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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은 서태후의 출신
서태후(西太后: 1835~1908)의 성은 예허나라(葉赫那拉), 이름은 옥란(玉蘭) 또는 난아(蘭兒)이다. 함풍황제(咸豊皇帝: 1831~1861)의 의귀비(懿貴妃)이자 동치황제(同治皇帝: 1856~1875)의 생모로, 함풍황제가 병사한 후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치황제 재위 기간과 광서황제(光緖皇帝) 재위 초기, '백일유신' 진압 이후, 이 세 차례에 걸쳐 그녀는 수렴청정을 하였으니, 동치~광서 시기에는 그녀가 바로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48년간 집권을 하다가 74세 때 이질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지는 정릉(定陵: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遵化縣> 보타욕<普陀峪>)에 있다.
서태후는 원래 그녀의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다. 태후(太后)는 황제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대비'와 같은 개념인데,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태후를 칭할 때 그 앞에 성씨를 두어 "여태후(呂太后)"ㆍ"등태후(鄧太后)" 또는 "여후(呂后)"ㆍ"무후(武后)"라 칭했다.
그렇다면 서태후(西太后)는 혹 그녀의 성이 '서(西)'씨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함풍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황후 뉴구뤼씨(鈕鈷祿氏)에게는 아들이 없어 의귀비(懿貴妃)의 아들 재순(載淳)이 6세의 나이로 황제(동치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에 함풍황제의 황후를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라 하고, 어린황제의 생모인 의귀비를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라 불렀다. 그 후에 다시 그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명호에 따라 성모황태후를 자안태후(慈安太后)로, 모후황태후를 자희태후(慈禧太后)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자안태후의 거처가 자금성 내 동쪽의 종수궁(鍾粹宮)이었고, 자희태후의 거처가 자금성 내 서쪽의 저수궁(儲秀宮)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자안태후를 동태후(東太后), 자희태후를 서태후(西太后)라 부르게 되었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서태후는 바로 이 자희태후를 일컫는 말이며, 이 자희태후가 바로 그녀의 공식적인 칭호이다.
일반적으로 서태후는 만주족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녀의 출신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채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왔다. 최근 장치시(長治市) 지방지(地方志) 판공실(辦公室) 부주임이었던 유기(劉奇)는 서태후의 출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이 연구논문에서 유기는 서태후를 한족 출신으로 산서성 장치현(長治縣: 지금의 장치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주장하였는데, 사학계에서는 그의 이러한 연구성과가 중국 역사연구에 있어서 "백년의 공백"을 메워주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근래 백 여년간 중국 내외에서 서태후에 관한 저술과 영화 작품은 100여종 이상이나 쏟아져 나왔지만 그 중 그녀의 출생과 유년시절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극히 찾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출생에서 입궁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소개한 것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유명한 청사(淸史) 연구가 유병곤(兪炳坤)은 <<자희가세고중(慈禧家世考中)>>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던 것이다.
"서태후의 가계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줄곧 취약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이는 기록된 사실(史實)이 너무 간략하여 공백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만큼 이설도 분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태후의 출생지는 도대체 어디인가? ...... 그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명확한 해답이 없는 것 같다."
1989년 6월 장치시 교외(원래는 장치현) 하진촌(下秦村)에 사는 77세의 농민 조발왕(趙發旺)은 상진촌(上秦村)의 송쌍화(宋雙花), 송육칙(宋六則), 송덕문(宋德文), 송덕무(宋德武) 등과 함께 연명으로 쓴 서신을 가지고 장치시 지방지 판공실을 찾아갔다. 여기에서 조발왕은 서태후를 상진촌 사람이라 주장하면서, 자신은 서태후의 5대 외조카이고 송쌍화와 송육칙 등은 서태후의 5대 질손(侄孫)이라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한 정부의 협조를 요청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유기는 서태후의 유년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충분한 증빙자료의 도움으로 유기는 더욱 확신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 할 수 있었다. 1999년 4월 문화부 중국예술연구원에서 주관한 "공화국사회주의 문학예술 50년 세미나(共和國社會主義文學藝術五十年硏討會)"에서 유기가 편찬한 <<베일 벗은 자희의 유년시절(揭開慈禧童年之謎)>>이 일등을 차지하였다. 이 논문에서 유기는 서태후의 출신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유기의 고증에 의하면, 1835년 서태후는 산서성 장치현 서파촌(西坡村)의 한 가난한 한족 농민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소겸(王小謙)'이었다. 4세 때 장치현 상진촌의 송사원(宋四元)에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宋齡娥)'로 바꾸었고, 12세 때 다시 노안부(潞安府) 지부(知府) 혜징(惠徵)에게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玉蘭: 난아<蘭兒>라고도 함)'으로 고쳤으며, 1852년 예허나라 혜징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궁녀에 선발되어 입궁하였다는 것이다.
