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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本是) 함경도(咸鏡道) 땅과 옥저(沃沮), 여인국(女人國) [제2편]
「옥저(沃沮), 여인국(女人國)은, 중아(中亞) 땅에, 함경도(咸鏡道)는?」
2025년 02월 14일
○ 「여인국(女人國)과 옥저(沃沮) [2편]」/ 2017년 10월 21일【달단(韃靼) 서(西)쪽에 여인국(女人國)이 있다. 총령(葱嶺) 서남(西南) 강연천(康延川)에 여인국(女人國)이 있다.】게재내용(揭載內容)을 가져온 것은,
「‘옥저(沃沮)와 여인국(女人國), 현토군(玄菟郡) 태수(太守) 왕기(王頎)’와의 관계(關係)는,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땅을 벗어날 수 없다」라는 필자(筆者)의 주장(主張)이 고전원문(古典原文)에 의해 분명(分明)하게 고증(考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실재(實在)한 적이 없다」라는 것과 직결(直結)되는 매우 중대(重大)한 사안(事案)이다. 함에 독자(讀者)분들께 양해(諒解) 부탁드리며, 필자(筆者)의 옛글을 가져온 것이다. 일부 보충(補充), 보완(補完)한 것이다.
○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을 보면 :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대한 기록(記錄)에서, 「서여국(西女國)과 동여국(東女國)이 별도(別途)로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소위(所謂) 「중국사(中國史) 혹(或)은 조선사(朝鮮史)」라고 말하는 역사세계(歷史世界)【서양사(西洋史)는 근대사(近代史)만 있을 뿐, 중세기(中世紀) 이전(以前)의 역사(歷史)는 없다.】속에서,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관한 기록(記錄)은, 조선사(朝鮮史)와 관계(關係)가 있을 뿐이다. 곧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이뤘던 나라 「옥저국(沃沮國)」기록(記錄)에서만이 유일(唯一)하게 등장(登場), 존재(存在)하며, “삼국지(三國志) 및 후한서(後漢書)”속의 조선사(朝鮮史) 관련(關聯) 기록(記錄)에서 볼 수 있다.
➥ 「조선사(朝鮮史)는, 곧 동방(東方)【중아(中亞) 및 아세아(亞細亞)】역사서(歷史書)」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1) 後漢書 卷85 東沃沮 :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注 : 蓋馬,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中略.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九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다. 【주(注)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屬)했다. 그 산(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 중략(中略). 其耆老言, 嘗於海中得一布衣, 其形如中人衣, 而兩袖長三丈. 又於岸際見一人乘破船, 頂中復有面, 與語不通, 不食而死. : 그곳의 나이 많은 노인(耆老)이 말하기를, “해중(海中)에서 베옷(布衣) 하나를 주었는데, 그 모양이 보통사람 옷과 같았으나, 양 소매(袖)가 삼(三) 장이나 되었다. 또 언덕 사이에서 보니 한 사람이 난파선(難破船)에 있는데, 정수리 가운데에도 얼굴이 있었다. 그는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먹지 못하고 죽었다. 又說海中有女國, 無男人. 或傳其國有神井, 窺之輒生子雲. 【注 : 魏志曰,毌丘儉遣王頎追句驪王宮,窮沃沮東界,問其耆老所傳雲.】 : 또 말하기를 해중(海中)에 여국(女國)이 있는데, 남자(男子)가 없다. 혹 전하기를 그 나라에는 신정(神井)이 있어, 이를 엿보면 언제나 아이를 낳는다.”하였다. 【주(注) : 위지(魏志)에서 이르기를, 관구검(毌丘儉)이 왕기(王頎)를 파견하여 구려(句驪) 왕(王) 【高駒驪 王】궁(宮)을 쫓아, 옥저(沃沮) 동(東)쪽 끝 지경에 이르러서, 그곳 늙은 노인에게 물어 전(傳)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반도식민지(半島植民地) 통치용(統治用) 조선사(朝鮮史)”에서 「옥저국(沃沮國)은,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동해(東海) 변(邊)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설명(說明)에 따르면 : 함경도(咸鏡道), 강원도(江原道) 동해(東海)에 “여인국(女人國)”이 있어야만 한다. 물어보자. 「매국사학자(賣國史學者)들아! 일본해(日本海)에 있다는 여인국(女人國)으로 가 연휴(連休)를 즐겨보자. 어디에 있다더냐? 비웃음당할 일밖에 없다.」
➥ 결국(結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사기극(詐欺劇)”이란 것을 금방(今方)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2) 三國志 卷 30 魏書 30 :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中略.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 대해(大海) 가에 산다. 중략(中略). 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 왕기(王頎)를 별도로 보내어 궁(宮)을 쫓아 토벌하라고 하였는데, 그 나라 동(東)쪽 지경에 닿았다. 늙은 노인에게 묻기를 해동(海東)【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 : 늙은 노인이 말하기를, 나라사람【옥저(沃沮) 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려는데, 풍랑(風浪)을 만나 수십(數十)일에 이르러, 동(東)쪽에서 하나의 섬에 닿았다. 위에 사람이 있는데, 언어(言語)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습속에 항시 칠(七)월에 동녀(童女)를 취해 바다에 바친다. 또 말하기를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 가운데(海中) 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國人衣, 其兩袖長三丈. : 또 말하기를 바다에서 포의(布衣) 하나를 얻었는데, 바다 가운데에 떠다니다가 나왔는데, 그 옷의 모양이 중국인(中國人)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三) 장이나 되었다. 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通, 不食而死. 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는데, 목 가운데 얼굴이 또 있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먹지 않고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沃沮) 동(東)쪽 큰 바다(大海)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위의 삼국지(三國志) 역시(亦是) ‘(1)’의 후한서(後漢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기록(記錄)을 남겨 놓고 있다.
