 듯했다. 만약 그녀가 소음인이라면 오복음(五福飮)을, 태음인이라면 가미녹용대보탕(加味鹿茸大補湯) 등을 처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업혀 왔던 처녀, 지팡이 짚고 걸어들어와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다. 그녀에게 약을 먹은 후의 느낌을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불과 약 3첩 먹고 나을 병이라면, 나도 참!’씁쓸한 심정이었지만, 그만큼 초조했다. 한약은 인체 전반에 걸쳐 약효가 작용하므로 진통제처럼 반응이 신속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한약은 반응이 더디긴 하지만 효과는 지속적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약을 먹은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매일 아침 찾아가는 것도 민망해 하루 정도는 거르기로 했다. 그런데 오후 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즉, 진물이 그치더니 무릎 주변에 뚫린 상처에서 피고름이 줄줄 흘러나온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름이 배출된다는 것은 뭔가 증상이 호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열흘쯤 지나자 피고름이 멎었고 피부색깔도 조금씩 맑아졌다.
나는 연교와 금은화를 빼고 대신 해금사(海金絲·실고사리의 포자)를 가미한 형방패독산 한 제를 더 먹도록 처방했다. 본초강목을 통해 해금사는 칼슘과 이물조직을 분리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그러자 결정적으로 골수염이 치료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무엇보다 무릎 통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처음 그녀가 의원에 들어섰을 땐 건장한 남자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보름만에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 들어왔다. 환부 색깔 역시 검푸르던 것에서 본래 살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불과 한 달여만에 잘라야 한다는 그녀의 다리를 살려냈다. 마무리 약으로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을 권했다.
“이제 치료가 끝났는가? 과연 자네 할아버지의 손자고, 삼세한의원이란 이름이 걸맞네. 내 자네를 크게 칭찬하네.”
기쁨을 숨기지 못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을 정도로 그녀의 증세는 호전되어 있었다.
“재발을 막기 위해 육미지황탕 딱 100첩을 먹으면 좋겠습니다.”
백 첩이면 세 달 이상을 꼬박 먹어야 하는 분량이었다.
“알았네. 당장 이 자리에서 지어주게.”
그 분은 약을 지어간 그 날 오후 약값이라며 백미(白米) 한 수레를 실어왔다. 쌀 스무 가마였다. 당시 형편에 비추어볼 때 파격적으로 비싼 약값이었지만 한쪽 다리 없는 손녀의 처지에 비할 수 있겠는가. 과분한 약값이라고 고사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체질의학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그때 한의사란 직업을 택한 것이 자랑스러웠고, 사상의학을 창시해 나를 구원해주신 이제마 선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했다.
/ 최형주| 한의학 박사·영등포 명성한의원 원장. 한국체질의학연구회 회장.
< 에언(豫言)>, <비방(秘方)>, <산해경(山海經)>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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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했다. 병원에서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환자였으며, 게다가 한의원을 개업한 이후 이런 환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뭐라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