백 여년 동안 장치현 서파촌(西坡村), 상진촌과 그 부근의 촌장들은 한결같이 서태후가 그 지역 사람이라고 말해 왔으며, 서면으로 자료를 작성하여 그러한 뜻을 주장한 사람만도 150여명이나 된다. 장치현에는 서태후의 출생지 유적과 생모의 무덤이 있다. 상진촌 관우 사당 뒤에는 '낭낭원(娘娘院)'이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서태후가 궁궐에 들어가 귀비가 된 후로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그녀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 집을 '낭낭원'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낭낭(娘娘: 냥냥)'은 중국어로 '황후'나 '귀비'를 뜻하는 말이다. 장치시의 옛 노안부(潞安府) 관청 후원에는 '자희태후 서방원(慈禧太后書房院)'이 보존되어 있다.
서태후의 무덤과 유골
서태후의 후손들은 5개의 관련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서파촌 왕배영(王培英) 집안의 족보에는 서태후의 아명과 함께 "왕소겸(王小謙)이 훗날 자희태후가 되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상진촌의 송육칙과 송덕문의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오는 광서(光緖)~선통(宣統) 연간에 청나라 조정에서 제작한 황제와 황후의 종사보(宗祀譜: 조상의 제사를 기록한 책)가 있다. 또 송육칙의 집안에는 서태후가 그녀의 사촌 오빠 송희여(宋禧餘)에게 보낸 서신 조각과 인물 사진이 있다.(아래 사진 참고)
상진촌(上秦村) 송육칙(宋六則)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서태후가 그녀의 사촌 오빠 송희여(宋禧餘)에게 주었다는 인물 사진과 서신 조각
10년 동안 유기는 현지 조사를 하면서 많은 역사 문헌도 참고하였다. 서태후의 생활습관과 언행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도 그녀가 산서 장치현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태후는 장치현 칠리파촌(七里坡村) 한인칙(韓印則)의 둘째 부인을 유모로, 장치현 소상촌(小常村) 진사해(陳四孩)를 황실 주방장으로 삼고, 장치현 사가장촌(史家莊村) 원전오(原殿奧)를 어전시위로 임명하여 그녀를 호위하게 하였다. 원전오는 어전시위를 역임하던 중 위법 행위를 하여 마땅히 처형되어야 했지만, 서태후는 동향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사면하고, 나아가서는 그를 강서(江西)의 관리로 파견하였다. 서태후는 특히 장치현 출신의 관리와 장치현의 지방관 및 산서의 상인들에게 관대하였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하였을 때 8월 29일 서태후는 광서황제와 대동(大同)으로 피신하여 3일간 머물렀는데, 그 전란의 와중에서도 노안지부(潞安知府) 허함도(許涵度)를 접견하였다.
서태후는 장치인들이 즐겨 먹는 무, 경단, 호관초(壺關醋), 양원흑장(襄垣黑醬), 옥수수죽, 심주황소미(沁州黃小米) 등을 좋아하고, 장치인들이 즐겨 피우는 수연(水煙)과 상당방자(上黨邦子: 산서성 동남부 지역에서 유행하는 지방극)를 좋아하였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하였는데 대부분 산서민가(山西民歌)였다. 한 번은 함풍황제가 서태후에게 "어찌하여 산서 등지의 민가는 잘하면서도 만주 노래는 못하는가?"라고 묻자,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서 노안부(潞安府)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의 민가를 잘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만의 역사학자 고양(高陽)은 <<자희전전(慈禧前傳)>>에서 서태후를 일러 "한자만 알고 만주글자는 모른다."고 하였다. 서태후의 어전 상궁 유덕령(裕德齡)은 <<청궁십이년기(淸宮十二年記)>>에서, "나는 농촌생활을 좋아한다. 그것이 궁궐생활보다 훨씬 자유롭다."라고 한 서태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서태후는 자신의 전답과 장원(莊園)을 가지고 있었으며 4~5일에 한번 거기로 찾아갔다고 하였다.
서태후의 보물
"서태후가 산서의 한족"이라는 관점은 많은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아, <<명청사대태감총서(明淸四大太監叢書)ㆍ황비신변의 측근들(皇妃身邊的貼心人) - 안덕해(安德海)>>(북방문예출판사 1997년판)와 <<서풍수마(西風瘦馬) - 공친왕 혁흔전(共親王奕흔傳)>>(작가출판사 1998년판) 등의 저술에 수록되었다.
산서대학(山西大學) 교수 요전중(姚奠中)은 유기의 연구성과가 "일차적으로 서태후 유년기의 역사적 공백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논평하였으며, 중국사학회 부비서장 겸 중국인민대학(中國人民大學) 역사학과 주임을 역임한 왕여풍(王汝豊) 교수와 장혁비(張革非) 교수는 <<자희동년고(慈禧童年考)>>(유기 주편)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 글은 증거가 확실하며 결코 터무니 없는 억측이 아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서태후연구 중 취약했던 부분이 충분히 보충될 수 있었다."
