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飛行機]재(마전치) 618m 강원 정선 / 평창
산줄기 : 한강영월백운단맥
들머리 : 정선읍 광하리 마전마을
위 치 강원 정선군 정선읍 / 평창군 미탄면
높 이 618m
#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아흔 아홉 구비 정선 사람 나들이길... 비행기재
마침내 비행기재 가는 길목에 섰다. 정선 광하리 광석교 옆 슬레이트 지붕의 외딴집 앞. 얼음 머금은 조양강 칼바람에 손이 자꾸만 옷깃에 가 닿는다. 나흘 전 대설이 지났지만 도무지 눈 올 가망 없는 메마른 날.
"이런 날씨에 그 험한 델 뭐 볼 거 있다고 가-" 외딴집 할머니의 말이 귀에 쏙 박힌다.
비행기재(618m), 정선군 정선읍 광하리와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를 잇는 비행기재 하면 42번 국도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험한 곳으로 손꼽힌다. 평창, 제천, 서울 방면으로 나들이 가는 정선 사람들을 위해 처음으로 찻길이 열린 고개다. 오죽하면 타향에서 온 운전수는 죄다 "울고 왔다 울고 간다" 는 말이 있을 정도일까.
뜨락에 거꾸로 처박힌 '담배' 간판은 조양강을 등진 이 허름한 집이 비향기재 가는 길목을 지키던 옛 가겟집임을 단박에 말해준다. "아무 것도 생각 안나" 만 연발하던 할머니는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국수를 말아 주었다는 이야기를 무의식중에 흘린다. 주인도 바뀌지 않았다. 건물도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여주인 나이가 일흔 세살이나 들었고 이젠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 옆에 선 '광하지구 현장사무실 태흥건설' 안내판을 지나 망하로 향한다. 석회암지대라 물이 부족해 광석나루 건너 모평 도깨비굴에서 물을 떠다 먹었다는 동네 망하(望河). 그 망하로 드는 아스팔트길은 활주로인 양 탄탄대로고 근래 저리도 파란 하늘은 처음 본다는 김부래기자의 감탄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로 오늘 비행은 '오케이' 란 예감이다.
망하 뒷산 상산(443m) 줄기의 나지막한 빈지막재에 도착한다. 직진하는 길은 비행기재길이고 오른쪽의 내리막길은 마을로 드는 길이다. 삼거리 버스 승차장 앞 구멍가게에서 과일사탕 한 봉지를 사 주머니에 나눠넣고 신나게 비행기재를 향해 이륙한다.
온전한 옛길은 빈지막재에서 멀찌감치 보이던 솔숲부터 시작되었다. 그냥 신작로다. 망하와 작별하기 위해 잠시 돌아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가 엎드린 모양이라는 상산과 콕 찍은 듯 여물통 자리에 들어 앉았다는 마을 앉음새 등 어제 저녁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비로소 수긍이 간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망하가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인 것은 이런 풍수 덕분인가. 생각을 멈추고 지상과 결별하듯 한구비를 돌아드니 고요한 응달길이 기다리고 있다.
"전부 몇 구빈지 세는 사람에게 맥주 사겠습니다."
첫 구비를 돌며 동행한 임대수(50세, 태백 한마음산악회), 오은선씨(34세, 수원대산악부 OB), 김부래기자에게 숙제를 줬다. 지형도에 표시된 옛 42번 국도는 눈으로 훑기만 해도 어지럼증이 날 정도로 구불거린다.
억새가 많은 큰새덕산(756.9m), 작은새덕산(722m) 허리에 난 이 옛길은 망하의 이희규옹(89세)에 의하면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길이 좁고 험해 '제무시(GMC)' 라는 산판 트럭만 줄곧 오갔다. 그러다 강릉에 본사를 두고있던 30인승 강원여객 완행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54년부터. 그때까지 고개 아래 사람들은 트럭이라도 얻어타지 못하면 미탄까지 20릿길을 걸어다녔다. 그후 71년 8월에 국도로 승격되었지만 여전히 비포장의 세월이었다.
고개까지는 정선쪽이 미탄쪽보다 두 배 가량 멀다. 망하에서 어질머리나게 산허리 돌고 돌아 고갯마루에 이르면 숨 돌릴 틈은 잠깐. 다시 백운리 백골마을까지 구불텅 구불텅 내려가면 꼬박 12km. 버스는 하루 한번 다녔다. 버스도 사람도 몸을 가누기 힘든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이었지만 정선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버스 타고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신작로, 신나는 나들이길이었다.
