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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밥상을 덮던 식탁보는 모자이크처럼 여러 가지 색깔의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식탁보를 들추면 밥과 반찬이 다양한 재료, 시간과 조리방식을 품은 채 한자리에 모여 있곤 했다. 그걸 나눠먹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했다. 밥을 잘 먹고 난 뒤 소화를 시키려고 그러는지 식구들끼리 서로를 가리키며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 손가락질과 놀림이 돌림노래처럼 돌고 돌다 나를 향하고 기정사실로 굳어질 듯한 순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거 재미있겠네, 지금보다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시간과 우연, 고통과 기쁨의 실과 바늘에 엮여 모자이크와 같은 삶을 이루는 소설을 생각해온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또 그런 삶이 여럿 모여 하나의 모자이크를 이룬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들을 가족으로 묶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이 소설은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편견에 맞서 싸우며 가까이서 부대끼다 어느 결에 서로의 세포가 닿고 혈액이 섞이며 연리지처럼 한 몸이 된 사람...어린 시절 밥상을 덮던 식탁보는 모자이크처럼 여러 가지 색깔의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식탁보를 들추면 밥과 반찬이 다양한 재료, 시간과 조리방식을 품은 채 한자리에 모여 있곤 했다. 그걸 나눠먹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했다. 밥을 잘 먹고 난 뒤 소화를 시키려고 그러는지 식구들끼리 서로를 가리키며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 손가락질과 놀림이 돌림노래처럼 돌고 돌다 나를 향하고 기정사실로 굳어질 듯한 순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거 재미있겠네, 지금보다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시간과 우연, 고통과 기쁨의 실과 바늘에 엮여 모자이크와 같은 삶을 이루는 소설을 생각해온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또 그런 삶이 여럿 모여 하나의 모자이크를 이룬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들을 가족으로 묶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이 소설은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편견에 맞서 싸우며 가까이서 부대끼다 어느 결에 서로의 세포가 닿고 혈액이 섞이며 연리지처럼 한 몸이 된 사람들, 그들에게 강 같은 평화가 함께하기를.
2012년 봄
성석제 ---작가의 말 중에서
불도저와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강변의 흙길을 따라 열을 지어 들어오고 있다. 엔진 소리와 땅을 짓누르는 바퀴 소리가 땅을 진동시킨다. 배기구에서 뿜어내는 연기로 차량 대열 위 공중은 옛날 증기기관차가 지나갈 때처럼 뿌옇게 물들어 있다.
군대처럼 밀고 들어온다. 마을이 생긴 이래, 강이 생긴 이래 이토록 많은 내연기관이 한꺼번에 진주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들어온다. 새들이 울부짖고 곤충들은 달아난다. 뱀과 개구리와 두꺼비와 맹꽁이, 너구리, 토끼, 꿩, 살쾡이, 산고양이, 고라니가 숨을 죽이고 그 무지막지한 행렬이 무엇을 할 것인지 겁에 질려 지켜보고 있다. 군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무엇도 알 필요가 없다는 거대한 기계 괴물 집단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밀고 들어온다. 기계의 팔은 나무와 바위를 내리치며 가지를 찢고 균열을 낸다.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고 공기를 휘젓고 아비규환의 지옥을 예고한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생명을 닮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멸절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죽음의 군대다.
마을에는 거대한 괴물 군대의 진군이 아직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 이제 최후의 결전이 남았다. 터질 듯한 긴장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부풀어 거대한 풍선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 ---pp.210~211
종횡무진하는 입담의 진면목, 현대적 해학의 결정판
입담계의 아트이자 재담계의 클래식,
절대고수 성석제가 ‘위풍당당’ 돌아왔다!
‘탁월한 이야기꾼’ ‘해학과 풍자의 장인’ ‘입담과 재담의 진면목’ 등등 성석제를 수식하는 평단의 말들은 흘러넘치도록 많았다. 한국문단 내에서 그만큼 이야기를 저글링하듯 주무르는 소설가가 또 있을까. 그의 소설은 언제고 세상을 성석제 자신만의 방향키로 조타하며, 장착된 무기인 유머와 해학이 소설 곳곳에 지뢰처럼 묻혀 있어 웃음폭탄, 눈물폭탄, 시원 유쾌 발랄 후련의 폭탄이 시도 때도 없이 소설 안에서 펑펑 터진다. 그의 매혹적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날이면 반드시 날을 새우고 단숨에 성석제 전부를 따라 읽어야만 했다. 그런 그가 2003년 장편『인간의 힘』이후 구 년 만에 신작장편소설『위풍당당』을 들고 또 한번 성석제표 웃음의 축제의 장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자 한다. 이번에 출간된 장편『위풍당당』은 시골마을에서 빚어지는 맹랑한 소동극의 형식을 빌려 재담과 익살,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세계를 그려낸다. 동시에 그 웃음 뒤에 숨은 우리 사회가 처한 도덕적 파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충동이 소설 심층부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느 시골마을의 맹랑한 소동극
『위풍당당』의 서사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어느 궁벽진 강마을의 사람들이 그 마을을 접수하러 간 전국구 조폭들과 일전을 벌인다. 시골마을을 얕잡아보고 의기양양하게 쳐들어간 도시의 조폭들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고, 반대로 마음을 모아 위기를 돌파하는 동안 강마을 사람들의 이해와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골마을을 도대체 왜 전국구 조폭들이 접수하려 드는 걸까.