"만약 이 저술 중에서 일부 지엽적인 부분을 부정하기는 쉽겠지만, 충분한 근거 자료가 없이 그 결론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중국인민대학의 한 근대사 교수는 서태후의 출생지에 대해서 이전에는 5개의 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북경설(北京說)과 산서설(山西說)로 압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서태후의 일생
서태후의 아버지 혜징(惠徵)은 일찍이 안휘(安徽) 휘녕지(徽寧池) 광태도(廣太道)의 도원(道員: 행정을 감찰하는 지방관리)을 역임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에는 집안이 몰락하였다. 1851년 자희는 예허나라씨 중에서 궁녀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5월 9일 17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가 1855년 2월 의빈(懿嬪)으로 승격되었다. 그녀는 남방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남방의 노래(특히 산서민가)를 잘 불렀으며 이로 인하여 황제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황궁 여인들의 지위는 다음과 같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1등급: 황제의 조모, 즉 성조모(聖祖母) - 태황태후(太皇太后).
제2등급: 황제의 어머니, 즉 성모(聖母) - 황태후(皇太后).
제3등급: 황제의 본처, 즉 황후(皇后).
제4등급: 황제의 후궁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황귀비(皇貴妃).
제5등급: 황제의 두 번째 후궁인 귀비(貴妃)로 모두 2명.
제6등급: 황제의 세 번째 후궁인 비(妃)로 모두 4명.
제7등급: 황제의 네 번째 후궁인 빈(嬪)으로 모두 6명.
제8등급: 황제의 다섯 번째 후궁인 귀인(貴人), 그 수는 일정치 않음.
제9등급: 황제의 여섯 번째 후궁인 상재(常在), 그 수는 일정치 않음.
제10등급: 황제의 일곱 번째 후궁인 답응(答應), 그 수는 일정치 않음.
제11등급: 궁녀로 그 수가 일정치 않다. 궁녀는 시녀나 마찬가지여서 후궁이 될 자격이 없지만 황제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으면 후궁이 될 수 있다. 청왕조의 궁녀 수는 2천명 이상이었으나 당왕조 때는 4만명 이상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역대 다른 왕조에 비하면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
1856년 3월 자희는 아들 재순(載淳: 동치황제)을 출산하여 의비(懿妃), 즉 비(妃)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의귀비(懿貴妃), 즉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궁녀에서 귀인을 거쳐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점점 커져 갔다. 1860년 영ㆍ프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그녀는 함풍황제를 따라서 열하(熱河: 지금의 하북성 승덕<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몽진하였다. 이때 함께 따라가지 못하고 원명원(圓明園)에 남아 있던 함풍황제의 비빈(妃嬪)들은 원명원이 점령당하여 불길에 휩싸이게 되자 모두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듬 해 8월 함풍황제는 피서산장에서 병사하고 6세의 어린 재순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그녀와 함품황제의 황후 뉴구뤼씨(鈕鈷祿氏)는 황태후로 추대되어, 휘호를 자희(慈禧)와 자안(慈安)이라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자희태후를 서태후(西太后), 자안태후를 동태후(東太后)라 불렀다.
서태후의 죽은 입에서 나왔던 야명주
함풍황제는 죽기전에 6세의 어린 태자 재순이 무난히 황위를 무난히 계승하여 유지할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아들의 황위 계승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 바로 자기의 동생이자 태자의 숙부인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과 태자의 생모인 의귀비(즉 서태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풍황제는 죽기 전날 태자의 황위 계승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친왕(怡親王) 재원(載垣), 정친왕(鄭親王) 단화(端華)와 숙순(肅順) 등 8명의 대신에게 아들의 정무를 보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이 8명의 대신 중에 공친왕은 제외되었다. 또 함풍황제는 어린 황제를 끼고 생모가 전권을 휘두르다 보면 나라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중국 역사상 여인들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서 전횡을 일삼다 망국의 길로 치달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태자의 생모인 의귀비는 역대 그 어느 여성 못지 않게 정치적 역량과 권력욕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함풍황제로서는 더욱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1861년 7월 함품황제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후궁들을 불러서 친견하면서도 의귀비는 그 자리에 제외시켰다. 함풍황제는 다시 밀지를 한통 써서 황후(즉 자안태후<慈安太后>)에게 주면서 의귀비가 정권을 장악하려 하면 그 밀지를 공개하여 그녀를 제거하라고 지시해 두었다.
함풍황제가 죽은 후 의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태후는 먼저 자안태후를 설득하기로 하였다.
"지금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마마나 저는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할 것입니다. 재원과 단화, 숙순 등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좋은 날이라곤 없을 것이니, 공친왕과 합세하여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시렵니까?"
