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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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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어제 복음에서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고
말한 세례자 요한이 오늘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제는 누구신지 알게 되었지만,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고,
모르다가 알게 되기까지 사이에 성령의 작용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하느님도 그렇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도 그렇고,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성령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A.I(인공 지능)는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떻게 알고 있을까?
우리 인간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잘 알고 있을까?
몇 년 전 인간의 지능과 인공 지능 간의 대결이 바둑을 통해 이뤄졌고,
인간이 인공 지능에게 진 것이 크나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으며
그때부터 바둑 해설을 할 때 인공 지능의 해설을 꼭 곁들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인공 지능이 우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그리고 많이 알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공 지능이 더 잘 알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아니라
인공 지능의 증언에 의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만일 그런 것이고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 믿음도
성령이 아니라 인공 지능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학자들 안에서 인공 지능 시대의 신앙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고,
그래서 과학과 신학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현재의 저의 생각으로는 인공 지능이 신앙의 부분에 답할 수 없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인가?’와 같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인공 지능이 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지적인 앎이나 과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영역이기 때문이고,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다른 부분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모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안다고 까불다가 믿지 못하고,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다가
정작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조금 아는 것을 믿으면 난리 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나 자기 꼬라지를 아는 사람,
아니, 인간의 꼬라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알고,
인간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하느님임을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가 아니고 하느님임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존재는 이 세상 너머의 것이니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성령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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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어제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한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말해줍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양’(탈리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어린 양’(하말), ‘새끼 양’, ‘아기’(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고 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무, 과일 또는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시 ‘양’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합니다(출애 12,1-13).
<둘째>로,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라고 하듯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인 메시아를 상징합니다(이사야 53장).
그러니 ‘어린 양’이란 표징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그에게 돌아와 새 시대를 알렸듯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어린 양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 성령을 통하여 입이신 옷입니다. 속죄양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깨끗이 빨아 입히신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어린 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은 대속으로 자신을 내어놓기에 억울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봉헌’이기에 지향이 있는 삶이요, 향하여 바치는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진정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나고 있고, 그분을 향하여 바치고 있는 봉헌된 삶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제 삶 안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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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양
저의 약점 중에 하나는 한번 만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더욱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면 그제서 어디서 만난 분일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먼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나를 알아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죄송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겉모양도 모르니 그 속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상대를 잘 알아볼 수 있는 눈과 지혜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증언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만이 그분을 알아 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그를 도구로 선택하셨고 요한이 그분의 말씀에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과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며 사랑하면 할수록 더 알게 되고 또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는 칭호는 그분의 운명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사건은 신앙의 큰 사건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어린양의 피를 집의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서 그 표가 된 집은 죽음의 천사들이 지나쳐 가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파스카’라고 하는데 ‘건너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죽음에서 건져지고 해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백성인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 놓으셨습니다. 어린양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성체성사를 통한 음식으로 밥이 되어 오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보아야 하고 그 어린 양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처럼 세상의 어린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사제가 미사 때에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외칠 때마다 이제 내가 높이 달리어 또 하나의 어린양이 되고 그 복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 뵙고 만나는 은총이 모두에게 함께하시기 빕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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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주 가톨릭평화신문을 읽는 것은 마치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 같은 기쁨입니다. 오늘은 지난 12월 25일자 신문에서 읽은 지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이호자 수녀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현대 신앙인에게 3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기도하지 않고 성서를 읽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선교를 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위 두 가지를 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꽤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죄를 지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쓸모없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신앙인의 맛과 멋이 드러나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안희숙 엘리사벳 자매님께서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느낀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고국에 신앙이 전해진지 200년의 시간, 하느님을 가슴에 품어 안고 말없이 죽어간 순교자들! 100년의 길었던 박해 동안 피를 뿌려 흘린, 흘러 적신 이 강산 골짜기 구석구석 돌아보니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그들의 힘겨운 발차취가 남겨져 있고 피로 증거한 삶의 터에 ‘교회’라는 신앙의 두 글자 남아 하느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게 합니다. 죽어가면서도 절절히 부르던 예수, 마리아! 그 모습 선연하고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사람 존재의 목적이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그들은 자기 존재 목적을 어찌 그리 명백히 알았을까요?
