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친구 Y와의 새드 무비(Sad Movies)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1968년 가을 무렵이었다. 나는 광주에서 청운의 꿈이 부풀어 무등산 자락의 백악 캠퍼스에서 청춘을 억누르고 진리탐구에 여념이 없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젖 떨어진 송아지처럼 어머니가 그리워서 한 달에 한 번꼴로 광주역이나 송정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익산역에서 내려서 왕궁으로 가서 어머니를 뵙고 손을 어루만지면 심신이 새롭게 충전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다음으로 좋아했던 친구 Y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되돌아갈 곳은 있어도 맞아줄 사람들이 없어 그것이 서러울 뿐이다.
학비를 내가 벌어서 학업을 계속해야 했던 고학생(苦學生)의 처지라 언제나 시간에 쫓기고 경제적 쪼들림속에서 살아야 했다. 여학생들과 미팅, 여유로운 차 한 잔 등 대학 캠퍼스의 낭만은 신기루 같은 단어였다. 대학 친구들은 라일락 그늘 아래서 플라톤과 때로는 괴테가 되어 인생을 토론하는데, 나는 바삐 사느라 땀 닦을 시간도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은 행복했고 하루해가 짧았다. 고향에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어 괴롭고 힘들 때면 그쪽 하늘을 보면 큰 위안이 되어 모든 시름은 그대로 사그라지고 텅 빈 가슴에는 새로운 용기로 가득 채워져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쯤에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친구 Y가 광주에 직무교육을 하러 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간 어머니보다 친구가 더 소중했는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잠도 자지 않고 부리나케 광주로 달려가 수소문 끝에 Y를 만났다. 생각 같아서는 손을 덥석 잡으며 그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면서 지는 달을 잡아 놓고 밤새워 회포를 풀 것 같았으나, 평소 소심한 성격에 너무나 그립고 보고픈 Y이어서인지, 입과 몸은 Y앞에서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친구 Y를 만났는데, 뜻있는 이벤트를 밤새도록 계획했어도 그 당시는 극장에서 영화 구경 이외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광주 시내에서 외화(外畵) 개봉관은 제일극장이었고, 방화(邦畵) 개봉관으로는 현대극장이 있었다. 우선 친구 Y의 예우적 입장에서 영화 내용보다는 광주 시내에서 시설이 수준급이었던 제일극장으로 갔다. 영화 제목은 애니메이션 영화인 「황금박쥐」였다. 극장 입장권은 시간별 지정좌석제였다. 그런데 나와 Y의 좌석은 나란히 옆 좌석이었다. 그런데도 바로 옆 좌석에 앉을 용기가 없어 한 칸을 비우고 앉아서 말 한마디 못하고 그림만 보고 나왔다. 다음에는 현대극장에서 멜로드라마 격인 「미워도 다시 한 번」 이었다. 그날도 옆 좌석 한 칸을 비우고 앉아서 또 그림만 보다 나왔다. 이제는 희미한 극장 안의 조명처럼 기억도 가물거려 영화 제목으로만 버티고 있어 Y와의 만남은 새드 무비(Sad Movies)가 전부였다.
그 뒤 그리도 콩닥거렸던 극장의 여운이 남아 제일극장을 다시 가서 영화 기적(The Miracle)을 감상하게 되었다. 그날도 황금박쥐를 감상했던 날의 분위기에 젖어서 멍청하게 앉아서 감상했다. 영국군 젊은 장교 마이클은 부상으로 스페인의 수도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 수녀 테레사와 동시에 눈이 마주치게 된다. 치료 간호 중에 두 사람은 사랑이 싹트게 된다. 젊은 장교가 회복 후 애틋함을 뒤로한 채 수도원을 떠나자, 그 뒤 수녀도 수도원의 철조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 수녀의 머리 스카프가 철조망 가시에 걸려 그대로 벗겨져서 신의 계시를 암시하는 듯 철조망에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게 된다. 그 후에 수녀와 장교는 홀가분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뒤에 수도원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없어지는 등 해괴한 일이 발생한다. 신은 그녀에게 남자를 허락하길 원치 않으셨는지, 젊은 장교 부대에서도 주위의 병사들이 죽거나 불상사가 잊을만하면 되풀이된다. 결국, 수녀는 사랑을 포기하고 수도원의 신의 세계로 돌아가면서 수도원도 젊은 장교의 부대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너무나 가혹한 신이 사랑을 훼방한 이야기다. 극장 문을 나서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눈시울이 붉어져서 사람들이 쳐다볼까 앞서서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깃거리가 때로는 자신의 경우라 믿고 꽤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 미라클(The Miracle)의 주인공들은 서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나 해보고 헤어졌지, 나는 말은커녕 표정도 못 지어봤다. 이렇게 하늘은 옷소매에 추억만 적셔 놓고 Y와 나는 매정하게 갈라놓았다. 인간이 아무리 절실히 노력해도 신의 훼방과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사원의 담장에 새겨진 낙서 “아난케(Ananke:운명의 여신)”를 지나치지 않고 원혼의 한을 풀어주기로 했다. 신이 훼방한 사랑을 노트르담 종지기 콰지모도와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펜 끝의 잉크로 연결시켜 지고지순하고 맹목적인 아름다운 사랑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이 가진 위대함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면서, 애틋한 연인들의 가슴에 맺혔던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사랑은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적셔주었던 마지막 자막 The end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쩌다가 TV 화면이나 길을 가다가 Y와 닮은 사람을 보면 지금도 가슴은 철렁 눈동자는 동그라져서 추억 속에 멈춰버린다. 지금도 두 달에 한 번꼴로 대학 친구 모임을 갖는다. 그때마다 광주광역시 충장로 부근 제일극장과 양동시장 광주천 건너편 현대극장은 나에게는 남원 광한루 앞 오작교처럼 지워지지 않는 곳이다. 오늘도 광주 상무지구에서 모임을 가졌다. 50여 년 전 Y와의 새드 무비가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광주 천변길을 지나가고 있다. 나는 청년 장교 마이클도 아니고 흉측한 몰골 콰지모도도 아니다. 어설픈 삶을 살면서 자아를 망각하고 있으니 차라리 금강산 나무꾼의 풋풋한 사랑만도 못한 것 같다.
(2020.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