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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 MY BASEBALL
연습생에서 에이스까지 마운드 신화창조한 한용덕
한화에는 투타에 걸쳐 두 명의 신화적 존재가 있다. 먼저 잘 알려진대로 홈런왕 장종훈이 있고 마운드에는 한용덕이 있다. 야구 중퇴새에서 팀내 간판 에이스로 변모하기까지 특이한 인생역정을 겪어온 그가 올시즌 재도약을 위해 힘찬 기지개를 켜고 있다.
600만원짜리 연습생 출신의 신화를 아직도 기억하는가!한용덕의 손을 떠난 백구가 홈플레이트를 소용돌이치며 포수 미트로 빨려들어가는 순간 그는 더이상 어제의 연습생이 아니었다.
야구,뭣도 모르고 시작했다
대구에서 출생한 한용덕(33)은 대구 산격초등 1년때 대전으로 이사했다. 대전 대흥초등 3학년말 조회시간에 운동장에 줄서있다가 큰 키 탓에 야구부 감독 선생님 눈에 들어 방과후 공던지기 테스트까지 받았다.
흡족할 만하게 공을 던졌던 그에게 감독은 야구를 권했고 야구가 뭔지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한용덕은 그냥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당시 교감선생님께서 야구감독을 겸하고 계셨는데 마침 타학교 교감선생님으로 계셨던 한용덕의 큰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터라 계속되는 권유에 결국 유니폼을 받아들었다.
처음 시작할땐 키도 크고 모든게 그런대로 좋았는데 하다보니 영 키가 크지를 않는 것이었다. 한용덕은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다보니 눌려서 키가 안컸는지도 모른다고 하며 넘겨버리지만 당시에느 너무 작고 마른게 고민거리였다.
충남중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체격은 자고 왜소했지만 주전으로 시합도 자주 나갔고 전국대회 우승도 2개나 따냈다. 천안 북일고에 가서도 키는 여전히 작았다. 고2때까지 162cm에 47kg이었으니 체력적으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동아대시절 중도포기
초등학교때 투수로 야구를 시작한 한용덕은 충남중시절 유격수로 전환했고 북일고때까지 야수로 뛰었다. 고2때부터 왼쪽무릎이 아프기 시작해 기브스를 하고서 몇달 쉬었다가 기브스를 풀자마자 1년사이 키가 7~8cm씩 마구 커갔지만 워낙 체력이 따라주지 않다보니 정확한 포지션이 없이 여기저기로 밀리다가 벤치만 지키는 날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졸업이 닥치자 동기생인 오효근에 얹혀 동아대로 진학하느 수 밖에는 길이 없었다.
야구할 맛도 안났던 데다가 무릎이 자주 붓고 통증이 심해져 갔다. 병원에서는 관절염이라며 운동하는 것을 만류했었다. 아픈데다가 결정적으로 야구부 선배들의 집합이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대학만큼은 고교때와는 다르겠지 생각한 것이 완전히 빗나간 것.
1학년을 마친 뒤 대전집으로 상경, 신정 설을 세고 부산으로 돌아와 동계훈련에 들어갔는데 다시 다리가 붓기 시작하면서 운동을 못하게 되자 종지부를 찍을 결심을 굳혔다. 더하다가는 병신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는 한용덕은 모든 걸 정리해 보따리를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난리가 났다. 조용히 설까지 지내고 내려간 아들이 그동안 말한마디 없다가 갑작스레 서울로 올라와 야구를 그만뒀다고 하니 실망이 클 수밖에…. 3남1녀중 장남인 한용덕은 평소 모든 일을 알아서 잘 처리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크게 꾸짖을 수도 없으셨고 더구나 아프다고 하니 더이상 할 말씀이 없으셨다.
반은 백수생활, 반은 잡역부 생활
야구와 인연을 끊으면서 아예 학생신분마저 포기했다. 공부를 해서 진학한 것도 아니고 그동안 제대로 해놓은게 없다고 생각하니 따라갈 자신마저 없었기 때문. 뭔가 다른 방도를 찾기로 하고 일단 하는 일 없이 푹 쉬었다.
놀다보면 수가 나오겠지 했는데 점점 신물나도록 지겨움만 더해갔다. "젊은 놈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만 있으니까 부모님 보시기에도 안좋잖아요. 그래서 조금씩 막노동 같은 것도 해보고 대학다니는 친구들 따라다니면서 아르바이트식으로 이것저것 했죠. 직장도 좀 다녀보구요."