안 믿는다는 말 한마디면 족했을 텐데, 양반뿐 아니라 천민, 노비, 상인들의 비천한 신분으로도 하나뿐인 목숨을 신앙이랑 바꾸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입니다. 한지에 물 묻혀 얼굴에 덮어 씌워 질식해 죽어가고, 태형에 아사형, 산 목숨을 굴비 엮듯 엮어 물에 수장하고, 하천 모래구덩이에 선 채로 생매장, 숨져가면서도 아니 두 다리 붙잡혀서 도리개질, 태질을 당해도, 높은 곳에 목 잘려 참수를 당해도, 살아 못 섬길 천주를 죽음으로 섬긴 분들입니다. 임금께 받은 하해지택을 대역죄인, 능지처참으로 바꾼 황사영, 27세 젊은 목숨 천주께 바치고 그 아내 정난주 마리아가 걷던 긴 귀향길, 추자도에 떨군 갓난아기, 어미의 가슴에 박히운 대못은 몇 자 였을까요?
또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가 겪던 아픔은요?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처절한 슬픔마저 느낍니다. 어찌 한 마디의 말, 느낌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가 금자를 가지고 우리 발자국을 재고 있습니다. 형제여, 힘을 내십시다.’라고 했던 최경환 성인이 있습니다.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그분이 손잡아 주시고 함께 해 주신 길, 제 신앙의 뿌리, 제게 전해진 신앙의 향기가 얼마나 진한 핏빛 내음인지 마음으로부터 아려오던 날들이었습니다. 인생은 만남이라지요, 만남은 은총이라고요. 제가 만난 하느님, 은총 중의 은총, 금총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의 터, 치명지, 무덤 앞에서 마음 안으로 숨어들던 생각들, 내 삶은 하느님을 살고 있는가?” 저도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이렇게 진한 감동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2023년에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로 지켜온 신앙을 우리들 땀과 노력으로 이어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증언했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을 증언하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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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81년 미국 대통령 로널드 윌슨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존 힝클리(John Warnock Hinckley Jr.)가 쏜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실려 가면서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전처럼 영화배우였다면 잘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병원에 도착해서 간호사가 지혈하기 위해 손을 몸에 대자, “아내 낸시에게는 허락받았나요?”라고 말했고, 수술 의사들에게는 “당신들이 공화당원이면 좋겠네요.”라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습니다. 사실 당사자인 레이건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죽음의 문턱에서도 여유를 보여줌으로 인해 사람들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83%의 높은 지지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지지율이 30%로 떨어지자, “또 한 번 총 맞으면 되지, 뭘.”이라고 걱정하는 참모진에게 말한 것도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렇게 그는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만약 자기 자신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유머를 보일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주변을 배려하는 말을 통해 자신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고, 그것이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자기 PR 시대라고 하면서 나를 드러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하지만,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을 드러내는 데만 최선을 다합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광야에 나가 메뚜기와 벌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만 베풀 뿐이었습니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 한 번도 취하지 않고 철저하게 예수님께만 시선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1요한 3,6)라는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역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만을 증언하고 높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높이는 방법은 주님을 높이고 증언해야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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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그대가 갖지 못한 것을 상상함으로 인해서 그대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훼손하지 말라. 그대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과거 한때 그대가 갖기를 열망했던 것임을 잊지 말라.”(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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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聖人이 됩시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제 ‘탄생’ 영화를 봤습니다. 전해 전주 월요일 성탄 다음 파공일 2022.12.26일 월요일 수도형제들은 ‘아바타’ 영화를 봤는데 저는 ‘탄생’인줄 알고 신청했다가 취소했는데 일주일후 월요일 어제 보게 됐으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끝기도후 친교의 날에 수도형제들은 유익한 영화를 휴게실 TV 방에서, 다음날 목요일 기상 시간은 평소보다 1시간 늦은 5:30 기상이라 여유있게 보지만 저는 오후 8:30취침하기에 어김없이, 미련없이 도중에 나와 잠자리에 듭니다. 다음날 1시 전후로 일어나 강론 쓰는 중요성과 비교하게 되며 저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기에 주저없이 일어나 침실로 갑니다.
그러나 어제 151분 영화관에서의 ‘성탄’관람은 예외였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안 이후로는 거의 관광觀光에 흥미를 잃어 관광 여행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여행후의 공허를 생각하면 추호도 생각이 없는 관광여행입니다. 단 하나는 예외입니다. 관광여행이 아니라 순례巡禮여행입니다. 관광여행의 끝은 ‘텅빈 공허’지만 순례여행 끝은 ‘텅빈 충만의 기쁨’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탄생’ 영화 151분이 ‘피정같았다는데 저는 성지순례한것 같았습니다. 밤 12:30분 기상에도 불구하고 조는 일 없이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아마도 천주교 사제이기에 더 마음이 와 닿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인자한 관장의 취조시 김대건이 울자, “신부님도 웁니까?” 라는 안성기 배우의 물음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혈액암으로 투병중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출했다니 감동입니다.
