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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대 헬라스 인
둘 >>>
그리스 아테네인들이 천재적인 머리를 가져서 라기보다는 척박한 자연환경에 머무르지 않고 주변 국가들과의 교역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교류를 통해 끝없는 도전정신을 가꾸어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자신의 존재를 극복하려는 극기의 현장이라 하겠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담보한 치열한 교역과 에게 해(Aegean Sea) 주변 연안으로의 이민과도 같은 제2의 고향을 건설해 낸 그들의 집념은 자연 극복의 인간사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력으로 이룩해냈다는 관점이야말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척박한 세상을 원망하며 내부에서 분란이나 일으켜가며 이전투구 식으로 엄벙덤벙 살아가지 않는 마음가짐이야 말로 진정한 삶의 본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가 건설한 식민도시들이 모두 내륙 깊숙한 곳이 아닌 연안에 분포했다는 것에서도 우리는 그들의 도전정신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해적이 출몰하는 연안지역은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황무지나 다름없이 버려진 터전이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끝없이 파고드는 그들의 끈질긴 집념의 성취로 에게 해를 자신들의 바다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도전정신이 고전주의로 나아가는 발효제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의 결실은 정치 경제 철학 과학 예술 등 모든 사회적 분야를 탐구해 무수한 원리와 규범을 규준으로 창조해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창조물들이 그들 헬라스 사람들의 이성적(理性的) 세계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쩌면 그리스 고전주의는 그리스 자연주의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 이성이 합해지며 총체적 질서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으며 중동 고유의 가치와 서양 고유의 문명이 함께 섞이면서 일구어낸 그들의 노력에 고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여기저기 분포된 도시 국가들의 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아테네는 모범적인 도시국가였습니다. 고전주의는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서 발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헬라스 인들에게 아테네는 영원한 모범이자 학교였으며 창조의 원천이었습니다.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그들의 영토는 소아시아 연안지역을 포함하여 이탈리아 남부까지 에게 해를 중심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에게 해는 그들에게 외부 세계를 향한 물길이었으며 교역로이자 삶의 터전이었으며 척박한 고향을 벗어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자연으로서의 에게 해는 그들에게 다리가 되어주었고 짐꾼이 되어주었고 육지로의 어려운 고행 길을 바닷가 내어줌으로써 손쉽고도 편안하며 신속하게 모든 것이 교역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올리브유와 포도주는 그들의 주요 수출 품목이었습니다.
해양에서의 죽음을 건 교역을 거듭하며 텅 빈 배 속을 황금으로 채워 고향으로 귀향했습니다. 바다에서 뱃길로 벌어들인 보물을 그들은 또다시 육지에서 다시 보물로 재생시키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그것은 바다를 통한 깨달음의 도전 정신이 육지에서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도전하는 도전정신에서 나오는 끝없는 화수분(河水盆)이며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이자 건강한 삶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건전한 도전정신이 또 다시 자연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해내는 능력으로 화려하게 재탄생했던 것입니다. 뱃사람에게 나약함은 바로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을 뿐 그 어떤 동정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그 또한 수많은 위험을 내포한 항해의 뱃길이기도 했습니다. 밝은 태양과 드넓고 푸르른 바다의 아름다움만이 전부가 아니었으며 칠흑같이 어두운 뱃길에서 궁극적인 인간 삶의 허망함에 대해서도 그들은 체험으로 깨달아야 했습니다. 돈을 벌어 부를 쌓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이 시험하는 운명의 시련에 순종해야만 하는 겸허를 그들은 바다로부터 배워왔습니다. 도전과 절제와 자유로움이 뱃길에서 배워온 그들의 교훈이었습니다.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연안 도시국가들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까지 그들은 에게 해의 이점을 최대로 살려내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바다와 배와 무역상과 교역이라는 생명을 담보로 먹고살기에 도전하며 시작된 그들의 삶의 활동성은 부의 만족으로 그칠 만큼 안일하지가 않았습니다. 노로 바다를 평정해온 그들에게 세상은 거칠 것이 없었으며 그 당시 지금의 서구 유럽은 밀림으로 뒤덮인 숲속에서 야만인들이 사냥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인류 문명의 빛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에만 비추고 있었습니다. 교역이 몰고 온 경제와 터전의 팽창으로 복합적인 문화가 여러 식민 지역에서 발흥하면서 통합적인 노력을 기울여 온 도시국가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인간들의 집합체를 형성해 서로가 경쟁적으로 문명에 기여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칼과 노와 배짱과 이문(利文) 추구를 통해 세상의 모두를 섭렵하며 자신들의 부를 문명화시키는데 공헌했으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여기저기 전해줌으로써 문명의 척후병 역할까지 했습니다.
