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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2 - 왕궁과 해양박물관에서 모나코공과 박주영에 해적 알리를 떠올리다!
지중해안 니스 Nice Ville 역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30분을
달려 모나코 Monaco : Monte Carlo 에 내려서 밖으로 나와 이틀전에 이 도시에서
열린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 사진이며 도로 양쪽에 쳐진 방벽과 관람대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언덕길을 20여분을 걸어 올라가서 왕궁 모나코 대공 궁전 Palais du Princier 을
보면서 1956년 모나코 왕 레니에 3세와 결혼한 히치콕 감독의 “다이알 M 을 돌려라”
에서 주연배우를 맡았던 미국의 영화 배우 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 를 회상하고는
아래쪽에 자리한 대성당 Cathedrale de Monaco 을 구경하고는 아래쪽 정원으로 내려갑니다.
나무와 꽃도 많을 뿐더러 조각이 많아 구경하며 쉴만한데... 모나코 는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이탈리아에 가까운 인구 3만의 소국으로 카지노, 우표산업,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와 해양박물관 에 요트 가 유명한데 1,956년 허리우드 영화 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대공 레니에 3세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 앨버트 공 입니다.
그는 2005년 부터 모나코를 통치하면서 총각으로 숱한 염문 을 뿌리다가 2010년에
세계 수영 선수권 금메달 리스트 인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20살 이상 연하의
샬린 윗스톡 과 약혼후 다음해 2011년에 결혼함으로써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자메이카 선수 들의 얘기로도 유명한 봅슬레이팀 선수 로 동계 올림픽에 5회 출전하기도 했던
왕은 2009년에는 남아공 탐험가 마이크 혼 에 가아드 등과 함께 남극 탐험 에 도전합니다.
마침내 남극점 등정 에 성공하고는 모나코 공국 국기 를 펼쳐들고 있는 모습이 전세계로
타전되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도 있으며.... 또 2,008년 부터 프랑스 1부 리그
AS 모나코 팀 에서 뛰던 박주영 은 3년간 91경기에 출장하여 26골을 기록함으로써
모나코 공주가 경기를 응원 했으니 모나코에서 10년간 장기체류 자격을 부여 받았습니다.
박주영은 마음만 먹으면 나이를 넘겨 병역을 면제 받을수가 있게 되었는데.... 36~7세는
공익근무, 38세 부터는 병역면제 를 받으니 유럽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입영을
연기 하면 되는 것이라! 그런데 2010년 여름에 모나코팀이 2부리그로 강등 되면서
박주영은 영국 아스널로 이적 하니 장기체류 문제가 불투명해져 병역 문제 가 대두됩니다.
아스널은 명문팀이라 쟁쟁한 선수들에 밀려 벤치를 지키다 스페인 셀타 비고팀 과 잉글랜드
챔피언쉽 왓포드로 임대 선수 생활을 하는 수모를 당하는데... 이 무렵 2010년 홍명보
감독의 부름으로 23세 이하 광저우 아시아경기 대회에 와일드 카드 로 출전하였으나
3위전 으로 밀려나 이란과 대결하자 선수들은 우승에서 멀어짐으로써 동기를 상실합니다.
한국팀은 의기소침해 전반전을 0:2 로 마쳤으나, 죽자고 뛰었던 박주영은 포기하지 않고는
쉬는 시간에 후배들을 격분 시켜서는 후반에서 4골을 넣어 4:3 으로 이겼으며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대망의 동메달 을 확보하여 병역을 면제 받은 일이 떠오릅니다.
2006년 독일 원드컵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에서는 나이지리아 전에서 프리킥을 성공 시켜 16강의 위업 을 달성합니다.
그런데 현재 AS 모나코 축구팀의 구단주 는 칼리 광산으로 한때 세계 79위 부호에
오른 러시아의 거부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 씨인데 스위스 법원에서
이혼 위자료 로 전처 엘레나씨에게 "4조 6천억원" 이라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천문학적인 돈을 주라고 판결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레나의 딸 에카테리나 는 1968년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이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 결혼식을 올렸던 지중해 스코르피오스섬 을
1억유로(1,450억원) 에 사들였다고 하는데...... MS 회장 빌게이츠 가 저
섬을 살려고 무진애를 썼다가 실패하고 결국에는 러시아 여성의 소유 가 되었네요?