문제(問題)는, “반도(半島) 함경도(咸鏡道) 및 강원도(江原道) 동(東)쪽은 모두 큰 바다(大海)인 망망대해(茫茫大海)요, 대해(大海)를 건너면 ‘오늘날의 열도(列島) 북부(北部) 땅’에 닿는데”, 「이곳에 “여인(女人)들만이 사는 여인국(女人國)은, 역사(歷史) 이래(以來) 기록(記錄)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또한 실제(實際) 이곳 땅에 “여인국(女人國)”이 존재(存在) 할 땅(地)이 없다. 늘 주장하는 것이지만 : 자연환경(自然環境)을 벗어난, 떠난 ‘인간(人間)의 삶’은 존재(存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萬若) 이곳 열도(列島) 북부(北部) 땅에 ‘여인국(女人國)’이 존재(存在)했다면 : 반도(半島) 땅에는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아닌 ”서여인국(西女人國) 왕조(王朝)가 반만년(半萬年) 역사를 이루고 왔다“라는 것이요,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의 7,700만(萬) 국민(國民)들은 서여인국(西女人國) 왕조(王朝)의 후손(後孫)들이라는 말과 같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또 후대(後代)의「통전(通典) 동옥저(東沃沮),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동옥저(東沃沮)」편(篇) 역시(亦是),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의 것과 크게 다름이 없는 내용(內容)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所謂) 중국사(中國史)라고 하는 곳의 옛 왕조(王朝)들의 역사서(歷史書)에 옥저국(沃沮國)에 대한 설명(說明)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登場)하는 것이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관한 이야기다.
➨➨➨ 여기서 핵심(核心)은 : 현존(現存)하는 그 어떤 고전(古典)과 비교(比較)될 수 없는 “산해경(山海經) 본문(本文)”이나 그 “주석(注釋)”편의 :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관한 것들은 모두 대황서경(大荒西經)과 해외서경(海外西經)【경(經)에서 말하는 방위(方位) : 西南方 ∼ 西北方】편에 설명(說明)되어있다.」라는 사실(事實)이다. 정리(整理)하면 :
〈「산해경(山海經) 및 그 주석(注釋), 회남자(淮南子), 25사, 통전(通典), 자치통감(資治通鑑), 당회요(唐會要), 해국도지(海國圖志) 등등의 많은 역사서(歷史書)」에서, 「여국(女國)이나 여인국(女人國)은,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서남(西南) 또는 서(西)쪽에 있었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다〉는 것이다.
➥ 반복(反復)되는 이야기지만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 「옥저국(沃沮國)은 극동(極東)지방인 반도(半島) 북방(北方) 동해안(東海岸) 지방에 있었다.」라고 한다.
➥ 그러나 ‘중국사(中國史)’라고 부르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역사서(歷史書)’에서 「옥저국(沃沮國)」은 :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注: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中略.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九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다. 주(注)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屬)했다. 그 산(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살펴보면 : 「반도(半島) 평양(平壤) 서(西)쪽은, 서해(西海) 곧 큰 바다(大海)이기 때문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을 수 없고, 또한 바다에 ‘동옥저(東沃沮)’라는 나라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은 100% 팩트(Fact)다.