자안태후는 서태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일차적으로 자안태후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서태후는 공친왕 혁흔 등 귀족 관료세력과 합세하여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고명대신 재원(載垣), 단화(端華), 숙순(肅順) 등을 죽이고 조정의 대권을 탈취하였다. 이로부터 서태후는 자안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자안태후는 비록 서태후의 주장에 찬동하여 함께 수렴청정을 하긴 하였지만, 이미 함풍황제로부터 서태후를 조심하라는 유언과 함께 밀지를 받아 둔 상태인지라 늘 서태후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서태후는 자안태후를 극도로 공손하게 대하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도굴된 서태후의 무덤
한 번은 자안태후가 큰 병을 앓다가 병세가 호전된 후에 문병을 온 서태후의 팔에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서태후는 "태후마마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저는 신불에게 마마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마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제 팔의 살을 도려내어 약에 넣고 끓여서 태후마마께 드렸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한 자안태후는 서태후에게, "그대가 나에게 이토록 잘해주리라는 것을 내 미처 생각치 못했소. 그야말로 우리는 자매나 마찬가지인데 선황께서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았던 것 같구료!"라고 말하고는 함풍황제가 내린 밀지를 서태후가 보는 앞에서 태워 버렸다. 이로부터 서태후는 모든 국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키면서 점점 권력을 독점해 나갔다.
서태후는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금위군(禁衛軍) 통령(統領: 지금의 여단장에 해당됨) 영록(榮祿)과 사랑하던 사이었다. 그녀는 정권을 장악한 후에 그러한 영록을 보좌관으로 삼고 그에게 대권을 맡겼다.
조정의 중대사로 극한 대립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영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매사를 자기 뜻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한번은 화북지구(華北地區)에 가뭄이 발생하여 자희는 관례에 따라 여래불(如來佛)에게 기우제를 올렸는데, 묘하게도 삼일 후에 비가 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심복인 내시 이련영(李蓮英)이 그녀에게, "태후마마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부처님께서도 마마의 말씀을 들어주시니까요! 마마께서는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아첨을 떨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서태후를 "부처님(老佛爺)"이라 부르게 되었다.
1874년 동치황제는 18세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황제가 성인이 되었으니 자연히 서태후와 자안태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권을 황제에게 이양해야 했다. 그런데 그전에 서태후와 자안태후는 황후 후보를 각각 한사람씩 추천했는데, 동치황제는 자안태후가 추천한 사람을 황후에 봉하고 서태후가 추천한 사람을 혜비(慧妃)에 봉했다.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서태후는 동치황제가 결혼식을 올린 후에 자주 황후를 구박하고, 동치황제에게 혜비를 찾아가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으며 못살게 굴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극성에 염증을 느낀 동치황제는 마침내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심복 내시를 데리고 평민복 차림으로 궁궐 밖의 기생집을 출입하다가 돌아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이런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동치황제는 매독에 걸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전신에 열이나면서 허리가 아프고 소변이 불순하여 단순한 감기 정도로 생각했지만, 날이 가도 열이 내리기는 커녕 목과 등, 허리, 손에 붉은 반점까지 나타났다. 1874년 11월 머리와 얼굴에도 붉은 반점이 번지기 시작하여 핏물이 흘러나오는 등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서태후는 동치황제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랄 것을 염려하여 양심전(養心殿)의 모든 거울을 치워 버리게 했다. 궁중에서는 황제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사실을 급비에 부치고 단지 황제가 천연두에 걸렸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하루는 동치황후가 양심전으로 문병을 가서는 동치황제에게 서태후가 사소한 일로 자신을 구박한다고 하소연하면서 마치 실성한 듯이 대성통곡을 하였다. 자기가 심어둔 내시로부터 황후가 황제를 찾아갈 것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서태후는 몰래 양심전 옆으로 가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때 서태후는 황후가 자기를 헐뜯는 말을 하자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뛰어들어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따귀를 때리며 내시에게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 광경을 본 동치황제가 깜짝 놀라 졸도를 해 버리자 서태후는 더 이상 황후를 문책하지 않았다. 이후로 동치황제는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87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동치황제의 병이 매독이 아니라 천연두였을 것이라 확신하는 학자도 많다.)