유럽의 소국으로는 여기 모나코 외에도 바티칸, 룩셈부르크, 시칠리아 남쪽 몰타,
이탈리아 동부의 산마리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사이에 리히텐슈타인에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안도라 가 있는데 나는 그 7개 나라 중에서
다섯 나라는 여행 했으나..... 몰타와 안도라 는 아직 가보지 못한게 아쉽습니다!
헤라클레스가 도시를 건설했다는 전설을 지닌 모나코 는 일찍이 BC 10세기에 페니키아인 이
상륙한데 이어 그리스, 카르타고를 거쳐 BC 2세기에는 로마로 주인이 바뀌는데 7세기에
게르만 이주자 롬바르디아령이 되었다가 200년간 지중해를 제패한 이슬람 사라센인 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10세기에는 지중해 동쪽 제노바의 명문 그리말디가 의 통치하에 들어갑니다.
그후 에스파냐 지배를 거쳐서 1641년 프랑스 보호령 이 된후에 1815년 빈 회의에서
이탈리아 사르데냐 왕의 보호국 이 되었지만... 1848년에 영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일부 영토는 프랑스로 귀속 되고 나머지 축소된 영토는
1861년 사르데냐의 속박에서 벗어나 프랑스 보호하 독립국 모나코 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나코 는 바티칸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작은 면적을 가지고 있지만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세금이 없는 천국" 이니 세계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한 몬테카를로
카지노 수입등이 엄청나다 보니 국민소득이 무려 17만불 에 달해 "세계 1위" 라고 합니다.
모나코의 자랑 해양박물관 수족관 Musee Oceanographique et Aquarium 은 1910년
에 해양학자였던 알베르 1세 국왕 이 창건했다는데.... 그는 모나코 대공이
된 후에 모나코 헌법을 제정하기도 했으며 생물학자 였던 탓인지 그런
와중에 이런 세계적인 해양박물관 을 만들어 모나코의 이미지를 높였던 것이네요?
바닷가 절벽 위 85미터의 석조 건물 안에 2층에는 알베르 1세가 사용했던 해양조사선 과
해양 및 수산 관측장비를 전시하고 있으며, 1층에는 북극곰과 에스키모인에 심해어 등
각종 희귀생물과 대왕 오징어등의 바다 생물 및 해양 동식물의 표본 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인 수족관 은 건물 지하에 있는데.... 색깔이 화려한 쏠배 감팽, 클라운
피쉬에 젤리 피쉬등 열대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각종 희귀한 어종까지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으며 또 배와 바다 동식물에 물고기 외에도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에 나올법한 바다 탐사 캡슐등을 갖추고 있는등 학습시설 이 풍부한 해양박물관 입니다.
해양박물관을 나와서 절벽 아래에 바다를 내려다 보다가 꽃과 조각이 어우러진 공원으로
조성된 언덕을 걸어 내려오면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이슬람 사라센 해적" 이니...
1562년 이슬람 사라센의 해적 "울루치 알리" 는 갤리선 7척을 이끌고 북아프리카
에서 곧장 지중해를 북상해 제노바의 영역인 이탈리아 북부 해안 도시들을 약탈 합니다.
그러던중 북 이탈리아 토리노에 수도를 둔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왕을 배출하게 되는 사보이 공국 의 공작 일행에 관한 정보를 듣게 되는데...
공작이 프랑스 공주인 부인과 모나코의 빌라프랑카항 에 있는 성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라?
울루치 알리의 이슬람 베르베르인 해적 들이 항구에 상륙 하니 용감한 공작은 보병 300명
에 소총수 25명과 가신단 100명을 지휘하여 전투에 임하나 해적들에게 패배 합니다.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은 천년전인 642년에 이집트를 정복하고 북아프리카를 서진해
698년 카르타고를 함락한후 710년에는 스페인에 상륙해 이슬람 국가 를 세웠는데
이미 652년에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를 습격했던 사라센인들은 727년이 되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827년 부터 1072년 까지 250년간 시칠리아를 지배 했던 것입니다.
800년대 부터 이탈리아 해안을 노략질하기 시작해서 로마를 공격했던 이슬람 해적 들은
마르세이유와 칸느 사이에 생트로페 를 점령해 해적기지 로 삼았으며 이탈리아등
서부 지중해를 유린하던중 16세기에 이슬람 해적들의 양대 기지는 알제와 튀니스
인데 이탈리아를 습격하는 이슬람 해적들이 출항하는 기지는 튀니지의 튀니스 였습니다.
