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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갔습니다. 겨울도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꼬리가 얼마나 길지 아직 모릅니다. 그저 어서 오기를 기다립니다. 봄바람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마음 따라가다가 낭패당할 수 있습니다. 더욱 조심해야지요. 어쨌거나 기분은 봄으로 달려갑니다. 건조했던 날씨가 3월의 봄비를 더욱 기다립니다. 끝자락의 추위가 이 겨울을 더 길게 느끼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더욱 간절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달력은 넘겼고 이제 따스한 봄 기운을 기다립니다. 더불어 이 어지러운 분위기도 좀 가라앉기를 바랍니다. 어서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혼잡스런 분위기 따라 변화된 것은 시장 물가 아닌가 싶습니다. 놀라 자빠집니다. 거참!!
저도 방학을 끝내려 합니다. 두달 여 겨울방학 끝내고 다시 산행을 하려 합니다. 바라기는 황사나 미세먼지가 하늘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크기 만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냥 쉬어야지요. 그런 속에서도 땅속에서는 꿈틀대며 파란 새싹이 피어오르리라 기대합니다. 우리도 이겨내야지요. 어차피 살아가야 하는 걸, 참고 버티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새로운 계절을 맞아야 합니다. 흐린 날을 견뎌야 맑은 하늘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날들도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욱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감도 공고해지겠지요. 지나고 나면 보람 있는 경험이고 즐거운 추억입니다. 그렇게 삶이 꾸려집니다. 인생이 별건가요? ㅎㅎ
3월을 시작합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한 달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
2025년 3월 1일 김종우 목사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 2 : 14)
<아노라>
결혼무효소송과 이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간단합니다. 이혼은 결혼이 전제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결혼무효소송은 결혼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결혼이 없었으니 위자료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혼은 결혼이 있었던 사실 때문에 위자료 청구가 가능할 것입니다. 배우자 어느 한 편이라도 대단한 부자라면 위지료 문제는 큰 부담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이혼이란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결혼은 무효다.’ 그런데 분명 결혼한 사실이 있습니다. 때문에 소송을 해서 무효화하자는 말이지요. 이혼 소송은 지역에 관계 없이 진행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문제는 결혼무효를 만들려면 있었던 곳으로 가서 없애야지요.
겨우 20대에 들어선 러시아 청년 ‘이반’이 스트립바에서 만난 ‘애니’에게 빠졌습니다. 거액을 주고는 자기 하나에게만 봉사하라고 부탁합니다. 어차피 돈을 보고 붙는 것인데 업소보다도 훨씬 낫지요. 2주 휴가를 내고는 휴양지를 다니며 유흥을 즐깁니다. 맘껏 즐기며 거액의 돈도 버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입니다. 말 그대로 흥청망청 제멋대로 즐깁니다. 이미 그 스트립바에서도 유명해졌습니다. 워낙 돈을 물 쓰듯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돈 따라다니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러시아의 집을 떠나 타국에서 간섭 없이 지내는 생활은 이반에게는 천국일 것입니다. 그렇게 내내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모가 가만있겠습니까?
이반을 맡고 있는 직원이 있습니다. 부모가 러시아 재벌은 맞는데 과연 정상적으로 출세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들을 공부하라고 보낸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수시로 보고를 받습니다. 그러니 상황을 모르겠습니까? 허랑방탕한 생활이 보고가 되겠지요. 부모가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낙원 같은 생활을 버리고 돌아겠습니까? 둘이서 즐기며 이반이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기 싫다고 고백합니다. 방법은 없을까? 성인이니까 결혼하면 돼. 여기서 그냥 살면 되지. 미국인이 되는 거야. 그거 괜찮은데. 나와 결혼하자. 기막힐 일입니다. 이 갑부의 아들과 결혼이라! 속된 말로 봉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능할까요?