더더구나 위의 기록(記錄)을 따르면 : 「‘옥저국(沃沮國)’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고 불리는 큰 산(大山) 동(東)쪽 땅에, ‘여국(女國)=여인국(女人國)’은, 옥저국(沃沮國)의 서(西)쪽에, 동(東)쪽에 각각(各各) 있었다」라는 것이 된다.
위의 기록(記錄)을 알기 쉽게 풀어보면 : 동옥저국(東沃沮國)은,
❶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고,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 기슭에 동옥저국(東沃沮國)이 있다」라는 것이고, 「개마대산(蓋馬大山)의 서(西)쪽에는 본시(本是)의 옥저국(沃沮國)이 있었다」라는 사실(事實)이다.
➋ 또 「개마대산(蓋馬大山)은 개마현(蓋馬縣)에 속했는데, 개마현(蓋馬縣)은 현토군(玄菟郡)에 속(所)했다.」라는 것이다.
➌ 「현토(玄菟)」는 : 진서(晉書) 재기(載記) 서두(序頭)에 기록(記錄)된 「然則燕築造陽之郊, 秦塹臨洮之險, 登天山, 絕地脈, 苞玄菟, 款黃河, 所以防夷狄之亂中華, 其備豫如此.」속에서 말하고 있는 「현토(玄菟)」로 볼 때,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총령(葱嶺)과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6,995m)과 천산산맥(天山山脈) 및 하(河)【‘총령(葱嶺)=곤륜(崑崙)’에서 흐른다는 하(河)】가 있는 곳이다.
➍ 「옥저국(沃沮國)」은, 이러한 곳【파미르고원(高原) 또는 ‘곤륜(崑崙)=총령(葱嶺)’과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등으로 이어진 고원지대(高原地帶)의 동(東)쪽 땅】에 「동옥저국(東沃沮國)」이 있었다면,
「그 서(西)쪽 땅에 본시(本是)의 옥저국(沃沮國)이 있었다」라는 것이고, 「옥저국(沃沮國)」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흑해(黑海) 또는 카스피해【Caspian, 海=리해(裏海)】주변(周邊)에 있었다」라는 것이며, 「그 남(西)쪽과 동(東)쪽에 있었던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에 대한 정보(情報)를 독점(獨占)할 수 있었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이 가장 합리적(合理的)일 수밖에 없는 것은 : 「반도(半島)와 여인국(女人國), 수만리(數萬里) 동서(東西)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정보(情報)도 득할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는 사기극(詐欺劇)이지만 : 그러나 「조선사(朝鮮史) 강역(疆域)」은, 「동구라파(東歐羅巴)로부터 아세아(亞細亞) 땅을 아우르고 있다」라는 설명(說明)은, 객관적(客觀的)으로, 합리적(合理的)으로 가능(可能)한 설명(說明)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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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국(女人國) 또는 여국(女國)」이라고 기술(記述)한 옛 역사서(歷史書 : 古典)에서 그 나라(國)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보면 :
➀ 총령(葱嶺) 서(西)쪽 : 산해경(山海經), 회남자(淮南子), 당회요(唐會要), 해국도지(海國圖志) 등
➁ 총령(葱嶺) 서남(西南)쪽 : 산해경(山海經), 회남자(淮南子) 등
➂ 총령(葱嶺) 남(南)쪽 : 통전(通典) 서융(西戎), 수서(隋書) 서역(西域) 등
➃ 총령(葱嶺) 동(東)쪽 : 구당서(舊唐書) 서남만(西南蠻), 당회요(唐會要),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으로 크게 구분(區分)할 수 있는데,
➄ 「총령(葱嶺) 서(西)쪽 여인국(女人國)은, 서여국(西女國)」이고,
➅ 「총령(葱嶺) 동(東)·남(南)·서남(西南) 여인국(女人國)은, 동여국(東女國)」이다.