해서 교황청의 주장대로 신성 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왕 카를 5세 는 1635년 신성동맹
에 참가하니 에스파냐 40척등 모두 91척 3만명에 달하는 대함대 가 조직되었으니
신성동맹의 해군은 스페인의 용병으로 19척의 함대를 이끌고 참전한 제노바의
안드레아 도리아 가 맡고 육군은 황제가 파견한 이탈리아 사령관 알폰소 다바로소 였습니다.
이슬람 튀니지 지배자는 해적 바르바로사 였으니 카르타고 인근에 축성된 이슬람군 요새
골레타곶에서 황제가 보는 가운데 전투가 벌어졌는데 골레타곶 요새의 방어 책임자는
해적 유대인 시남 이고 튀니스 성채 대장도 역시 해적 하산 아가 였으니 이들은 해적
총두목 바르바로사 가 도처의 해적에게 해적질을 멈추게 하고 튀니스로 소집했던 것입니다.
신성동맹 기독교군은 포격 사이 틈을 이용해 배를 상륙시키고 대포를 발사해 결국 요새를
함락하니 투르크군이 주력인 이슬람군 6천명은 모두 전사 했지만... 해적들은
도망쳐서는 튀니스성 에서 공방전 을 벌이는데 바르바로사가 동굴에 숨긴 기독교도
노예 1만여명이 해방되어 몰타 기사의 인솔로 배후를 습격하자 결국 성은 함락 됩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는 서쪽 알제로 도망쳤으며 유대인 시남은 튀니지와 리비아 국경에 해적
소굴이자 본거지인 제르바섬으로 달아났는데 이후 시남 은 홍해 입구에 포진해 동
인도항로 발견후 금을 싣고 후추등 향로를 사러 인도로 가는 포르투칼 배 들을 나포 합니다.
그러자 포르투칼도 함대를 아덴만에 정박 시킨후 인도로 가는 아랍 상선들을 격침
시키고 유럽에 오는 "향료를 포르투칼 배들이 독점" 하여 값을 올리는데...
터키 술탄의 명을 받은 바르바로사 는 ,537년 100척 갤리선을 동원해 4천명 해적을
이탈리아 남동부에 풀리아 지방의 카스트로 에 상륙시켜 약탈한후 기지를 건설 합니다.
스페인이 이단과 마녀 재판 에 열중하고 있던 이 무렵 바오로 3세 교황하의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젊은 시절에 천지창조를 그렸던
미켈란젤로 가 60세 나이에 이르러 “최후의 심판” 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1453년에 이슬람 오스만 터키 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해 동로마(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
발칸을 점령한후 헝가리를 거쳐 1529년에는 오스트리아 빈 성벽에 육박 했는데...
이탈리아 땅에 이슬람군의 기지 가 건설된데 위기를 느낀 교황의 제창 으로 1538년
기독교 함대 가 결성되니 코르푸에 집결한 갤리선은 159척에 3만 7천명의 대군 이었습니다.
베네치아 82척, 교황청 36척에다가 6개월이나 지각해 에스파냐 배 41척을 이끌고 나타난
제노바의 안드레아 도리아 는 계절이 가을이니 태풍 위험 때문에 출전을 거부 하는데
총사령관인 도리아는 북아프리카 알제의 해적 소탕에 우선 순위 를 두는 에스파냐
왕의 밀명을 받은지라 기독교 함대에 얼굴만 세우고는 전투는 회피할 속셈 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네치아군 사령관 카펠로가 전투를 주장 하자 교황군 그리마니가 동조하고 나폴리
부왕 곤차가마저 합세하는지라 도리아도 할수없이 출항하는데, 9월 25일 기독교 함대는
그리스 서북부 코르푸를 출발 남하해서는 터키군 바르바로사가 지휘하는 160척의
함대가 머무는 그리스 프레베자항 을 지나 남하하니... 프레베자 해전 이라고 불립니다!
이에 바르바로사의 오스만 투르크(터키) 함대가 추격하니 전위는 해적 투르구트 가 이끄는데
그 최선봉 은 바로 24년후 여기 사보이 공국의 모나코를 습격 하는 "울루치 알리" 였습니다.
