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 심순화 카타리나
주님께 소중한 소명을 받은 엄마·아빠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결혼을 합니다. 하느님이 맺어 주신 인연이니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만남입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을 나누고, 엄마는 아이를 뱃속에 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뱃속에 있는 동안 아빠의 사랑과 영양분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아이와 나눕니다.
그리고 부부는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참 기쁨과 신비로움을 느낍니다. 주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아이가 웃으면 엄마·아빠도 웃고, 아이가 아프면 엄마·아빠도 아픕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더 좋은 옷을 입히고, 저 좋은 것을 먹이고, 더 좋은 유치원·학원·학교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힘든 고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니 엄마·아빠의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아이가 성장합니다.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엄마·아빠는 ‘사랑해!’라는 말 대신 ‘공부해!’라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됩니다.
아이는 웃음 대신 방문을 ‘꽝’ 닫고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와 우리 모두의 가정을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완전한 사랑의 일치에 초대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의 사랑 중에 예수님의 사랑과 가장 닮은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처음으로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빠·엄마는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이가 청소년이 되어 가족 간의 대화가 점점 사라져 갈 때 더 많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에는 어떤 부족함이 있을까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들려주신 39개의 비유 중에서 11개가 재물에 대한 경고입니다. 실질적으로 재물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지칠 줄 모릅니다.
이러한 욕망은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더 멋진 일을 하며 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공부해’라는 말을 쉼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일 미사보다 학원에 가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과 청소년 주일인 오늘,
청소년들이 참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가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 즉,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사제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자 모두는 주님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심에 감사하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답합니다. 복음 선포란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눌 수 있는 이는 엄마·아빠입니다.
자녀에 대한 욕심을 조금 더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자녀와 더 나눌 수 있습니다.
나와 내 자녀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
우리 가정이 성삼위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에 동참하게 됩니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께서는 위로자 성령과 함께, 이 소중한 소명을 부여받은
엄마·아빠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해 주십니다. 아멘
글 : 김형성 시몬 신부 – 전주교구
원죄라는 비밀
“우리가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고? 나랑 다른 민족인 유대인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해?”
원죄’라는 단어 앞에 아마 한 번 이상 가졌던 의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죄와 관련된 초기 교부들의 논쟁은 치열했었죠.
이 때문에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펠라기우스 등 쟁쟁한 신학자들이
결국 이단으로 규정돼 교회에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원죄를 인간의 욕망과 관련지어 신학 이론을 집대성한 후,
교회의 이론가들이 육체적인 본능과 감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합리하게 사는
인간의 삶을 원조와 연결시키면서, 신학적으로 큰 분수령을 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죄의 자구적 의미에만 매달린 탓에,
유아 세례를 비처 받지 못한 채 죽은 영아들이 원죄를 씻지 않았으니,
천국은 물론 묘지에도 묻힐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로 인해 부모의 마음이 더욱 찢어지는 슬픈 장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결국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원죄와
관련한 신학이론의 양과 깊이가 워낙 광활하기 때문에 짧은 지면에서 신학적 논쟁에
관한 말을 섣불리 언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원죄를 연결시키는 것도 의미 있는 신학적 태도이겠지만,
일반 신자로서는 원죄 이론을 아벨을 죽인 카인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오히려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아벨은 죽고 카인의 후예가 결국 지구에 남은 것이라면,
리 모두는 살인자의 후예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신화시대 성경인 창세기의 사건들에는 기록된 사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독법보다는 상징적인 해석이 꼭 필요합니다.
카인이 하느님에게 온전한 제물을 바치지 않은 채, 하느님께 제일 좋은 것을 바친
아벨을 질투해 죽인 상황은, 좋은 복은 남과 나누지 못하고 오히려 복 없는 이들을
알게 모르게 박해하거나 잊어버리는 우리의 태도와 많이 비슷해 보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은 당연히 내가 잘했기 때문이고,
내가 겪어야 하는 불운에 내 책임은 없다는 식의 아전인수 격 생각 말이지요.
그래서 카인 같은 죄인들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죄 없이 병을 앓거나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 이유 없이 전쟁터에서
또는 작업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이들이 끔찍하게 고통 받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소소하고 불필요한 욕심 탓에 비본질적인 일에
집착하고 일이 내 맘대로 풀리지 않으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남 탓만 하고 있지는 않았었는지 반성해 봅니다. 원죄라는 개념은 그럴 때,
내 죄와 불행의 근원을 알려 주기 위한 심리적, 철학적 장치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행복에는 감사하지 못하고, 타인의 불행을 미리 막지 못한 죄,
타인의 아픔에 눈 감은 죄,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게으름과 이기심,
바로 그런 부족함의 근원으로서 원죄는 죽을 때까지 잊지 말고 챙겨 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이나미 리드비나 교수 / 서울대학교 병원 정신건강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