사실 비행기재는 '예명' 이고 본명은 마전치다. 마 농사가 잘 되었다는 재 아랫마을 마전에서 따왔다. 정선의 관문하면 단연 군수 행차 길목 성마령이었다. 그러던 것이 마전치로 버스가 다니게 되면서 이 고개는 일약 정선 제일 관문으로 비상하게 된다.
비행기재란 이름 역시 이때 생겼다. 아흔아홉 구비 아찔한 벼랑을 곡예하는 버스 속에서 1시간여를 견디노라면 오죽 오금이 저렸을까. 개중에는 더러 바지가랑이를 적신 조무래기들도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보면 비행기재란 이름은 필경 정선 사람들이 붙였을 성싶다.
그러나 88년 12월 비행기재 아래로 터널이 뚫리고 마전-벽골 골짜기에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개통되면서 50여년 넘은 이 길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다. 오롯한 옛길을 간직한 비행기재길은 그후 까맣게 잊혀졌다. 머치 전성기라도 도중하차 하고 나면 금새 까맣게 잊혀지고 마는 인기 가수의 이름처럼.
망하 사람들은 이제 비행기재 갈 일이 없다고 했다. 사람도 살지 않을 뿐더러 고개에 있었다던 주막집도 사라진 마당이니 우리 일행은 그저 묵묵히 걷게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몇 구비 돌지 않아 갑자기 벙커형 콘크리트 구조물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둗지 못한 '물건'이었다. 4명은 좋게 들어앉을 만한 공간이었다. 비를 피하기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물은 몇 구비마다 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천장 모양도 반듯한 것과 아치형이 번갈아 나왔다. 구조물의 용도는 자갈이나 모래를 넣어두는 저장고였다.
눈 많은 정선땅. 동지 지나 눈 한 번 내리면 이삼일 버스가 두절되기를 밥먹듯이 했다. 여름철 폭우에 길이 패이거나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망하에 사는 최봉오씨(65세)의 기억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제설작업에 나선 것은 1년에 적어도 서너 번. 발이 묶이지 않기 위해 광하리는 물론 귤암리, 용탄리, 가수리, 백운리 등 근처 동네사람들은 죄다 자진해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오직 한마음이었다.
텅 빈 옛길에서는 의외의 길동무들을 만났다. 길 위로 빗금치는 미류나무 행렬. 울퉁불퉁 밟히는 둥글납작한 조약돌에서는 조양강 물내음이 전해왔다.
까칠해진 나무껍질, 손끝만 닿아도 아린 차가운 바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훅 불면 민들레 홀씨처럼 한 번에 흩어지고 말 할미밀빵, 사위밀빵의 꼿꼿한 모습을 보니 움츠린 어깨가 활짝 펴진다.
정오가 지난 시각. 굽이를 돌 때마다 햇살은 심심한 듯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햇볕이 이리도 고맙고 따스한 길동무가 될 줄이야.
길은 뱀장어처럼 부드러운 직선이다가 화난 듯 지그재그로 달리기도 했다. 볼이 얼얼해져 고개를 푹 숙이고 모롱이를 돌던 일해은 엇! 하고 소리치며 걸음을 멈췄다. "제동장치 점검 정성경찰서"라 적힌 청색 안내판 앞에서였다.
비행기재 넘던 가장 큰 차는 2.5톤의 제무시였다. 급회전이 많아 차는 시속 20km 이상 속력을 내지 못했는데 그 제무시가 종종 벼랑으로 날았다. 사람 실은 버스도 두세 번 떨어졌다. 80년대 정선경찰서 교통계에 근무했던 전재근씨(49세, 정선경찰서 경무과)에 따르면 비행기재에서의 추락 원인은 대개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이나 브레이크 파열이었으니 이런 경고판이 붙을 만했다.
이 오지에서 비행기 타본 이가 있을리 만무한 당시 하필 비행기재라 부르게 되었을까. 트럭을 몰고 고개를 자주 넘어다녔던 임대수씨는 이런 사고 때문에 비행기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반면 버스를 타고 넘어봤다던 김부래기자는, 차창으로 내다보면 공중에 둥둥 떠가는 듯해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엇갈린 의견을 낸다. 망하 사람들 역시 두 가지 이유를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차들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벼랑 가장자리에 이따금씩 무릎 높이의 콘크리트 연석이 박혀있다. 마주오는 차를 피할 수 있도록 모롱이마다 '양보차로'가 있다. 이런 급커브길은 운전자에게는 악명 높았겠지만 걷는 이에게는 오히려 설레임마저 불러일으킨다.