“그런데 따라오고 있다. 검정색 벤츠에 탄 사내들.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 끈 풀린 미친 개 같은 인간들. 시속 오 킬로미터로 걷는 새미를 시속 오 킬로미터의 속도로 따라오는, 짙은 선팅으로 시커먼 유리 속,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세 인간들.”
우연히 방문하게 된 강마을. 조폭들에게는 “자연산” 새미가 눈에 띄게 예뻐 보였던 것. 그 새미를 조폭 일당이 슬슬 따라가고 있던 와중 자신을 먹잇감으로 노리는 조폭들을 피하려다 그중 한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것으로 이 전쟁...종횡무진하는 입담의 진면목, 현대적 해학의 결정판
입담계의 아트이자 재담계의 클래식,
절대고수 성석제가 ‘위풍당당’ 돌아왔다!
‘탁월한 이야기꾼’ ‘해학과 풍자의 장인’ ‘입담과 재담의 진면목’ 등등 성석제를 수식하는 평단의 말들은 흘러넘치도록 많았다. 한국문단 내에서 그만큼 이야기를 저글링하듯 주무르는 소설가가 또 있을까. 그의 소설은 언제고 세상을 성석제 자신만의 방향키로 조타하며, 장착된 무기인 유머와 해학이 소설 곳곳에 지뢰처럼 묻혀 있어 웃음폭탄, 눈물폭탄, 시원 유쾌 발랄 후련의 폭탄이 시도 때도 없이 소설 안에서 펑펑 터진다. 그의 매혹적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날이면 반드시 날을 새우고 단숨에 성석제 전부를 따라 읽어야만 했다. 그런 그가 2003년 장편『인간의 힘』이후 구 년 만에 신작장편소설『위풍당당』을 들고 또 한번 성석제표 웃음의 축제의 장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자 한다. 이번에 출간된 장편『위풍당당』은 시골마을에서 빚어지는 맹랑한 소동극의 형식을 빌려 재담과 익살,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세계를 그려낸다. 동시에 그 웃음 뒤에 숨은 우리 사회가 처한 도덕적 파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충동이 소설 심층부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느 시골마을의 맹랑한 소동극
『위풍당당』의 서사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어느 궁벽진 강마을의 사람들이 그 마을을 접수하러 간 전국구 조폭들과 일전을 벌인다. 시골마을을 얕잡아보고 의기양양하게 쳐들어간 도시의 조폭들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고, 반대로 마음을 모아 위기를 돌파하는 동안 강마을 사람들의 이해와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골마을을 도대체 왜 전국구 조폭들이 접수하려 드는 걸까.
“그런데 따라오고 있다. 검정색 벤츠에 탄 사내들.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 끈 풀린 미친 개 같은 인간들. 시속 오 킬로미터로 걷는 새미를 시속 오 킬로미터의 속도로 따라오는, 짙은 선팅으로 시커먼 유리 속,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세 인간들.”
우연히 방문하게 된 강마을. 조폭들에게는 “자연산” 새미가 눈에 띄게 예뻐 보였던 것. 그 새미를 조폭 일당이 슬슬 따라가고 있던 와중 자신을 먹잇감으로 노리는 조폭들을 피하려다 그중 한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것으로 이 전쟁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는 것. 곧, 시골마을 대 조폭 간 전쟁이 벌어지게 된 시발점이 바로 그것. 쳐들어오는 쪽과 방어해야 하는 대치상황의 이야기는 수월치 않은 과정 속에서 결정되고 하나의 목표로 응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피는 섞이지 않은 타인. 마을 사람 각각의 사연은 우리 사회의 숨기고픈, 감추고 싶은 치부 속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잔인한 인생의 굴레에서 버림받았고, 상처입어 그 강마을에 안착했다.