동치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그 책임을 황후에게로 돌렸다. 이에 동치황제가 죽던 날 황후는 금가루를 삼키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구했다. 이때 동치황제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황후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1874년 12월 서태후는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4살밖에 안된 여동생의 아들 재첨(載첨, 첨=삼수+恬)을 양자로 삼고 황제(광서황제)로 옹립한 다음 다시 수렴청정을 계속했다. 이로부터 청왕조는 황위의 부계세습 전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후에도 서태후는 동치황후가 아들을 낳아 황태후가 된 다음 자기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염려하여 황후에게 음식을 주지 말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에 동치황후는 친정에서 보내오는 음식만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했다. 황후는 몰래 친정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으나, 그녀의 친정 아버지는 그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결국 절망에 가득 찬 동치황후는 1875년 2월 20일 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881년 동태후가 돌연히 사망하였다. 동태후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미스테리에 싸여 있다. 일반적으로는 병으로 죽었다는 설, 서태후의 강요로 자살했다는 설, 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병으로 죽었다는 설은 그 당시에 이미 상황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며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서태후에 의해 죽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동태후가 죽은 후 중ㆍ프전쟁 기간에 그녀는 공친왕 혁흔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조정의 대권을 독점하였다. 1886년 서태후는 영ㆍ프연합군에 의해 불탄 청의원(淸漪園: 지금의 이화원)을 재건하고, 그 이듬해에 '수렴청정'을 '훈정(訓政)'으로 고쳤다.
1889년 명분상으로는 광서황제에게 정권을 돌려주었으나 실제로는 내정과 외교의 대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과 치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1898년 광서황제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시행하였다. 그는 유신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하다가 서태후와 갈등을 빚었다. 이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9월 21일 정변을 일으켜 광서황제를 영대(瀛臺)에 유폐시키고 담사동(譚嗣同) 등 유신파 핵심인물 6명을 처형한 후 다시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서태후는 새로운 훈정을 선포하고 광서황제의 폐위를 준비하였으나, 지방의 총독과 외국 사신들의 반대로 광서황제의 칭호만 남겨둔 채 단왕(端王) 재의(載漪)의 아들 부준(溥儁)을 황태자로 삼았다. 1900년 8월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했을 때 그녀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西安)으로 피신하였다가 1901년 9월 굴욕적인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였다. 1902년 1월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를 영대에 구금하였다.
서태후의 사생활은 매우 사치스러워 식사 한끼에도 거액의 은자를 낭비하였다. 그녀는 평상시에는 맛이 깊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였다. 특히 오리고기를 좋아하여 얼마나 많이 먹었든지 결국 위장 기능이 저하되어 항상 복부 팽창과 설사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주 과음과 과식을 일삼았다.
1908년 10월 13일 그녀는 74세 생일을 기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과식하여 5일째 되던 날 이질이 발병하였다. 아편을 평소 보다 배로 복용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녀를 더욱 여위게 만들 뿐이었다. 20일 부의(溥儀)를 후계자로 세운 다음 날 광서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광서황제의 죽음에 대해서도 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서태후가 병상에 있을 때 광서황제도 병중에 있었다. 이때 그는 일기에서, "지금 내 병이 아주 심하긴 하지만 부처님(서태후를 가리킴)이 나보다 먼저 죽을 것이야.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난 반드시 원세개(袁世凱)와 이련영(李蓮英)을 죽여 버리겠다."라고 썼다. 그런데 이 일기의 내용이 이련영에게 발각되었고 이련영은 그것을 즉시 서태후에게 보고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서태후는 "절대 그 보다 먼저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날(21일)부터 이련영에게 광서황제의 음식과 의약에 관한 일을 맡아라고 지시했다. 이날 오후 광서황제의 병세는 갑자기 악화되어 사망하였는데, 서태후가 이련영에게 그를 독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는 것이다.(이와는 달리 원세개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으나, 최근에는 병사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1908년 10월 23일 정오에 서태후는 점심 식사를 받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의자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즉시 광서황후와 섭정왕(攝政王) 재풍(載灃), 군기대신(軍機大臣) 등을 침실로 불러서, "내 병은 가망이 없을 것 같으니, 이후의 국정은 섭정왕이 맡아 보도록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저녁 무렵 그녀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대신들에게, "이후로 아녀자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반드시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각별히 대비해야 하오. 특히 내시가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명나라 말기에 내시가 전횡하였던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오."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숨을 가쁘게 몰아 쉬다가 73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서태후가 차고 다니던 진주>
처음에는 인도 무굴제국의 황실에 있던 것이었으나 1739년 페르시아가 인도를 침공하여 약탈해 갔다. 그후 페르시아제국이 청왕조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이것을 청나라에 선사했다. 서태후가 가장 아끼던 패물이었다.