“아, 역사는 반복되는 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구나! 물론 잔인한 고문이나 쉽게 사람 죽이는 일은 없지만 형태만 교묘하게 바뀌었을뿐 계속 반복되는 보복의 악순환이구나!
민주화됐다지만 가부장적 수직적 권위 의식은 그대로구나! 결코 역사에 생략이나 도약은 없구나! 사람안에 내재한 잔인성, 공격성, 폭력성의 야만은 그대로이구나!
인간 무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가! 환경 탓할 것, 사람 탓할 것이 아니라 각자 성인이 되는 것이 유일한 답이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자 사랑임을 잊지 않는거다!”
등 깨달음을 가득 간직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사실 하루속히 ‘지구타이타닉호’의 경로를 바꾸어야 한다고, 모든 과학적 연구가 한목소리로 경고하고 있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본질적으로 유의미한 정치적 결단이나 변화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연세계의 붕괴와 함께 필연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과 이웃을 향한 원망과 분노, 적개심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갖 형태의 폭력과 광란의 소비주의가 마치 시대의 특징인양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탄생을 보고 김대건 사제에 감동한다 하더라도 1회성으로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억, 기념할 뿐 아니라 각자가 그 삶의 자리에서 부단한 영적혁명의 회개로 성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각성을 새로이 한, 꼭 성지순례 느낌의 영화 감상 시간이었습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민주화운동이요 독립운동의 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가 여전히 계속되는 내전상태같은 남북南北의, 남남南南의 분열의 깊은 골을 어떻게 메꿔 평화의 공존공생의 길을 갈지가 참 엄중한 우리의 과제입니다. 방법은 단 하나 우리 하나하나가 불신의 늪, 전쟁의 늪에서 탈출하여 영적혁명의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 성인의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신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성탄에서 김대건 역을 한 윤시윤 배우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난 소감의 고백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유머 감각도 너무 좋으시고, 그냥 동네 할아버지 같다. 한국과 관련된 농담도 하시고 그랬다. 김대건이란 인물을 표현해 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바티칸에 가면 성 베드로, 요한부터 압도적인 규모로 성인들의 동상이 있는데 비어있는 마지막 칸은 김대건의 자리라고 하더라.”
개신교 신자이면서 영화 ‘탄생’을 감독한 박흥식 형제님의 교황님 알현시 교황님에 관한 내용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교황님께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어요. 교황님이 ‘한국인은 고난 속에서도 미소짓는다’고 하셨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 영화를 벌써 보셨나 싶었죠. 그날 교황은 ‘제가 여러분의 방문으로 영광을 받고 있다’며,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인간으로 아름다웠던 분의 삶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한 건 여러분에게도 축복’이라고 기뻐하셨습니다.” 순교전 교우들에게 쓴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회유 서한을 잊지 못합니다.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몸 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만25세 청년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순교직전 유언이라 놀라울뿐입니다. 저는 무려 성인보다 세배를 살고 있으니 성덕은 “얼마나”의 햇수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의 사랑의 질에 달렸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새해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복된 선종의 축복선물을 주셨습니다. 12월31일 독일어를 모르는 한 간호사가 한밤중에 교황님이 돌아가시기 전 이탈리어로 세 번쯤 하신 마지막 임종어를 분명히 들었다 합니다.
“Lord, I love you!”(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교황님의 전삶의 요약과도 같은, 정말 성인다운 임종어입니다. 탄생 영화의 가르침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가르침을, 또 하느님의 우리 향한 간절한 바람을 단 하나로 요약하면 참사람의 진인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 응답하여 온맘과 온맘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는 자가 성인입니다. 제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영어 말마디가 있습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환경을,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성인이 되지 못함을 탓하며 날마다 평생 성인이 되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지는 만큼 세상은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더디더라도 진정 이것이 역사의 진보입니다. 성인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 우리를 성인이 되라 격려하고 고무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은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진짜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그리스도처럼 순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알고 보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려 주님을 진면목을 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말한 분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눈이 열려 주님의 참모습을 알아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그러니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처럼 늘 속으로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하여 고백할수록 주님을 닮아 참나의 성인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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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봄>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봄>
믿기에
믿음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믿음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희망하기에
희망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희망함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사랑하기에
사랑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사랑함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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