이반과 애니는 조그만 교회로 들어가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객도 없고 요란한 잔치도 없습니다. 그냥 형식적인 식만 행하고 목사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됨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결혼증명서까지 받아둡니다. 애니는 일하던 업소에서 결혼을 선포하고 자기 짐을 싸들고 나옵니다. 동료들이 부러워하지요. 시기하던 한 동료는 2주나 가나 보자고 합니다. 아무튼 의기양양하게 업소를 떠나 이반의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반의 부모의 직원들이 찾아옵니다. 이반은 그들의 출입까지 통제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애니가 발버둥칩니다. 이반의 아내로 큰소리칩니다. 하기야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으니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일입니다.
두 사람의 결혼증명서를 스마트폰에 찍어 러시아 부모에게 통지합니다. 부모가 길길이 날뛰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사전 통보를 받고 여자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요. 한 마디로 아들이 미친 짓을 한 것입니다. 그야 술은 고사하고 마약도 하는 마당에 미치기는 했습니다. 한창 정욕이 불일듯하는 때이니 여자에게 당했다고 여깁니다. 당장 미국으로 오겠다고 합니다. 이반에게는 위기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셈입니다. 이 둘을 잡아두라고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을 결혼했던 그곳으로 데려가 무효소송을 하려는 것입니다. 반드시 본인들이 있어야 하고 결혼식을 행했던 곳으로 아야만 합니다.
부모가 찾아오고 이반은 날래 도망칩니다. 애니가 따라가려 했지만 옷 챙기다가 놓쳐버립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잡혀 있습니다. 문제는 이반이 반드시 동행해야 소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나서서 이반을 찾으러 다닙니다. 결혼무효소송을 집행하자니 이반이 있어야 하고 애니는 그래도 이반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로 부모 앞에서 당당하게 결혼을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이러거나 저러거나 이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알만한 곳을 두루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이반이 전의 그 바에서 술에 절어있는 것을 발견하여 데려옵니다. 부모도 당도하여 이제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반은 부모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꼼짝못합니다.
하기야 돈으로 시작되었던 일입니다. 이반 부모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 위협에 애니의 저항은 먹히지 않습니다. 그저 선심쓰듯 주는 소액의 대가로 만족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믿어보려고 했던 사랑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자기를 지키며(?) 끝까지 따라다닌 ‘이고르’가 애니의 처소에 내려줍니다. 그리고 직원이 뺐었던 다이아 반지를 언제 취했는지 애니에게 건네즙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지요. 짧은 시간 티격태격하며 무시하고 지내왔지만 어쩌면 이 사람이 자기에게 진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을 것입니다. 그의 품에서 흐느낍니다. 영화 ‘아노라’(Anora)를 보았습니다. 결혼, 하기는 서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해야 안전하기는 합니다.
나는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우리나라를 누가 지켜줍니까? 예전에는 TV 방송 시작과 끝날 때 애국가를 하였습니다. 요즘은 24시간 돌아가니 그럴 시간이 없지요. 무슨 국경일 행사에나 가야 불러볼 기회가 있으려나 도무지 듣고 부를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중고등학교 졸업하면 애국가 부를 기회는 정말 없습니다. 혹시 우리 애국가가 몇 절까지 있는 줄은 아십니까? 요즘은 4절은 고사하고 1절마저 못 부르는 국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애국가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절에 나오지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누가 보살피고 도와준답니까? 하느님이. 이 ‘하느님’ 때문에 기독교인들 사이에 말이 좀 있었습니다. 물론 천주교인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들의 성경에는 하느님이라고 나오니까요.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거 영어로 하면 싸울 일도 아닙니다. 그냥 ‘God'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하느님’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맞습니까? 둘 다 맞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느님’보다 ‘하나님’이 낫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다른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 어디를 목표로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지난 번 천국에 대해서 말하다가 그쳤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혼인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청한 사람들이 옵니까, 안 옵니까? 희한하죠? 우리는 가기를 힘쓰는데 저들은 오라고 해도 안 갔습니다. 그래서 어찌 합니까? 사거리 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어떤 사람들도 들어오나 자 봅시다. 마 22 :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라면 악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악한 자도 불러옵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하다 악하다가 우리가 세상에서 생각하는 선하다 악하다와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태 신앙하면서 얼마나 하나님 뜻과 다르게 신앙해 왔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천국 혼인잔치에 악한 자도 들어옵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들어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들어왔다가 쫓겨나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 쫓겨납니까? 악해서 쫓겨납니까? 야 이 악한 놈아, 네가 어떻게 여길 들어와? 그리고 쫓아냅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하나, 무엇이지요? 마 22 : 11 - 12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왜 쫓겨났지요? 악해서가 아니라 예복을 입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예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된다? 반드시 알아야 하겠지요. 왜요? 우리도 애써 하나님 나라 들어갔다가 그 예복 때문에 쫓겨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임금이 왜 너는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따질 때 이 사람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유구무언.’ 왜요? 예복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몰랐기에?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입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니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뱃장일까요?
