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m.dcinside.com/board/napolitan/49194
[1]
별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 2시.
나는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를 켜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딩동ㅡ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인터폰 화면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종교 권유라기에는 복장이 지나치게 단정했고, 방문 판매 영업사원이라기에는 표정이 너무 건조했다.
나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동의 사항 이행하러 왔습니다."
문 밖의 남자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지만,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거실로 직진했다.
"잠깐만요, 당신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니, 내 말을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남자는 익숙한 듯 현관 옆에 놓인 공구 박스에서 전동 드라이버를 꺼내더니, 벽걸이 TV의 나사를 능숙하게 풀기 시작했다.
"저기요, 미쳤어요?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내가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 하자,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고하셔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남자는 TV를 떼어 바닥에 내려놓더니,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내 필체로 적힌 친필 서명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미래의 당신이 동의하셨습니다."
"미래? 무슨 헛소리야. 난 이런 거 서명한 적 없어!"
"미래의 당신이 한 것이니까요. 지금의 당신은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합니다."
남자는 거대한 TV를 옆구리에 끼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덧붙였다.
"미래의 당신은 지금 이 상황에서 당신이 화를 내기보다, 잠시 산책을 나가는 쪽으로 이미 동의하셨습니다."
탁.
문이 닫혔다.
거실 벽에는 TV가 있던 자리에 흉측한 나사 구멍 네 개만 남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112를 누르는 손가락이 마구 떨렸다.
[2]
출동한 경찰의 태도는 정말 황당했다.
경찰은 마치 떼쓰는 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진정하시고요. 여기 전산에 다 나옵니다. 본인이 동의하신 거라니까요."
"아니, 내가 언제요!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다고요!"
나의 반박에 경찰은 귀찮다는 듯 무언가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그곳엔 아까 그 남자가 보여준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동의서가 떠 있었다.
"미래의 본인이 동의하셨다는데 저희가 뭘 어쩌겠습니까? 이런 걸로 저희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 주시죠."
경찰은 오히려 내가 허위 신고를 해서 업무를 방해한다는 듯한 뉘앙스로 혀를 끌끌 차며 현관문을 나섰다.
며칠 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변호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내 설명을 들은 그의 반응은 경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건... 방법이 없겠는데요."
"방법이 없다고요? 제 허락도 없이 물건을 가져갔는데."
변호사는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법률적으로 면밀히 검토해 봤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이미 동의한 내용이기에,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더 항의하시면 계약 위반으로 더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이실 수도 있어요."
"미래의 내가 동의했다는 게 도대체 뭡니까? 아니, 애초에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구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받아들이시죠. 아, 미래의 당신이 지금 이 상담도 '적당히 마무리하고 귀가하는 것'으로 동의하셨다고 나오네요. 상담료는 자동 결제될 겁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핸드폰에 결제 알림이 떴다.
[3]
그날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망가져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건 따위가 사라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골 식당에 앉아 주문한 돈가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직원이 쟁반을 들고 오더니, 내 앞에 놓으려던 접시를 휙 낚아채, 옆 테이블의 낯선 남자에게 건넸다.
"저기요, 그거 제 음식인데요?"
당황한 나에게 직원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래의 당신이 오늘 점심은 굶기로 동의하셨습니다."
내가 버럭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숟가락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그들의 눈빛에는 마치 못 볼 꼴이라도 본 듯한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
한 노인이 혀를 차며 한마디 거들었다.
"쯧쯧, 젊은 사람이 왜 저렇게 품위가 없어. 공공장소에서 계약 위반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역겨운 시선들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식당을 뛰쳐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현관문을 잠그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소파 따위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취소야! 전부 취소라고! 취소든 철회든 해지든 뭐든 좋아! 나 좀 내버려 두라고. 제발!"
그때, 현관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들어왔는지 처음 TV를 가져갔던 그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사무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미 미래의 당신이 '과거의 내가 동의를 취소하려 해도 무시하라'는 조항에 동의하셨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의 뒤에는 마치 집을 구경하러 온 듯한 낯선 부부가 서 있었다.
"미래의 당신이 동의하셨습니다. 이제 이 집도, 저희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만 나가주시죠."
[4]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집 밖으로 내쫓겼다.
슬리퍼조차 신지 못한 맨발이었지만 그 누구도 나를 동정하지 않았다.
길을 지나는 행인들은 마치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나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미래의 나'라는 말 같지도 않은 존재 때문에 타인에게 넘어갔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검정색 트레이닝 바지와 반팔 티셔츠 하나 뿐이었다.
공원 벤치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 누군가가 멈춰섰다.
"많이 힘드시죠?"
고개를 들어보니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 옆에 자연스럽게 앉더니,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무릎 위에 펼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또 뭘 가져가려고요. 나한테 남은 게... 대체 뭐가 있다고."
그녀는 대답 대신 서류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가져가는 게 아니에요. 확인시키는 거지."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서류를 쳐다보았다.
서류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그저 빈 A4 용지였다.
“…이게 뭐에요?”
“최종 동의서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내용이 필요 없으니까요.”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서류를 내려다봤다.
“서명은요?”
그녀가 미소지었다.
“이미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종이를 자세히 봐도,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문득 서명한 기억만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
첫댓글 가져가는거만되나 비트코인규매에 동의 이런거해줘
머...머지..? 결말은 이해못하게ㅡㅓ
제미나이한테 해석해 달랬는데도 모르것다...
백지에 서명을 했고 저 사람들이 아무 내용이나 넣어서 계약이랍시고 실행시키고 있는건가?
마지막에 저 미래의 화자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물건과 집을 가져오는 건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네
뭐지
과거에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해주겠지~’하며 대충 막 산 댓가를 받는거 아닌가…? TV도 도파민에 절어 살다가 ‘언젠가는 미래의 내가 정신차리고 끊어내겠지’하고 다짐하고… 점심도 평소보다 과식하고 ‘내일 점심은 굶지뭐’ 이렇게 미래의 나한테 책임을 미뤄둔 댓가라고 생각했는데 ㅋㅋㅋ
1,2있다 진짜로
오 맞는 것 같아!
실제로 미래의 내가 서명한건지는 모르는거네? 미래의 내가 했다고했는데 계약서는 비어있고.. 미래의 나도 그냥 지금 나처럼 미래의 내가 서명했다는 내용으로 계속 당하던거 아녀? 머리아프누
집도 가구도 아무것도 없는 저 상태에서 결국 저사람은 과거의 자신한테서 집을 가져오는걸로 계약이 되어있고... 그럼 1로 돌아가서 과거의 화자는 다시 미래의 나한테 의식주를 빼앗길테고....... 다른 여시들이 달아준 댓글처럼 과거에 방탕하게 살면서 미래에 짐을 지우느라 벌을받고 무한 루프에빠진 그런 교훈의 괴담류로 해석하면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