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le Running, 그리고 와인쿨러
‘Idle running’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 ‘게으른 달리기’였다. idle은 ‘게으른’이라는
뜻의 형용사, running은 ‘달리기’. 얼핏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 같지만, 기계의 세계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바로 ‘무부하 운전’, 쉽게 말해 일은 하지 않으면서 돌아가기만 하는 상태다.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다 빨간불 앞에 멈춰 설 때, 엔진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숨은 쉬지만 움직이지 않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도 연료를 태우며 계속 돌아간다. 이 공회전은 필요도 없는 연료를 소비하고, 쓸모없는
이산화탄소를 공중으로 내뿜는다. 그 탄소가 쌓여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대기권 밖의 오존층을 갉아먹는다.
강렬해진 햇빛 아래 우리의 피부는 점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피부암의 위험도 높아진다.
요즘 내 집에서도 공회전 중인 기계가 하나 있다. 김치냉장고 옆에 있는 와인쿨러, 바로 그놈이다. 원래는 내가
아끼는 와인 몇 병을 차분히 보관해주던 충직한 녀석이었는데, 요즘은 텅 빈 속을 차갑게 유지하느라 하루 종일
idle running 중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막내아들이 내 차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차가 없으니 코스트코에도 갈
수 없고, 와인을 채울 길도 없다. 동네 상가에도 와인이 있긴 하다. 하지만 내가 즐기는 브랜드는 없고, 가격도
만만치 않다. 코스트코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고를 수 있어서 나는 늘 그곳을 찾는다.
텅 빈 와인쿨러는 마치 할 일을 잃은 직장인처럼, 에너지만 소비한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환경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다. 와인도 없고, 쿨러도 지쳐 보이고, 나 역시 뭔가 허전하다.
이번 주말엔 아들 녀석을 불러야겠다. “코스트코 한 번 다녀오자.” 그 한마디면 이 모든 idle running이 멈출지도
모른다. 냉장고 속 와인이 다시 채워지고, 쿨러는 제 역할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다시, 평소처럼 저녁 식사
후 좋아하는 와인을 한 잔 따를 수 있겠지.
가끔은 아주 사소한 일들이 나비효과처럼 우리 일상에 영향을 준다. idle running처럼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도,
잘 들여다보면 삶의 리듬과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이 작은 기계가 다시 유용하게
\일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내 일상이 다시 따뜻하게 돌아가도록, 주말엔 꼭 코스트코에 다녀와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