그런 부자들의 우월적 행동은 당연히 삶에서의 의미를 찾으려는 문화적인 활동에 투자했으며 정치적으로 나아가기위해 스스로가 전문적인 과외 교육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교역으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의 투철한 투자 정신이 그들의 삶을 풍요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사회 기여로 창조적 참여로 더 나아가서는 문화적인 갈망으로 나타났으며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고자 애썼습니다. 오직 자신의 부를 늘리는 즉 돈을 버는 것에만 집착하는 욕망의 완성보다 순수한 삶의 완성을 향해 또다시 항해해 나아가는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돛을 높이 올렸던 민족이었습니다. 끝없는 교역의 뱃길이 끝없는 인생길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건전한 목적도 없이 돈을 쓸어 담으려는 욕망을 천시했습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욕망이 그들에게는 천박한 인간의 전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들이 돈을 버는 최고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민주 사회에의 참여였으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키워가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당연시 했습니다. 고전주의를 빛내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소피스트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철학자들은 당시 그림자였습니다.
사회가 보여주는 인간의 갈망과 그 성취를 보며 자라난 청년들에게 고향을 떠나 부자 도시국가로 항해하는 것은 자신의 꿈을 펼쳐가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었으며 누구나가 그런 인정을 받기위해 삶에서 애쓰며 살았습니다. 그런 일련의 집단으로 그 당시 사회의 지성인들을 우리는 소피스트라고 불러오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아테네는 그런 도시국가였으며 소피스트들 또한 그곳으로 몰려들어 자신들의 꿈을 펼쳐내고자 했습니다. 부자들은 그들에게서 연설하는 방식을 배우려 했고 전문적인 정치적 안목을 배우려 했습니다. 인간 이성이 지성으로 그 지성이 자신의 관념을 형성해 경험과 관념적 사고(思考)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고자했습니다. 그러한 식견을 갖춘 참여로서의 결실들이 또한 사회적 문예의 창조로 이어지는 돈과 지성이 삶과 문예로 자연스러운 연계 고리를 형성해 순환하는 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한 문예 지향적인 삶을 인간의 올바른 삶의 자세로 여기는 심성을 누구나가 갖고 살아간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교역에서 성취한 부를 문예로 완성시킴으로써 인간의 자존적인 능력을 극대화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에게 해라는 지중해 바다의 무서움을 그들은 치열한 교역적 삶을 통해 극복하였으며 그러한 자신감으로 그들 본연의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부의 건전한 실현을 이룩할 자존감을 키워나갔습니다. 건축과 조각들 그리고 무수한 문학적인 작품들을 그들은 자존(自尊)의 능력으로 완벽하게 실현해내고 묘사해내는 그들만의 고유한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삶을 방해할 더 이상의 장애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광장으로서의 아고라 agora는 민의의 전당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토론문화는 상대를 비방하는 천박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역량을 쏟아내는 능력의 경연장이기도 했습니다. 벌어들인 돈을 건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은 이처럼 구조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이 교역으로 물질적 부의 성취에만 그 우수성을 보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구어내는 민족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명의 결실들이 그렇듯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모든 시민들의 담합된 보편적인 분위기 또한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즉 무언가 자연적인 현상의 재현에서 느껴지는 사실적인 느낌만이 아니라 거기에 보태어지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느낌으로서의 품격이 풍겨 나올 때에 모두는 자부심을 느끼며 더욱더 분발할 자존의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부는 세대를 이어 지속시키기가 어려우나 정신적이고 감각적인 품위로서의 품격은 영원히 지속되는 인간 지성의 완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주의가 누구나에게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끌리는 데에는 그처럼 부를 넘어선 인간의 치열하고 끝없는 진리를 향한 통찰에의 집착이라는 이상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성을 향한 치열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도전의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건전 사회를 만들어가는 기반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 신화들이 모두 다 꾸며낸 거짓이야기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들의 신화의 진정성은 인간의 끝없는 도전의 정수로서 도전정신을 완벽하게 이룩해낸 성취자로서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며 인간적인 이상향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인간들의 도전의 끝에는 당연히 포세이돈이라는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인식이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인간들에게 끝없는 도전을 모든 삶의 영역에 투사시키도록 유도해왔습니다. 