(3) 동여국(東女國)에 대한 것은,
〈당회요(唐會要) 99 / 東女國 : 東女. 西羌之別種. 以西海中有女國. 故稱東女國也. 俗以女為王. 東與茂州黨項接界. 隔羅女蠻及白狼夷. : 동여국(東女國)은 서강(西羌)의 별종(別種)인데, 서해(西海) 가운데에 여국(女國)이 있어, 이로 인하여 동여국(東女國)이라고 하였다. 풍속(風俗)에 여자(女子)가 왕(王)이며, 동(東)쪽으로 무주(武州) 당항(黨項)과 접경(接境)하고, 라녀만(羅女蠻)과 백랑이(白狼夷)와 떨어져 있다. 有八十餘城. 王所居名康延川. 中有弱水南流. 用牛皮為船以渡. 戶口四萬. : 팔십(八十)여 성(城)이 있고, 왕(王)이 살고 있는 곳의 이름은 강연천(康延川)인데, 가운데를 약수(弱水)가 남쪽으로 흘러, 소가죽으로 만든 배로 건너는데, 사만(四萬)여 호가 있다. 女王號為賓就. 有女官號曰高霸. 中略. 文字同於天竺.武德中. 女王湯滂氏遣使貢方物 : 여왕(女王)을 빈취(賓就)라고 부르며, 여관(女官)은 고패라고 부른다. 중략. 문자(文字)는 천축(天竺)과 같다. 무덕(武德)중에, 여왕(女王) ‘탕방’씨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라고 하였는데,
舊唐書 列傳 147 / 南蠻 西南蠻 / 東女國 : 〈東女國,西羌之別種,以西海中復有女國,故稱東女焉。: 동여국(東女國)은, 서강(西羌)의 별종(別種)인데, 서해(西海) 가운데에 또 하나의 여국(女國)이 있어, 동여국(東女國)이라고 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위의 당회요(唐會要)는, “以 西 海 中 有 女 國”이라고 하여, 구당서(舊唐書)의 “以 西 海 中 復 有 女 國”이라고 하는 8자(字) 구절(句節) 속에 “復(복)”자(字)가 삭제(削除)되어 7자(字)로 되어있다.
「복(復)」 자(字)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의미(意味)는 다를 수 있으나, 「서해(西海) 바다 가운데에 여국(女國)이 있어, 이로 인하여 동여국(東女國)이라고 불렀다.」라는 말을, 「동여국(東女國)은 서강(西羌)의 별종(別種)인데, 서해(西海) 가운데에 여국(女國)이 또 있어, 이로 인하여 동여국(東女國)이라 부르게 되었다.」라고 한다면 확실(確實)하게 구분(區分)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보면 : 「구당서(舊唐書) 945년(年) / 당회요(唐會要) 961년(年) 편찬(編纂)되었다」라고 하는데, ‘당회요(唐會要)가 구당서(舊唐書) 기록(記錄)을 따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여기서 동여국(東女國)을 찾아보자. 과연(果然)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동여국(東女國)의 여왕(女王)이 살고 있었던 곳은, 「康 延 川. 中 有 弱 水 南 流 : 강연천(康延川)인데, 가운데를 약수(弱水)가 남(南)쪽으로 흐른다.」라고 한 곳이다.
➊ ‘禹貢錐指’ 卷12를 보면 :《唐史 : 以小勃律之娑夷河, 東女之康延川當之. : 소발률(小勃律)의 사이하(娑夷河)가 동여(東女)의 강연천(康延川)이다.》라고 하였으며,
➋ 우공지남(禹貢指南) 02 : 《賈耽同此説唐史又云小勃律娑夷河, 東女康延川. : 가탐(賈耽)의 이 설과 같은 당사(唐史)에서 또 이르기를 : 소발률(小勃律)의 사이하(娑夷河)는 동여(東女)의 강연천(康延川)이다. 是弱水娑夷河在天竺東于闐南不西流,康延川南流亦不西流. : 약수(弱水) 사이하(娑夷河)는 천축(天竺) 동(東)쪽의 우전(于闐)에서 서(西)쪽으로 흐르지 않는다. 강연천(康延川)은 남류(南流)하지 또 서류(西流)하지 않는다. 樊綽蠻書蘭蒼江源出大雪山下莎川又云康延川南流其國東接茂州東南接雅州皆在益州西非雍州境. : 번작【樊綽 : 당(唐)나라 때의 사람】의 만서(蠻書)에, 란창강(蘭蒼江)은 대설산(大雪山) 아래에서 나와, 사천(莎川) 또 이르기를, 강연천(康延川)은 남류(南流)하는데, 그 나라의 동(東)쪽에 무주(茂州)와 접하고, 동남(東南)에는 아주(雅州)에 접하는데, 모두 익주(益州)의 서쪽으로, 옹주(雍州) 지경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➌ 「소발률(小勃律)」은, 본시 발률(勃律)이었으나, 나누어져 북(北)쪽이 소발률(小勃律)이 되었는데, 이곳은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카슈미르【Kashmīr : 罽賓】사이의 땅이며, “파키스탄(Pakistan)의 북부지방(北部地方)”이라고 전하는데, 「서력(西曆) 747년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고선지(高仙芝)가 이곳을 토벌(討伐), 국왕(國王)과 왕비(王妃)를 사로잡았다.」라고 전(傳)해지는 곳이다.