자, 결과를 보겠습니다. 13절 “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왜 이를 갑니까? 억울하다 이거죠. 자기가 잘못해놓고 뭐가 억울하다는 것이지요? 그까짓 예복 때문에 내쫓느냐 이거죠. 그런데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길지라도 하나님께는 중요합니다. 그저 교회만 왔다리갔다리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신앙합시다. 예복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무엇을 선하다 하시는지, 무엇을 악하다 하시는지 알고 신앙하자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여태 우리는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고 우리 중심으로 판단하고 신앙하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가르친 교회와 목자들이 잘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경고해주신 것입니다. 누구를 삼가라고요?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선지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하는데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다, 아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라고 하는 사역자는 많은데 과연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뜻대로 전하는 목자는 얼마나 될까 걱정됩니다.
자 이런 말씀을 듣고 당시 영적 지도자들이 가만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라는 돼먹지 않은 젊은 녀석이 때마다 자기들을 물먹이고 있으니 자존심 상하지요, 신경질나지요, 도무지 가만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처치해야 할 텐데 꼬투리 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 통속으로 모였습니다. 로마에 빌붙어 사는 헤롯당원들을 끌어들인 것이지요. 이들은 정치꾼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자들입니다. 왜 이들을 끌어들였을까 하는 의문은 이들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세금 문제를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니 너희도 함께 듣고 합세하자는 것이지요. 마 22 : 15 - 17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 대”
이 질문의 함정을 아십니까? 이래도 저래도 걸립니다. 바치지 말라 하면 바로 거기 함께 있던 헤롯당원들이 당장 잡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치라 한다면 민족을 배반하는 매국노가 되는 것이지요. 자기들 나름대로는 기막힌 계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앞에 예수님에게 얼마나 아첨하는 말로 달랩니까? 사실 백번 옳은 말인데 그들은 단순히 아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실제로 그러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십니다. 단지 이 유대인들은 그대로 따르지를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자기들의 불의가 드러납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예수님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제야말로 걸려들었다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답이지요. 읽습니다. 19 - 21절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내라는 말입니까, 내지 말라는 말입니까? 둘 다입니다. 할 말이 없지요. 22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할 말이 없으니 그 자리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포기합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아무튼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 바리새인들은 더욱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적대감만 더 쌓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도전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이제 또 무슨 문제를 가지고 오는지 보겠습니다. 앞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왔는데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찾아옵니다. 소위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으로 표현한다면 귀족계급입니다. 그들의 눈에도 예수님이 눈엣가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당하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가 해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제법 유식한 척하는 것이지요. 무슨 문제인지 보겠습니다. 좀 길지만 함께 읽습니다. 23 - 2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우리 생각에는 뭐 이런 일이 있는가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 우선 하나님이 명하신 ‘계대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수가 줄어든다든지 한 가문이 없어진다든지 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대를 잇는 작업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혹시 자손이 없이 죽는다 하면 그 대를 잇는 후속조치를 행하셨던 것입니다. 신 25 : 5 - 6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율법입니다. 바로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대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을 말씀하고 영생을 말씀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자기들은 부활에 대해서 믿는다, 안 믿는다?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자기들 질문 속에 있는 것이지요. 자기들 생각에는 비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부활이 있다면 지금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한 여자가 여러 남편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나중에 부활했다, 그러면 그 때는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러니 부활은 있어야 한다, 없어야 한다? 그런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활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주 합리적이고 똑똑한 발상이지요?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뭐라 대답하시는지 보겠습니다.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이들은 사두개인 곧 제사장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가까이 하고 살겠지요. 그런데 성경을 안다는 말입니까, 모른다는 말입니까?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모르고, 읽어도 모릅니다. 하기는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일까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예수님 다시 오실 때 또 죽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된다? 알아야 합니다. 그냥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도대체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어리석은 신앙하지 맙시다. 그러다 천국은 고사하고 천국 들어가기 전에 다 망합니다.