도리아가 마지못해 전투진형으로 바꿀때 풍향 때문에 베네치아 범선이 고립되어 터키군의
공격을 받아도 도리아는 전투명령을 내리지 않자.... 참지 못한 베네치아 갤리선
2척이 적진에 돌격해 장렬히 산화 하는데 그때 도리아가 느닷없이 "후퇴명령" 을 내립니다?
스페인(제노바) 함대는 북쪽으로 도망치고 이에 교황청 함대가 뒤따르자
베네치아군 혼자 적을 상대하기는 중과부적 이라 어쩔수 없이 물러나는데....
이 "기묘한 패전" 후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1세 (독일왕 카를5세 황제) 는 전부터 계획대로
1540년 1만 3천명의 노잡이와 선원을 태운 65척의 갤리선과 수송선 100척에 2만 2천명
의 병사를 태운 독일과 이탈리아 - 스페인군은 북아프리카 알제 동쪽 해안에 상륙 시킵니다.
하지만 태풍 으로 궂은 날씨는 상륙군의 보급을 불가능 하게 만들자 기독교군은 알제성을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철수하니 150척의 배와 병사등 1만명을 잃는 수모를
당했는데 아들 스페인왕 펠리페 2세 는 1560년에 다시 갤리선 53척에 14,000 명의
병사로 해적 울루치 알리 의 상관인 투르구트가 지키는 리비아의 트리폴리 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늦가을인지라 함대는 태풍에 밀려 튀니지와의 국경 부근인 알칸타라에 상륙하지만
그래도 스페인군은 진열을 정비해 동쪽 트리폴리로 진격 하는데... 하지만 이슬람
베르베르인의 습격 에다가 오염된 물로 환자가 급증 하여 진군이 더디자 총사령관
메디나 코엘리는 트리폴리 공격을 포기 하고는 인근의 해적 소굴 제르바섬을 공격 합니다.
스페인군이 해적들의 소굴 이었던 제르바섬을 점령 하고 요새를 보강하는 사이에
터키 본국에서 피알레 파샤가 80척의 함대 를 인솔해왔으니 바로
저 울루치 알리 는 20척의 함대 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항구를 공격 했던 것입니다!
카를로스에 의해 총사령관에 임명된 메디나 코엘리 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터키 함대가 쇄도하여 기독교 군대를 전멸 시키니
이후 "지중해는 이슬람의 바다" 가 되고 유럽인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던 것이네요?
지중해가 유럽 기독교세계의 바다 로 회복되는 것은 1565년 터키 함대가 몰타섬
공격에 실패하면서 투르구트가 전사 하고 6년후 베네치아와
이탈리아 및 스페인 함대가 총 집결한 1571년 그리스 레판토 해전 승리 이후라!!!
1571년 키프로스섬이 함락 되자 기독교군은 갤리선 208척등 310척 배에 노잡이 까지 모두
8만명을 출전시키고, 터키군도 갤리선 210척등 270척 에 7만 5천명을 동원합니다!
1571년 레판토 해전 에서 기독교 함대의 좌익을 맡은 베네치아 해군 의 대활약 으로
터키 우익 함선들을 격파하고 이어 터키 중앙의 후미를 포위해 대승을 거둡니다.
전투는 터키군의 좌익 93척 함대의 대장 울루치 알리 는 제노바의 도리아가 포위를
위해 우회전한 빈 틈을 이용해 중앙군의 스페인과 몰타의 배들을 격침
시키고 달려드는 베네치아 함대를 격파 하는 동안에 터키군 좌익과 중앙군이 패합니다.
그러자 알리 는 남쪽으로 빠져서는 수중에 남은 30척의 함선을 이끌고 코스탄티니에
(이스탄불) 로 도망치는데..... 알제 총독이던 울루치 알리 는
오스만 투르크의 이스탄불로 귀환한 다음해에는 142척의 터키 함대를 재건 하게 됩니다.
142척의 함대를 재건 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 배를 부릴 해적들이 레판토 해전에서
모두 전사한 탓에..... 유능한 선원이 부족해 이후 먼 바다로
나갈수 없었으니.... 지중해는 비로소 "유럽 기독교도들의 바다" 가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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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봤습니다
모나코! 언제 가도 좋은
볼거리가 많은 도시린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