➍ 「구당서(舊唐書) 서융(西戎) 계빈(罽賓)」 : 「발률국(勃律國)은, 계빈(罽賓)과 토번(吐蕃)사이에 있다. 개원(開元) 22년 734년 토번(吐蕃)이 그곳을 깨뜨렸다.【又有勃律國, 在罽賓,吐蕃之間. 開元中頻遣使朝獻. 八年, 冊立其王蘇麟陀逸之為勃律國王, 朝貢不絕.二十二年, 為吐蕃所破.】」라고 하였고,
「신당서(新唐書) 서역(西域)」 : 〈小勃律去京師九千里而贏, 東少南三千里距吐蕃贊普牙, 東八百里屬烏萇, 東南三百里大勃律, 南五百里個失蜜, 北五百里當護密之娑勒城. : 소발률(小勃律)은 경사(京師)로부터 9천리 떨어져 있다. 동(東)쪽 약간 남(南)쪽으로 3천리에 토번(吐蕃) 찬보(贊普)아영(牙營)이 있고, 동(東)쪽으로 8백리에 오장(烏萇)이 있으며, 동남(東南) 3백리에 대발률(大勃律)이 있으며, 남쪽 5백리에 개실밀(個失蜜)이, 북쪽 5백리에 당호밀(當護密)의 사늑성(娑勒城)이다〉라고 한 곳이다.
➎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 : 〈勃律國在蔥嶺西南. 有大小二國, 小勃律在大勃律西北三百里. 唐書:其國去京師九千里. 王居孽多城,臨婆奚水. : 발률국(勃律國)은 총령(葱嶺) 서남(西南)에 있는데, 큰 나라와 작은 나라 두 나라가 있다. 소발률(小勃律)은 대발률(大勃律)의 서북 3 백리에 있다. 당서(唐書)에 의하면 : 그 나라는 경사(京師)로부터 9 천리(千里) 떨어져 있고, 왕(王)은 얼다성(孼多城)에 살며, 파해수(婆奚水)에 임해 있다〉라고 하였다.
➥➥➥ 위에서 보듯이 ‘고전(古典)’에 의하면, 「동여국(東女國)」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카슈미르[Kashmīr : 罽賓] 사이의 땅이며, 파키스탄(Pakistan)의 북부지방(北部地方)이라고 전하는데, 이곳은 ‘티베트(Tibet : 西藏(Xizang)’ 서북부(西北部)지방이기도 하다」
「무주(茂州) 또는 아주(雅州)」 역시 오늘날의 사천성(四川省)에 있다고 하나, 지명(地名) 이동(移動)이 된 것이며, 본래(本來)의 무주(茂州)와 아주(雅州)는 서장[西藏 : 티베트]의 서(西)쪽 땅에 있어야 마땅한 것이다.
◆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보면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계빈(啓殯) 또는 티베트(Tibet)의 사이인 파키스탄(Pakistan) 북부지방(北部地方)을 일컫는다」 구당서(舊唐書) 147의 동여국(東女國)은, 「남만(南蠻)의 서남만(西南蠻)」편에 기록(記錄)되어 있으며, 서강(西羌)은 티베트 종족(種族)이다.
➥➥➥ 고전번역원(古典飜譯院) / 기언(記言) 제57권 산고속집 / 백제(百濟)에서 서(西)쪽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지은 노래의 주석(注釋) 〔009편〕을 보면 :
「조와(爪蛙) : 옛날 사바국(闍婆國)인데, 동(東)으로는 옛날 여인국(女人國)과 접해 있고, 서로는 삼불제국(三佛齊國)과 접해 있고, 남으로는 옛날 대식국(大食國)과 접해 있고, 북으로는 점성국(占城國)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송나라 순화(淳化) 연간과 대관(大觀)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바 있다. (嶺海輿圖 南夷島紀)」라고 하였으니, 「“여인국(女人國)”은 동아세아(東亞世亞) 땅에는 없다」라는 것이다.
【嶺海輿圖, 南夷島紀의 원전(原典)을 직접 찾아보면 : 「爪哇國古本闍婆國東扺古女人國西扺三佛齊國南扺古大食國北界占城國宋淳化大觀中嘗遣使朝貢國朝」라고 기록(記錄)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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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서여국(西女國)」으로 들어가자.