한용덕이 프로선수로 데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의 과거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거리로 떠올랐었는데 다소 크게 부풀려 와전된 부분도 없잖아 있다. 하여간에 전화가설공, 트럭조수, 공사판 막노동꾼 등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느낀건 적서에 안 맞는다라는 것이었고 그러던 중 어느덧 방위복무를 해야 할 시간이 닥쳐왔다.
'나도 할 수 있겠는데….'
방위복무를 마치고 하는일 없이 지내고 있던 중 야구했던 나이많은 선배가 직장야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냥 놀때니까 사람들도 여럿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구나 싶어서 제안을 받아들였고 정풍물산팀에서 다시 야구를 시작했지만 그 선배는 바로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고 한용덕도 아니다 싶어서 한두달간 해본 뒤 그만뒀다.
또다시 백수생활을 하던 중 하루는 야구장엘 놀러가게 됐다. 그동안 야구를 그만두고서 프로야구경기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을 정도로 야구를 멀리했었다. 프로선수라면 무지하게 잘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보고 나니 별로였다.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내가 해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투수는 초등학교때 해본게 전부였지만 프로는 여러명의 투수들이 같이 뛰니까 투수를 하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어 야구장을 찾았다. 한용덕이 천안 북일고 1년때 감독이었던 김영덕 감독이 여러선수들, 코치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니까 테스트 한 번 받아보고 싶다는 말을 할 용기가 선뜻 나질 않았다.
웬지 창피했다. 남들은 다 프로선수로 뛰고 있는데 계속 놀기만 하다가 다시 하겠다고 말하는게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발길을 되돌렸고 그렇게 며칠을 더했다.
그러던 중 이희수 코치를 만나게 됐는데 '지금 뭐하고 지내냐?'고 하길래 아무것도 하는 것 없다고 하자 농협팀 입단이 가능한지 알아봐주시겠다고 하셔서 일단 빙그레(前 한화의 전신)에서 배팅볼 투수를 하면서 일이 잘 성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87시즌이 끝나고 공개테스트에 앞서 김영덕 감독은 한용덕을 포함해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몇명을 데려다 놓고 테스트 기회를 줬다. 서너명이 테스트를 받았고 실력은 거기서 거기였지만 북일고시절 사제지간이었던게 있어서 그런지 김영덕 감독은 한용덕을 선택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정상정복
88년 계약금없이 연봉 600만원에 빙그레 선수가 됐다. 사실 프로에 와서 투수를 시작하기 전까지 투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셋포지션,와인드업 등 기본적인 것은 늘상 들어오던 것이라 알고 있었지만 세부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막히기 일쑤였다.
걸음마단계부터 한다는 각오로 2군에서 본격적인 피칭수업을 시작했다. 당시 이선희 투수코치가 2군 투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한용덕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지도했다. 그저 던질줄 밖에 몰랐던 그가 일취월장(日就月將) 해가고 있었던 것.
2군들은 정말 지독하게 연습했다. 저녁때 실내연습장에서 1군경기 라디오중계방송을 들으면서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하다가도 다시 연습에만 전념하며 나날이 눈을 떠가고 있었다. 야구가 무엇인지 알만해지자 어느덧 고참이 돼있었다. 뭘 모를땐 힘으로 밀어부치곤 했는데 눈을 뜨고 나니 이젠 힘으로만은 안된다는 사실도 깨달았고 요령껏 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고교때부터 관절염 증상으로 고생했던 한용덕은 방위복무를 끝내고서도 통증이 계속돼 다시 진찰을 받게 됐고 연골파열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동안 어처구니 없는 오진탓에 수술도 못받고 고생만 한 셈. 결국 수술을 받아 좋아지기는 했으나 아플땐 별 수 없었다. 김영덕 감독과 이선희 코치는 이런 사정을 알고서 그가 아플때 곁에서 가장 잘 챙겨준 고마운 분들이다.
한참 빝바닥부터 배워서 올라가는 것이 정석코스이지만 한용덕에게는 운이 따랐줬다. 프로에 와서 처음 투수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영덕 감독은 그를 키울 생각으로 일찌감치 마운드에 세웠다. 비록 패전처리용이었지만 2번의 기회에서 좋은 피칭을 보여줬고 다음에 바로 선발출장할 수 있느 기회까지 얻었다.