서태후는 집권 기간 동안 국내외의 수구세력을 규합하여 태평천국운동과 각지의 농민봉기를 진압하고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하였으며, 서구 열강들과 치욕적인 조약을 맺고 그 열강 세력을 이용하여 의화단운동을 진압하였다. 그녀는 반식민지 반봉건 중국 사회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의존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태후는 권력욕이 대단히 강하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자기의 친인척은 물론 황실의 종친까지도 무참히 학살하였다. 그녀는 잔인하고 의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괴퍅하여 걸핏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내시와 시녀들을 마구 죽이곤 하였다. 그 때문에 누구든 서태후를 모시는 사람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에 항상 마음을 조이며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그녀의 심복인 내시들도 표면적으로는 굽신거리며 순종하는 듯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늘 딴 생각을 품고 있었다. 내시의 우두머리 이련영은 서태후가 가장 총애하던 심복이었지만, 서태후의 임종을 통보하였을 때 그는 갖은 핑계를 대며 달려가기를 거절하고, 서태후가 죽자 많은 금은보화를 챙겨서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서태후가 자안태후, 공친왕과 연합하여 정권을 탈취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26세였고, 자안태후는 25세, 공친왕은 30세였다. 이들은 비록 젊은 나이에 정권을 탈취하긴 하였으나 내외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던 당시 정국을 원만하게 수습하는데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전부터 계속된 전국 각지의 민란이 더욱 끊이지 않아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당시 절강(浙江) 지역의 인구는 3천만명에서 1천만명으로 줄어들었고, 지상천국이라는 절강성 항주(杭州) 지역도 80만명에서 몇 만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강소(江蘇) 지역도 4천 5백만명에서 2천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기아와 빈곤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서태후는 청의원을 화려하게 재단장한 이화원에서 호위호식하며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녀의 사치가 얼마나 심했는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녀의 식사 한끼에 차려낸 음식은 128가지나 되었고, 여기에 소요된 경비는 백은(白銀) 1백량(兩)이나 되었다. 이를 당시의 가난한 중국 농민의 식사로 환산하면 1만 5천명에게 한끼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의 하루 식사는 4만 5천명의 중국 농민의 한끼 식사량과 맞먹는 셈이었다. 이러한 사치와 안일한 정국 운영이 허약할대로 허약해져 버린 청나라 조정을 더욱 빨리 패망의 길로 치닫게 했던 것이다.
서태후와 청말 개혁
서태후는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두뇌를 이용하여 함풍황제의 총애를 사고, 다시 과감한 결단력과 간교한 계책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녀는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켰지만, 권력을 장악한 후 그녀의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은 그녀와 비슷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웠다.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킨 후 부국강병을 슬로건으로 내건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서막이 올랐다. 만약 서태후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양무운동은 강력한 수구세력의 저항 속에서 30여년간이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흔히 서태후를 일러 "완고한 보수세력의 영수"라 칭하지만, 알고 보면 서태후에게도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무파는 일을 추진할 때마다 보수파와 청류당(淸流黨)의 반대에 부딪혀 조정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보수파와 청류당의 완강한 저항 속에서 서태후는 교묘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점진적으로 그들의 역량을 감소시켜 나갔다.
1866년 양무파는 동문관(同文館: 최초의 신식학당)에 천문관(天文館)과 산학관(算學館)을 증설하여 과거 출신자들을 선발 입학시켰다. 이 일에 대하여 문연각(文淵閣) 대학사 왜인(倭人)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중국과 같은 큰 나라에 인재가 없지 않은데 "하필이면 서양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단 말인가"라고 주장하였다. 왜인의 반론을 접한 서태후는 즉시 그에게 자연과학에 정통한 중국선생을 추천하여 별도의 학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한 다음 동문관의 서양식 학습과 견주어 보자고 하였다. 이러한 서태후의 대응에 당황한 왜인은 즉시 잘못을 인정하는 해명서를 내고 병을 핑계로 휴직을 청하였다.
청류파(淸流派)의 대표자 장패륜(張佩綸)도 서태후에게 일침을 맞은 적이 있다. 중ㆍ프전쟁 시기에 장패륜은 양무파의 군사 외교 정책에 대하여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서태후는 즉시 장패륜을 복건성의 연해지방으로 보내어 전선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게 하였다. 그러자 서태후의 명을 받은 장패륜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한없이 괴로워했다고 한다. <<중프병사본말(中法兵事本末)>>의 기록에 의하면, 장패륜은 적의 포성을 듣고 배의 뒷문을 통해서 산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태후의 교묘하면서도 과감한 용인술을 엿볼 수 있다.
서태후는 개혁을 지지하였지만 격동의 시대에 최고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역량은 다소 부족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녀는 신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애석하게도 해군 군비를 유용하여 이화원 증축에 낭비하였다. 이러한 우매함과 사리사욕은 그녀가 지지한 양무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그녀는 사태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혁의 방향과 목표에 대해서도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으며, 외부의 자극에 의해 수동적으로 정책을 조정했다.
청일전쟁 후 무술변법 유신운동이 일어났다. 주지하다시피 서태후는 일거에 무술변법 운동을 진압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태후가 변법유신 자체를 줄기차게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이로써 완고한 서태후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행간(費行簡)의 <<자희전신록(慈禧傳信錄)>>에 의하면 일찍이 변법 초기에 서태후는 광서황제에게 변법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전한 바 있다.