(4) 「서여국(西女國)」
海國圖志 卷028 : 〈南都魯機國沿革 : 「漢唐皆為安息, 大食西北境, 有西女國亦在境內, 元為哈烈國, 明為度爾格, 今為南都魯機. 原無今補 : 한(漢)과 당(唐) 때 모두 안식(安息)이었고, 대식(大食)의 서북(西北) 지경이며, 서여국(西女國)이 또한 경내에 있었고, 원(元) 때의 합열국(哈烈國)이며, 명(明) 때의 도이격(度爾格)인데, 지금 남도노기(南都魯機)이다. 원래(元來)에 기록(記錄)이 없어 지금 보충한다.」〉라고 하였다.
➊ 「대식(大食)=대식국(大食國)」 : 「사라센제국(Saracens, 帝國)으로, 오늘날의 ‘이란·이라크’ 지역에 해당한다.」 7세기 중엽 마호메트의 후계자들(카리프·술탄)이 아시아·유럽·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우마이야왕조)을 건설한 후, 아바스 왕조, 터키계 셀주크 왕조로 이어졌고, 몽고(蒙古)의 지배 후, 티무르·무굴·사파위 및 오스만 제국(1922 멸망)까지 이어졌다. 이들을 중세 유럽에서 ‘사라센’이라 했고 중국에서는 아바스 왕조를 ‘대식국(大食國)’이라 했다.
➋ ➥〈대식(大食)의 서북(西北) 경내(境內)에 여국(女國)이 있었다〉 : 「카스피해[海 : 리해(裏海)]와 흑해(黑海) 사이의 땅이다.」
➌ 〈남도노기국(南都魯機國)〉은 : 오늘날의 「터키(Türkiye)」를 말한다.
新唐書:〈拂菻西際海, 有西女國, 種皆女子, 多珍貨. 附拂菻. 中略. : 불름(拂菻) 서(西)쪽 바다 사이에, 서여국(西女國)이 있는데, 모두 여자(女子) 종류이며, 진귀한 물품이 많다. 불름(拂菻)에 기대어 산다.〉 【불름(拂菻)은, 불림(拂菻)이라고도 한다.】
해국도지(海國圖志) / 文獻通考:〈西女國在蔥嶺之西, 其俗與東女同 (東女在蔥嶺東, 南近吐番, 後亦為吐番所滅), 附於拂菻.唐貞觀八年. 朝貢始至. :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 서여국(西女國)은 총령(葱嶺) 서(西)쪽에 있는데, 그 풍속은 동여국(東女國)과 같다. (동여국(東女國)은 총령(葱嶺)의 동(東)쪽에 있으며, 남(南)쪽으로 토번(吐番)에 가깝고, 뒤에 역시 토번(吐番)에게 소멸(消滅)되었다) 불름(拂菻)【필자(筆者) 注 : 불림(拂菻)이라고도 한다.】에 의지하였는데, 당(唐) 정관 8년에, 처음으로 조공(朝貢)하였다〉라고 하였다.
【동여국(東女國)과 서여국(西女國)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해국도지(海國圖志) / 〈坤輿圖說:韃而靼各國, 迤西舊有女國, 曰亞瑪作搦. 驍勇善戰. 建一神祠, 壯麗奇巧, 非思議所及. 今亦為他國所並, 僅存其名耳. 【案:為他國所並者,即指度爾格國兼並之事.】 : 곤여도설(坤輿圖說) : 달단(韃靼)의 여러 나라(各國)에, 비스듬하게 서(西)쪽으로 이어져 있는 ‘여국(女國)이 있는데, 아마작닉(亞瑪作搦)’이라고 한다. 사납고 날쌔 있는 힘을 다해 싸운다. 일신사(一神祠)를 세웠는데,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장려(壯麗)하고 교묘하다. 지금 또 다른 나라에 합병되었는데, 간신히 이름만 남아있다. 상고해보면 : 합병한 다른 나라란, 곧 도이격국(度爾格國)이 합병한 일을 지칭한다〉라고 하였으며,
해국도지(海國圖志) : 〈案:南都魯本韃靼種, 舊遊牧蔥嶺,伊犁一帶, 展轉西徙, 入買諾, 居於拉馬尼亞者也. : 남도노(南都魯)는 본래(本來) 달단(韃靼) 종인데, 예전에 총령(葱嶺), 이리(伊犁) 일대에서 유목(遊牧)을 했는데, 전전(展轉)하여 서(西)쪽으로 옮겨,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고, 살았는데 납마니아(拉馬尼亞)이다〉라고 하였으니,
➥ 위의 「남도노국(南都魯國)」은 : 「달단족(韃靼族)」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곳은 「납마니아(拉馬尼亞)」란 곳이다. ‘남도노국(南都魯國)’은 ‘남도노기(南都魯機)’와는 같은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곧 「터키【Terkey : 튀르키예(Türkiye)】는 돌궐(突厥)로, 달단족(韃靼族)이다.」라는 설명(說明)이다.