프로입단 첫선발출장에서 첫승을 따내는 순간 한용덕은 스스로를 꼬집어봤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이 안났다. 남들은 프로에서 첫승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들 하는데 이렇게 순탄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기에 얼떨떨하기만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엘리트로 성장해온 선수들이라면 이렇게까지 큰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아마시절엔 시합에도 제대로 못나가면서 야구가 진짜 힘들구나 느꼈는데 프로에서는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올라갔고 오히려 이것이 전진의 고삐를 늦출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됐다고 할 수 있다. 88년 2승1패 방어율 3.05의 성적으로 프로 첫해를 마감하면서 연봉도 100% 인상된 1,200만원을 받았다.
승승장구 중 닥친 불운
한용덕은 89년에 강순옥(30)씨와 웨딩마치를 올렸다. 85년 친구들끼리의 모임에서 만난 친구사이로 어느 한순간 애인사이로 발전했고 결혼에 골인해 이듬해에 아들 재형(8)군을 얻었다. 가정을 꾸리면서 안정된 생활분위기를 만들며 오로지 야구에만 저념하게 된 것.
89녀 거뒀떤 2승2패 1세이브 방어율 3.22의 성적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결과이지만 앞으로 10승대를 보장받을 수 있는 우완정통파 투수로 점찍힌다는건 기분좋은 일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90시즌부터 곧바로 시작됐다. 90년 13승(9패), 91년 17승(6패), 92년 9승(11패), 93년 10승(11패), 94년 16승(8패)의 성적은 더이상 구차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최우수 성적표이지만 두 번의 아쉬움이 얼룩져 있다.
첫째는 91년 17승을 거둘 때다. 여지껏 타이틀 한 번 제대로 따보지 못한 한용덕은 그당시 스스로 기회를 포기해 버린 점을 가장 아쉬워하고 있다. 해태 선동렬, 롯데 윤학길과 함께 다승왕 경쟁에 있던 한용덕은 다승뿐만 아니라 방어율 3위, 승률 2위를 기록하고 있던 중이었다.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라 등판기회가 많지 않았다. 똑같이 17승을 기록하던 차에 선동렬이 먼저 1승을 보탬으로써 18승이 됐고 뒤이어 1승을 보탠다고 해도 결국 선동렬에게 타이틀을 내주고 말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자진해서 등판포기의사를 밝혔다. 스스로 선택한 이 결정이 오늘날까지 아쉬움으로 남게 될 줄은 몰랐던게다. 한용덕은 그 해 한·일 슈퍼게임에 참가, 나름대로 야구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두번째는 아쉬움이라기보다 고통스러움이 더 크다. 94년 16승을 올리며 한창 주가가 막 오를때 교통사고를 입고 만 것. 타박상 정도 입었다고는 하지만 후유증이 컸고 무엇보다 아내와 아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들 재형이는 허벅지 골정상을 입었고, 아내는 온몸에 중상을 입었다.
내몸 아픈 것보다 가정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집안이 제대로 안돌아가다보니 인상쓰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그라운드에 나가 갑자기 바꾼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인 강순옥씨가 지난 겨울 세번째 무릎수술을 받기전까지 2년동안 야구에 제대로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95년 8승(13패), 96년 8승(8패)로 승수가 94년보다 반수나 줄어들었고 작년같은 경우는 준플레이오프에서 패전처리로 등판, 자존심까지 상해야만 했다. 그동안 야구를 해왔던 것에 대해 회의감마저 들 정도였다.
통산 100승 달성을 목표로 뛴다
올해로 프로에 데뷔한지 10년째 되는 한용덕은 88년부터 96년까지 통산 85승69패 방어율 3.02를 기록했다. 100승에서 꼭 15승이 남았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 투수진을 보유한 한화에 속해 있다보니 시즌초에는 선발출장도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지나 등판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100승에 근접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1년내내 아픈데 없이 몸건강히 좋은 플레이를 보여줄 것을 약속하며 작년에 꺾였던 자존심도 회복할 계획이다.
아내가 세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고 이제서야 좀 괜찮아져 마음고생을 서서히 털어낼 수 있게 된 한용덕은 올봄 집단장을 화사하게 한 것처럼 밝고 새로운 마음으로 올시즌 최고참 투수의 건재함을 과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