마라톤의 영웅이/ 연극에서의 영웅이/ 전차경주에서의 영웅이/ 정치사회에서의 영웅이/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러한 영웅들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성을 받을만했습니다. 그 어떤 뒷배나/ 돈의 매수나/ 이념으로 찌든/ 인간들이 허공을 맴돌고 있지 않았던 도전사회가 그들의 진정한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전은커녕 소비시민으로서도 진정성조차도 없어 보이는 우리사회와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나약하고 허접한 시민들이 길거리를 방황하며 오직 이념을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허상을 실상으로 여기는 허수아비 사회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고전시대 그리스 시민들의 열정은 그들의 도전정신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고전을 일구어냈다고 하겠습니다. 천박함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가장 이상적인 품격이 그들의 자부심이자 전통으로 굳어져 내려왔습니다. 죽음을 무릅쓴 경험들이 인간의 품격을 형성함으로써 거칠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의 도전정신이 결국 물질적인 생명유지의 삶을 넘어서 자존감을 간직한 인간들의 창조적 대상을 향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도전정신으로서의 추구 노력이 현실에서 진정한 결실로서 얻어지는 가장 이상적인 정신세계의 실현의 현장이라 하겠습니다.
자연에서 자연을 모방하며 살아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느낌과 자연적인 느낌이 인간 지성을 통해 서로 간에 이상적으로 스며들며 연계됨으로써 그들이 만들어내고 창조해내는 문예의 대상에 품격을 스며들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인간 심성을 더욱더 자극하는 자연의 향기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우월함은 창조물에서 그런 품격을 재현해내는 역량에 있었으며 그것을 알아보는 지성의 공감 능력이 전통으로 이어지며 누구나가 그것을 공평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통해 함께하는 사회를 엮어갔습니다. 순수 고전은 그러기에 영원하며 누구나가 꿈꾸고 원하는 끌어당김을 가지고 스스로를 스스로가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원성을 향해 끝없이 밀고 나아가려는 굳건한 신념이 있어야 할 것이며 모범적이고 규범적인 제도가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무릅쓴 항해의 강인한 도전정신과 그 힘이 있습니다. 그 세계는 낭만적 놀이터가 아니며 더욱이나 남을 향한 투쟁의 터전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내 멋대로 내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재단하려는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함은 욕망으로 물든 심성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인간의 이상적 정기입니다. 그런 순수함은 저절로 태생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가식적 감정이 아닙니다. 무수한 죽음을 무릅쓴 교역과 그 도전정신의 끝에서 나오는 안도감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심미적으로 공감이 가는 알 수는 없지만 대상에서 느껴지는 이상적인 감각적 표식들로서의 품격이 함께합니다. 그 어떤 실천적 동기를 벗어난 지적이고 심미적인 활동에 몰입해 들어간 결과였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학문을 위한 학문이 그들 문예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모든 부(富)를 그처럼 문화적 창조에 몰입시킴으로써 그들은 세상과 자연을 함께 어울리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려 노력했습니다. 이를 위해 모두는 자존의 성숙을 욕구했으며 그런 집단들이 도시국가를 형성함으로써 다양한 문화적 번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도시국가는 그러한 재능을 갖춘 개인들에 의해 보편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동체가 되어갔습니다. 제도의 도입이 먼저가 아니었으며 투쟁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담보로 하는 항해가 우선이었으며 스스로의 철학적 배움의 길이 먼저였습니다. 재능의 나약함과 경험 부족의 천박함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핑계꺼리로 가림막을 치장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교역에 눈뜬 힘과 능력을 갖춘 장사꾼에게 고향은 정체된 삶으로 비쳤으며 주소이전을 통해 자신의 이상적인 거주지를 선택해 인생을 재창조하려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재력과 도전정신과 죽음을 벗어나온 경험은 함께하는 공동체로서의 민주주의를 키워나가는 바탕이 되었으며 문명을 이어가는 역량이 되어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인간의 탐구 의욕이 자연을 극복해 인간 지성으로 삶의 역량을 키워온 세상의 터전에서 시절을 빛냈던 과거 한순간의 문예를 우리는 고전(古典)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리스 고전기의 어느 한순간에 태어났다 순식간에 사라졌으며 그 이후 다시는 인류사에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 욕망에 집착해온 역사가 그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함으로서의 원인에 대한 탐구가치보다 목표와 목적을 앞세운 욕망의 결실을 향한 추구의 세상이 도래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아직도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빈 깡통들이 순수한 삶의 세계를 우롱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지 어떤 강제적인 수단으로서의 제도를 새로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겠으나 그들은 신의 영역도 자신의 투쟁의 주머니 속에 넣으려 만용을 부립니다. 