海國圖志 卷031 : 〈職方外紀 : 中略. 迤西舊有女國曰亞瑪作搦, 最驍勇善戰, 嚐破一名都曰厄弗俗, 即其地建一神祠, 宏麗奇巧, 殆非思議所及. 西國稱天下有七奇, 此居其二, 國俗惟春月容男子一至其地生子, 男輒殺之. 今亦為他國所並,僅存其名. 【即諸史所謂西女國也,今為他國所並者,謂並於南都魯機也】 : 직방외기(職方外紀) : 중략(中略). 비스듬하게 서(西)쪽에 예부터 있어 왔던 ‘여국(女國)을 아마작닉(亞瑪作搦)’이라 하는데, 사납고 날쌔 있는 힘을 다해 싸워 깨뜨리는데, 도읍지는 일명 액불속(厄弗俗)이라고 하며, 곧 그 땅에 일신사(一神祠)를 세웠는데, 그 기교가 굉장히 아름다워, 그 아름다움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서(西)쪽 나라에서 부르기를 천하(天下)에 7가지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 있는데, 이것이 그 두 번째라고 하였다. 나라의 풍속(風俗)에 봄(春)날 밤에 남자(男子) 한 사람을 받아들여 하루를 보내고 그 땅에서 자식(子息)을 낳는데, 남자(男子)아이라면 번번이 죽인다. 지금은 다른 나라에서 병합(倂合)되어, 겨우 그 이름만 남아 있다. 【즉(卽) 여러 사서(史書)에서 일컫는 서여국(西女國)인데, 지금 다른 나라가 그곳을 합병(合倂)했다는 자(者)는, 남도노기(南都魯機)이다.】중략(中略).〉라고 하였다.
➍ 여기서 우리가 주목(注目)해야 하고, 함정(陷穽)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留意)해야 할 점은 : 「동여국(東女國)이 있었다는 말은, 서여국(西女國)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동(東)쪽에 있는 여국(女國)과 서(西)쪽에 있었다는 여국(女國)을 혼동(混同)하면, 엉뚱한 결론(決論)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곳 원문을 보면 : 곤여도설(坤輿圖說)에서 말하는 : 〈韃而靼各國, 迤西舊有女國, 曰亞瑪作搦. 驍勇善戰.建一神祠, 壯麗奇巧, 非思議所及. 今亦為他國所並, 僅存其名耳. 案:為他國所並者,即指度爾格國兼並之事〉와 같은 내용인데, ➨ 직방외기(職方外紀)에서는 맨 앞의 「韃 而 靼 各 國」이란 구절(句節)을 삭제(削除)해버려, 다른 의미(意味)로 전달(傳達)될 수 있다는 점이다.
➍- 1) 직방외기(職方外紀) : 〈迤 西 舊 有 女 國 曰 亞 瑪 作 搦 : 비스듬하게 서(西)쪽에 예부터 있어 왔던 ‘여국(女國)을 아마작닉(亞瑪作搦)’이라 하는데…〉
➍- 2) 곤여도설(坤輿圖說) : 〈韃 而 靼 各 國, 迤 西 舊 有 女 國, 曰 亞 瑪 作 搦. : 달단(韃靼) 각 나라에, 비스듬하게 서(西)쪽에 예부터 있어 왔던 ‘여국(女國)을 아마작닉(亞瑪作搦)’이라 하는데…〉
➥➥ 위에서 보다시피 ➍- 1)의 경우(境遇) :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찾을 수 없는 그저 막연(漠然)한 이야기다. 그러나 ➍- 2)의 경우(境遇) :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확실(確實)하게 알게 해 준다. 곧 「달단(韃靼) 여러 나라에 비스듬하게 서(西)쪽에 걸쳐 있었던 나라가 곧 여국(女國)이다.」라는 뜻이다.