그래서 강마을 사람들은 서로서로를 이해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였으며, 믿었고, 마을을 건설하고 재배하며 구축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매우 당혹스런 사태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개중에는 “무조건 깡패들 오는 반대방향으로 토껴야죠. (……) 목숨이 아까우면 도망쳐야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강마을을 애써 일궈온 노력, 그 강마을에까지 오게 된 구성원들의 가슴 아픈 상처들을 서로서로 보듬어 돋을새김하여 “그래 싸우자, 싸우자, 싸워보자. 너희와 함께 죽을 때까지 싸워보마.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뿌려줄게” 라고 ‘전투’에 대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위험한 사태 앞에 혈연이 아닌 타인들이 지닐 만한 태도가 ‘도망’이라면, 가족으로 묶인 구성원은 당연히 ‘함께’ 싸워야만 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 ‘가족’이라는 힘이 그 마을 사람들을 뭉치게 하고,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일전을 시작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은 비단 강마을 사람들만의 싸움도, 또 조폭들과의 싸움만도 아니다. 성석제는 이 싸움을 우리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를, 또다른 싸움의 대리전 성격으로 봐주기를 권하고 있다.
또다른 싸움의 전주곡, 웃음의 축제와 저항의 정신
“불도저와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강변의 흙길을 따라 열을 지어 들어오고 있다. 엔진 소리와 땅을 짓누르는 바퀴 소리가 땅을 진동시킨다. (……) 거대한 기계 괴물 집단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밀고 들어온다. 기계의 팔은 나무와 바위를 내리치며 가지를 찢고 균열을 낸다.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고 공기를 휘젓고 아비규환의 지옥을 예고한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생명을 닮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멸절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죽음의 군대다.”
양쪽의 긴장된 대치상황 속에서 또다른 기계군단이 강마을로 진주하고 있다. 그 기계군단은 강을 비롯해 나무, 바위 들을 내리치며 자연을 균열내고, 파괴하며 짓밟고 휘젓는다. 생명을 멸절시키는 기계군단의 침해는 강마을 사람들에게는 또다른 적, 재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응책은 무엇인가. 기계군단의 침략에 맞서 강마을 사람들이 싸워야 할 방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조폭들에게 궁벽한 시골에서 찌는 듯한 더위에 물도 없이 있어야 할 일은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릴 때쯤 갑자기 굶주린 “참새만한 모기”들이 조폭 일당을 공격한다. 그게 다는 아니다. “집단지성”으로 산불의 기억이 떠오른 “말벌의 정예 전투원”에게 혼쭐나게 속수무책 당하기도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조폭 무리를 기절초풍하게 만든 건 ‘고추 잿물 폭탄’과 십 년 묵은 ‘분뇨 폭탄’이었으니, 그야말로 조폭들은 육체적,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고 만다.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모든 공격 무기는 바로 ‘자연’에게서 얻은 것들이었고, 자연이 인간에게 되돌려준 ‘자연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조폭이라는 인위적인 ‘폭력’ 앞에 맞서 방어하는 무기가 ‘자연물’이라면, 그 자연으로 방어하고 그 자연으로 공격하는 것이라면, 성석제가 제시한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다. 그건 “거대한 기계 괴물”이 ‘자연의 법도’ 앞에 굴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연의 주인은 자연에게 있다는 것. 자연은 그것을 해하려 하는 자를 스스로 공격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 자연의 힘은 우리가 가져보지 못한 게 아니다. 이미 주어졌는데 잊었거나 아니면 가지기도 전에 빼앗긴 것인지도 모른다. 저 무시무시한 기계군단의 침략은 어쩌면 강보다 우리 마음속을 먼저 침략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기계군단과 조폭의 모습 들을 드러내면서, 자연의 파괴 앞에 무심코 방관만 하고 있던 우리 사회가 처한 도덕적 파국을 상기시킨다.
모든 것들에게 영광을
“이 소설은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편견에 맞서 싸우며 가까이서 부대끼다 어느 결에 서로의 세포가 닿고 혈액이 섞이며 연리지처럼 한 몸이 된 사람들, 그들에게 강 같은 평화가 함께하기를.”(‘작가의 말’ 중에서)
우리는『위풍당당』을 읽으며 웃을 것이다. 페이지 곳곳마다 까르르, 킥킥, 큭큭거리며 불가항력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성석제가 이끄는 위풍하고도 당당한 이야기의 경로를 따라다니면서 대책 없는 웃음이 터져나올 테고, 그 안에 매복된 헤아릴 수 없는 해학과 익살의 축제 속에서 그저 철저히 성석제표 웃음에 지배당할 것이다. 허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 웃음 뒤에, 포복절도할 만큼의 웃음이 사라지고 난 뒤에, 그뒤에 전해질 가슴 찡한 눈물 한 방울 또한 우리들은 거스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성석제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고, 날을 새우게 하며, 그가 제시한 소설적 현실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거란 걸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석제를 읽고, 웃고, 운다. 성석제가 돌아왔다. 진정한 이야기꾼의 일침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