이 사두개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해합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한 것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바로 메시야입니다. 그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왜 안 믿었을까요? 분명 자기네가 기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와 같더라, 다르더라? 전혀 다르지요. 만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얼마나 대단할까요? 세상에서 왕의 아들 곧 왕자가 행차를 한다, 그러면 혼자 갑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수행원도 있을 것이고 보다 화려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웬 거지같은 녀석이 나타나서 메시야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 믿어집니까? 최소한 자기네보다도 월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기네만 못합니다. 아니, 비교할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거지같은 녀석을 보내실 리가 만무하다 그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 53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렘 14 : 8 - 9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 말씀대로라면 정말 별볼일 없는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인데, 백성을 구원하려 오시는 메시야인데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약속하고 예언하신 겁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해하려고 하기 전에 그대로, 말씀대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병자 고치고 바다를 가르는 것 그런 것입니까? 그 정도는 조그만 일입니다. 가장 놀라운 능력은 바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수백 년 전에 말씀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4천 년 전에 말씀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누가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자식도 없던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창 15 : 13 - 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리고 약 5백 년 후 이루십니다. 출 12 : 40 - 4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그러니 이런 일을 누가 감히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니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또 하나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한다고 하니 우리가 기대하는 부활이 어떤 부활입니까? 사두개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습니다. 여기 살았던 그 몸으로 다시 살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하던 대로 이 몸 가지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결혼하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마 22 :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가끔 그런 질문들 하지요. 다시 산다 해도 지금의 남편 또는 아내와 같이 살겠느냐고요? 꿈 깹시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 몸은 다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몸은 일회용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더러워졌기 때문이지요. 죽을 것입니다. 썩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몸으로 다시 살 수 없습니다. 고전 15 :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야 할 우리 몸은 이 몸이 아닙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이 몸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 22 : 31 - 32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하나님이시라고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그러면서 예수님이 한 말씀 보태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면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 살아있다, 죽어있다? 살아있다는 뜻이지요. 어떻게 살아있을까요? 몸으로, 영으로? 그렇습니다. 영으로. 앞에 얘기한 것처럼 천사와 같다고 하시잖아요. 천사도 영이고 이들도 영으로 거기에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갈지 모릅니다. 물론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조금씩 배워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 우리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나는 산 자일까요, 죽은 자일까요?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된다?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 이렇게 멀정하게 살아있는데 그게 무슨 질문이냐? 그렇습니까? 보겠습니다. 딤전 5 : 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이 예가 누가복음에 예수님 하신 이야기 중에 나옵니다. 잘 아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비의 재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아비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죽게 되니 아비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 아비가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눅 15 :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쉽게 이야기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에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살았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자입니다.
조금 더 신앙적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말씀을 떠나 사는 것이 죽은 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압니다. 불신자는 육은 살아있으나 영이 죽은 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불신자를 대상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말씀을 모르고 신앙한다면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앞에 예를 든 서기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하나님께는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바리새인 관원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죽어서는 못 들어갑니다. 살아야 들어갑니다. 니고데모는 신앙이 좋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몰랐습니다. 거듭나야 했습니다. 말씀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알아야 합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산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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