"변법은 내가 평소에 바라던 것이오. 동치(同治: 1862~1874) 초기에 증국번(曾國藩)의 의견을 받아들여 서양에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부국강병을 시도하였소."
"진실로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만 있다면 황제가 그것을 추진하더라도 나는 간섭하지 않겠소."
평소에 서태후를 두려워하고 있던 광서황제는 서태후가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자 안심을 하고, 몇몇 젊은 서생들의 옹호 속에서 과감하게 개혁을 진행하여, 불과 일주일 만에 일천년간 누적된 개혁의 임무를 완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 수위는 점점 서태후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여 마침내 정변으로 유혈 진압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서태후의 불만은 단 두 가지였다.
첫째, 유신파가 그녀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 계획을 수립하여 그녀의 지위와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였다. 서태후는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한 개혁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광서황제와 유신파는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여 당시 사회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사회단체나 정치세력들을 위협하였다. 백일유신 기간에 110여건에 달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사람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않았으며, 광서황제는 변법에 장애가 되는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하여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특히 팔고문(八股文) 폐지를 골자로 한 과거제도의 개혁은 과거를 준비하고 있던 많은 선비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이에 사회 전복을 염려한 서태후는 긴급히 단호한 조치를 내려 정국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무술변법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개혁은 이미 진행되었기 때문에 남은 문제는 누가 어떤 방법으로 개혁을 계속 수행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무술정변을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재확인한 서태후는 계속하여 개혁을 수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러한 조치는 정변 후 한동안 경직되어 있던 정치 사회적 국면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어 변법유신에 새로운 희망의 불꽃을 심어 주었다.
<서태후와 비빈들>
서태후가 완만하게 개혁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였다. 대세 판단에 어두운 보수파들은 서태후에게 의화단을 이용하여 외세를 배척할 것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결국 영ㆍ프 연합군의 북경 침공으로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西安)으로 피난가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서태후는 일을 망친 보수파들을 처벌하고 더욱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할 결심을 하였다. 1901년 1월 29일 서태후는 서안에서 '예약변법(預約變法)'을 반포하였으며 대대적인 개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고 각계에 자문을 구했다.
이 조칙이 반포된 이후 각계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 중 양강총독(兩江總督) 유곤일(劉坤一)과 호광총독(湖廣總督) 장지동(張之洞)이 연서하여 올린 상소의 내용이 가장 완비된 것이어서, 서태후는 그것을 자세하게 읽어본 후 그대로 시행할 결심을 하였다. 동년 4월 청나라 정부에서는 독판정무처(督辦政務處)를 설립하고, 혁광(奕劻)과 이홍장(李鴻章) 등 6명을 독리대신(督理大臣)에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청대 말기의 '신정(新政)'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청말의 '신정'은 무술변법 보다 근대화 성격이 더 강한 개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필요없는 관청과 관원을 없애겠다는 무술변법의 노선을 바탕으로 하면서, 전통적인 6부 체제를 폐지하고 외무부(外務部), 상부(商部), 학부(學部), 순경부(巡警部), 우전부(郵電部) 등의 정부기구를 신설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무술변법 때 시행했던 상공업 장려와 기업 발전에 대한 각종 조치를 수용하면서, <상인통례(商人通例)>, <공사율(公司律)>, <파산율(破産律)>, <상회간명장정(商會簡明章程)> 등의 다양한 경제 법규를 반포하고, 상공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법적 보장을 제공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무술변법 때의 주장대로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군제를 개편함과 동시에 현대식 훈련과 현대식 장비를 도입하는 등 군의 전투 역량을 제고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문화교육적으로는 무술변법 때 제기되었던 과거제도의 개혁, 신식학당의 설립, 유학 장려 등의 정책을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식학당을 대대적으로 설립하고 해외에 많은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제도를 모방하여 중국 최초의 교육제도인 <흠정학당장정(欽定學堂章程)과 <주정학당장정(奏定學堂章程)>을 제정하였다.