스물다섯번째쯤 될 모롱이에서 수준점(531m)을 확인하고 보니 일행이 세고 있는 굽이수가 지형도와 얼추 맞아 떨어진다. 발 아래의 아스팔트 국도변의 마전을 내려다보며 마흔번째쯤 굽이를 돌았을 때 마침내 그리던 비행기재 마루가 눈앞에 있다. 철탑이 높다랗게 세워진 흉칙한 몰골로.
오롯하게 잘 보존된 옛길을 지금껏, 세 시간이 넘도록 좋아라 내리 걸었는데 정점에서 저렇듯 흉칙한 물건을 만나다니... 배반감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맥이 풀린 우리 일행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엎어진 김에 싸온 도시락이나 먹고 갈 작정으로.
버스가 일단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잠시 숨을 돌렸다. 마전이나 동무지에서 올라와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고개에는 주막집이 두 채 있었다. 정선쪽과 미탄쪽으로 한 채씩 마주보며 서 있었다. 정선쪽 주막집의 마지막 주인은 권씨였는데 방은 두세 칸, 일대에 흔한 억새로 지붕을 이은 이 집을 아랫마을 사람들은 그냥 '투전집' 이라고 불렀다.
철탑은 정확히 주막집 터로 짐작되는 자리에 세워졌다. 한국통신프리텔과 신세기통신이 세운, 016,017 무선통신공용기지국이었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전화기 화면에는 안테나 막대 여섯 개가 선명히 표시된다. 일행 네 명 중 세 사람이나 무선전화기를 가지고 있으니 앞서 느낀 배반감이란 결국 스스로가 돌려받은 셈이 아닌가.
하산길은 서남향. 일몰까지는 두어 시간 전. 저녁볕이 길 위로 쏟아져 올라올 때보다 한결 따뜻했다. 길가엔 우아하게 드라이플라워된 각시취가 지천이고 계절을 잊어버린 억새가 새하얀 손으로 배웅을 한다. 국도로 내려서니 산등성이에는 미열만한 석양이 남아있다.
건너편 백골마을에 가로등이 켜진다. 버스가 고장나 사람들이 오도가도 못할 때면 이 동네 첫집 임씨네 안방 아랫목에 발을 넣고 뜬눈으로 밤 새운 일이 비일비재했다는데... 임씨는 여직 시퍼렇게 살아있는 옛얘기를 들려주지만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비행기재터널로 바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옛길 길잡이
출발점은 정선 광하리 광석교(혹은 광하파출소) 앞이다. 거기서 신작로를 따라 망하 버스정류장과 구멍가게 하나가 있는 빈지막재 삼거리까지 간 다음 왼쪽 길로 접어든다. 고개마루까지는 외길이다.
비행기재 마루에는 무선통신 기지국이 있고 삼거리다. 올라가던 쪽에서 직진하는 내리막길이 미탄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남동 방면)의 오르막길은 동무지로 가는 길이다.
미탄쪽 42번 국도에 거의 가까워져 쓰레기매립장을 지난 다음 국도 바로 옆 '한일종합대리석 광석사업부 5km' 란 표지판이 있는 곳까지 오면 옛길 걸어넘기는 끝난다.
광하리 광석교~비행기재~백운리 백골 앞까지 걸어서 4시간. 눈이 없으면 4륜구동 차는 넘을 수 있다.
*교통
정선이 기점이다. 정선시외버스터미널(033-563-1094)에서 하루 네 번(07:00, 08:30, 12:40, 16:30, 18:40) 다니는 망하행 시내버스(강원여객)를 타고 광석교에서 내린다. 약 30분 걸리고 650원. 옛길 종점 백골 입구에 버스승차장 팻말이 있다. 시내버스는 다니지 않지만 미탄과 정선을 오가는 직행버스는 손을 들면 세워준다. 요금은 미탄까지 600원, 평창까지 1,200원.
*잘 데와 먹을 데
정선읍내에 동호호텔(033-562-9000), 정선장(563-0066), 정선문화원 옆 춘천닭갈비(562-9945).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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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벗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