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모양 뿔잔 토기
주경림
눈매가 천진한 사슴이 뒤를 돌아보며
“주인님, 제 등에 오르세요.”
쫑긋한 귀에, 뿔이 없어 더 착해 보이는
사슴 표정에 그만 끌리어
등허리에 내 영혼을 올려 태웠다
그러자,
나를 태운 사슴이 달리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붙어있던 짧은 꼬리가
위로 들렸다가 내리치면서 속도가 더 빨라졌다
사슴 등 위의 V자 모양의 뿔잔이
날개로 펼쳐졌다
함안 말이산 정상, 아라가야의 45호 무덤에서
나를 태운 사슴 모양 뿔잔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 별자리가
오늘 밤에는,
날개 펼친 사슴 별자리로 보인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학생들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앎(지식)을 축적한다는 것이고, 앎을 축적한다는 것은 이 앎의 힘으로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앎은 상상력의 날개를 지녔고, 상상력의 날개는 우리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안내를 해준다.
제우스 신은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날아 다녔고, 그의 사신使臣인 헤르메스는 샌달을 신고 날아다녔으며,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 다녔다. 이 고귀하고 위대한 신들, 즉, 이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은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인 앎의 투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결과, 자유자재롭게 하늘을 날아다녔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상상력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도 상상력이다. 모든 싸움은 앎, 즉, 상상력의 싸움이고, 이 상상력의 싸움에서 패배를 하면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는 미래의 희망이 없게 된다. 오직 그는 타인의 말과 명령에 복종을 해야 하고, 주인의 허락 없이는 자기 자신이 태어나고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고향 땅에도 가지 못하게 된다.
모든 선생은 선생이라는 탈을 벗고 학생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늘,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앎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세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앎은 언제, 어느 때나 “눈매가 천진한 사슴이” 되어 “주인님, 제 등에 오르세요”라고, 그의 “등허리에 내 영혼을 올려” 태워주게 될 것이다. “나를 태운 사슴이 달리기 시작”하고, “엉덩이에 붙어있던 짧은 꼬리가/ 위로 들렸다가 내리치면서 속도가 더 빨라”지고, “사슴 등 위의 V자 모양의 뿔잔이/ 날개로 펼쳐”진다.
‘제일급의 좋은 시냐, 아니냐’의 싸움은 상상력의 싸움이고, 이 상상력이 어떠한 수준에서 그 날개를 펼쳐 보이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결정된다고 할 수가 있다. 유선통신에서 무선통신으로, 전자계산기에서 컴퓨터로, 단순 전화기에서 스마트폰으로, 단순 로봇에서 인공지능으로의 변모에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 즉, 상상력의 혁명이 작용했던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현대문명의 성과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현대문명의 성과는, 그러나 고대인들의 신화적 상상력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며, 제우스와 헤르메스와 벨레로폰이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았다면 전혀 가능하지가 않았을 것이다.
주경림 시인은 “함안 말이산 정상, 아라가야의 45호 무덤”을 그의 시적 상상력, 즉, 우주발사기지로 삼고, 이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사슴 모양 뿔잔 토기]를 쏘아올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 별자리가” 아닌 [사슴 모양 뿔잔 토기]의 별자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앎은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고, 상상력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 원동력으로 작용을 한다. 앎(지혜) 없이는 날 수도 없고, 상상력 없이는 어떠한 세계도 얻지 못한다.
시인은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날이면 날마다 혁명을 꿈꾸며, 새로운 신세계를 창출해낸다.
선생은 늙고 한순간의 삶을 살지만, 시인은 영원한 청년의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