무술변법에서 신정에 이르기까지는 부정에 부정을 거듭한 변증법적 발전 과정이었다. 개혁의 물결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는 더욱 강렬하게 추진되었다. 서태후는 최고통치자로서 신정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신정의 개혁은 여러 가지 폐단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 그것은 중국에 현대화를 위한 자원을 쌓아주고 사회적 전환을 위한 여건을 성숙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국내외 환경은 청나라 조정에 더 이상 개혁을 착실히 완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국내외 여론은 입헌국가가 전제국가를 이긴 것으로 판단하고 중국도 입헌국가로 변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결국 서태후는 강력한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신정의 방향을 입헌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정개혁은 정치체제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시의 개혁에 상당한 혼란을 가져왔고, 서태후에게도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원래 후발 국가가 초기에 사회적 안정을 이루면서 현대화를 추진하려면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필요한데, 일본이 바로 그 선례라 할 수 있다.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시작하여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을 반포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그러나 중국은 신정을 시행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헌정개혁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1906년 광서황제는 서태후의 명을 받들어 '예비방행헌정(預備倣行憲政)'을 선포하고 관제개혁에 착수하였다. 관제개혁은 행정과 사법의 상호 독립이란 기본 원칙을 전제로 쓸데없는 인력을 없애고 전문 인력을 배치하여 맡은 바 직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었다. 관제개혁은 권력과 이익의 대대적인 조정으로 이어짐으로써 통치집단 내부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로 인하여 관제개혁에 관한 진정서가 빗발치듯 날아들어 서태후를 심각한 고민에 빠뜨렸다. 관제개혁 중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중앙과 지방의 권한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청나라 정부에서는 본래 관제개혁을 통하여 지방관의 병권과 재정권을 흡수하려 하였으나 지방관들이 오히려 내각과 개국회(開國會)를 설치하여 중앙정부를 협박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 결과 관제개혁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1908년 헌정 편사부(編査部)에서는 예비 입헌 사업 9개년 준비 계획서를 반포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서태후와 광서황제도 <예비 입헌사업 추진 9개년 준비 조칙(九年預備立憲逐年推行籌備事宜諭)>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73세 고령의 서태후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으며, 그녀의 죽음으로 개혁은 구심점을 잃고 내분에 휩싸여 방황하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살아서는 서쪽 죽어서는 동쪽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자안태후를 동태후라 하고 자희태후를 서태후라 한다. 이 두 황태후의 능은 모두 하북성 준화현(遵和縣)의 청동릉(淸東陵)에 동서로 배열되어 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동태후의 능이 서쪽에 있고 서태후의 능이 동쪽에 있다. 이에 관해서 민간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첫째, 능을 놓고 내기를 걸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동태후가 동쪽에 서태후가 서쪽에 묻혀야 했다. 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가 황후에서 태후로 승격된 동태후에 비해 지위가 한 단계 낮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 많은 서태후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동태후에게 능의 위치를 정하는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서태후는 자기가 동쪽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내기에서 동태후를 이길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동쪽의 능을 자기가 차지하였다고 한다.
둘째, 서태후가 동태후의 능을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어느날 서태후는 자기가 죽자 동태후가 자기를 서쪽에 묻게 지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서태후는 만약 동태후가 자기 보다 먼저 죽어서 자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된다면 동태후를 어디에 묻더라도 거역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태후는 계략을 꾸며 동태후를 살해한 후 그녀를 서쪽에 묻고 동쪽은 자기의 무덤으로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로 그칠 뿐 역사적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의 장례제도로 보나 이치상으로 보더라도 동태후가 서쪽에 묻히고 서태후가 동쪽에 묻히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동태후와 서태후의 명칭은 능의 위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생전에 살았던 처소의 위치로 정해진 것이었다. 자안태후는 생전에 자금성 내의 동쪽 종수궁(鍾粹宮)에 거처했기 때문에 동태후라 일컬었고, 자희태후는 서쪽 저수궁(儲秀宮)과 장춘궁(長春宮)에 거처했기 때문에 서태후라 일킬었던 것이다.
당시의 장례제도에 의하면 지위가 높고 지친인 사람의 능을 가운데 상전의 능에서 더 가까운 쪽에 놓았다. 강희황제의 경릉(景陵), 건륭황제의 유릉(裕陵), 도광황제의 모릉(慕陵) 지하궁에는 모두 많은 후궁들의 능이 함께 안장되어 있는데, 황후의 능을 황제의 왼쪽에 두고 후궁들은 순서대로 그 왼쪽이나 오른쪽에 두었다. 함풍황제의 정릉(定陵)은 서쪽에 있는데, 지위가 높은 동태후의 능은 당연히 정릉에서 가까운 쪽에 있어야 하고, 서태후의 능은 상대적으로 정릉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것은 동태후의 능이 서쪽에 서태후의 능이 동쪽에 위치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청대의 황제와 황후의 능에 나 있는 신도(神道)는 모두 신분이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자희릉의 신도는 자안릉의 신도로 연결되어 있고, 자안릉의 신도는 정릉의 신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릉의 신도는 효릉(孝陵: 순치황제)의 신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자안태후의 지위가 서태후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현존하는 청대 황궁의 기록과 관련 문서를 통해서도 애초에 능원을 조성할 때부터 동태후를 서쪽에 서태후를 동쪽에 두기로 확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태후의 능은 모두 정동릉(定東陵)이라 부른다. 자안릉은 보상욕(普祥峪)에 있고 자희릉은 보타욕(菩陀峪)에 있기 때문에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자안릉을 보상욕 정동릉, 자희릉을 보타욕 정동릉이라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