한 번도 순수하게 노동으로 땀흘려본 경험도 없으면서 오직 몸의 태생으로서의 기질을 발휘할 뿐인데도 그들은 세상을 바꿀 선지자라도 되는 양 핏대를 돋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오만한 행동에 버림받고 천시 받는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서로를 원망하고 질투하는 심성만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서로가 올가미를 만들어 상대를 가두고 멸시하려는 영악함만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투쟁사회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투쟁의 끝은 공멸이겠으나 어리석은 개념을 이념으로 받아들인 허깨비가 허공을 어른거리며 인간들이 땀 흘리며 어렵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저당 잡아 자신의 헛똑똑이 바보짓을 펼쳐내면서도 그것이 세상의 진리라도 되는 양 뼈저린 자신의 고뇌의 결과라고 우기며 고함치는 시절입니다. 그처럼 우연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는 강제를 동원해야만 가능해지는 사회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새로운 억압질서와 투쟁의 용맹을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영웅심으로 주입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몸속에 경험은 부재하고 오직 투쟁만을 각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질타와 투쟁이 보기에는 좋아 보일 수 있겠으나 내 삶으로 투영해 들어와 간여하기 시작할 때에는 불필요한 무수한 고통을 안겨주게 됩니다.
진정한 경험적 인간은 그림자로 전락하고 허수아비 그림자가 인간이 되는 헛된 꿈속의 나비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투쟁사회가 이념사회를 기반으로 마약처럼 번져감으로써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주면 최고의 선물이 되어가고 있으며 노동자에게는 투쟁의 선전포고만이 기쁨의 함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되돌아볼만한 능력이 없어진 우리사회의 보이스 피싱이자 자화상입니다.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조현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어린 아이들까지 집안의 온화함을 벗어나 투쟁의 시각으로 무장해 가족공동체마저 허물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연 투쟁으로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작금의 우리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태의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을 가지고서 세부적인 것들에 대한 설명에 나서기보다는 세부적인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포괄적으로 호도하려는 인식을 모두가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사실에 근거해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로서의 역사 전체를 한 바퀴 돌고 와서야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부분만을 가지고 확대하기 시작할 때에 독단은 진리로 전도되고 자신의 이념이 세상을 개혁하고 새롭게 창조할 유일한 길이라고 착각합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본론만을 좋아함으로써 원인의 세계를 무시합니다. 그것은 게으른 인간이 열정적인 심성만을 타고난 경우라 하겠습니다. 침묵 속에 지나가야 할 썩은 내 나는 입들이 서로 잘났다고 아우성칠 때에 사회는 혼란을 겪게 되고 마음의 심성들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듯이 함으로써 일상의 삶이 혼란스러워지며 괴로움으로 이웃을 바라보게 됩니다.
만사가 귀찮아 지고 관심을 주고 기뻐할 대상이 사라짐으로써 세상은 갑자기 암흑과 같이 답답한 벽으로 느껴지며 심장은 오그라들기 시작합니다. 오로지 체질적으로 투쟁을 일상으로 여기는 인간들만이 자기들 세상이 도래한 듯 즐겁게 세상의 사태를 자기의 흐름으로 여기며 이권을 챙기기 위해 날뛰게 됩니다. 거기에 대응할 힘이 시민들에게는 이미 소진되어버려 멀거니 넋을 잃고 바라다보거나 외면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세상은 꾼들의 투전판이 되어감으로써 더욱더 혼란을 일으키겠으나 모든 언론은 기준의 잣대를 바꿈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매도해갑니다. 왼쪽에 있는 심장을 오른쪽으로 옮기면 된다고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미 세상은 그들의 천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내 세상에 내 맘대로 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투정을 하냐고 눈알을 부라리며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텅 빈 곳간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우리의 마음속 풍선이 점점 커져가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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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갈대생각님 반갑습니다
유월의 날씨가 많이 덥네요
더위속 건강 챙김이 잘 하시구요
긴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