➎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권 / 천지문(天地門) / 여국(女國) : 〈古今言西方有女國按職方外紀但 : 옛날부터 서(西)쪽에 여국(女國)이 있다고 한다.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보면, 云韃靼迆西舊有女國 : 다만 “달단(韃靼)의 서(西)쪽에 옛날의 여국(女國)이 있었다” 國俗惟春月容男子一至其地生子男輒殺之, 今亦為他國所併存其名耳此說. : 그 나라 풍속(風俗)에는, 봄철에 남자 한 사람만이 그곳에 오는 것을 허용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 버렸는데, 지금은 다른 나라에 병합(倂合)하고, 그 명칭(名稱)만 남아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설(說)이 가장 근사하다. 最近然生男輒殺則春月所容必丐于異國恐是一時之俗也. : 최근(最近)에 아들을 낳기만 하면 죽여 버렸다고 하니, 그럼, 봄철에 들어오는 남자(男子)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빌려오는 것일 터인즉 이는 한때의 습속(習俗)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보면 :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설명(說明)에 유달리 달단(韃靼)【달단(韃靼)은, 곧 옛 몽고(蒙古)다】에 관한 기록(記錄)이 많다. 왜일까? 그곳이 그들의 고향(故土 : 故鄕)이기 때문이다.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종족(種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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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인국(女人國) : 「색목인(色目人) 서여국(西女國)」이다.
海國圖志 卷019 西南洋 : 〈惹鹿惹亞一國, 亦不通海, 東傍裏海, 西傍死海, 北聯俄羅斯, 南接東西多爾其. 女子姿色美, 而毛發紅, 氣味臭【即古之西女國故地】衣著同白頭, 貢於包社. :「야록야아(惹鹿惹亞)」 한 나라는, 역시 바다와 통하지 않는데, 동(東)쪽으로 리해(裏海) 곁에, 서(西)쪽으론 사해(死海) 곁에, 북(北)쪽으로는 잇달아 아라사(俄羅斯)이고, 남(南)쪽은 동서(東西) 다이기(多爾其)와 접(接)해 있다. 여자(女子)의 용모(容貌)가 아름답고, 모발(毛髮)은 붉고(紅), 맛과 냄새를 잘 안다. 【곧 옛 서여국(西女國)의 옛 땅(故地)이다.】 옷을 입는 것은 백두(白頭)와 같고, 포사(包社)에 조공(朝貢)한다〉라고 하였다.
「여국(女國)을 아마작닉(亞瑪作搦)」이라고도 했으며, 「야록야아(惹鹿惹亞)는, 곧 남도노기(南都魯機)」를 말하는 것이고, 이곳이 옛 여인국(女人國)의 땅이었는데, ‘여자(女子)들은 아름답고 붉은 머리【毛髮 紅】를 가지고 있다’라는 말은 곧 색목인(色目人) 종족(種族)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 땅은 바로 〈캅카스산맥[Caucasu, 山脈)]【코카서스산맥[Caucasus Mountains]】은 : 캅카스(Caucasu) 지방(地方)의 흑해【黑海 : 死海】와 카스피해【리해(裏海)】사이의 산맥(山脈)이 있는 땅으로,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의 경계(境界)」를 이루는데, 이곳에 최고봉(最高峰)인 ‘엘브루스 山’【Mount Elbrus : 액이포노토산(厄爾布魯士山) : 5,642m. 산맥(山脈) 길이는 1,100km, 폭은 160km에 달한다.】이다.〉
➥ 이곳 땅은 과학자(科學者)들이 말하는 색목인(色目人)들의 본래(本來)의 발원지(發源地)라고 말하는 곳이다.
【厄爾布魯士山[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俄語:Эльбрус,羅馬化:Elbrus;卡拉恰伊-巴爾卡爾語:Минги тау,羅馬化:Miñi taw,發音:[miŋŋi taw] (ⓘ); 卡巴爾達語:Ӏуащхьэмахуэ)位於俄羅斯西南部的高加索山脈,屬於高加索山系的大高加索山脈的博科沃伊支脈,是休眠火山,靠近喬治亞。厄爾布魯士山的最高峰是俄羅斯的最高點,大多數觀點認為也是歐洲第一高峰。本山主要有東西二峰,西峰最高,海拔5,642公尺(18,510英尺),東峰海拔5,621公尺(18,442英尺)】
【裏海[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諸國環而繞之:東北細密里也,西北俄羅斯,東三馬爾丹,西惹鹿惹也,西南東多爾其,南包社大白頭。內注大海,不通海棹;其水惟從包社出海,故為裏海】
【包社 : ‘페르시아(Persia)’를 말하는 것이고, ➨ 백두국(白頭國) : 海國聞見錄 / 上卷 : 小西洋記小西洋,居於丙午、丁未方。:從麻喇甲、暹羅繞西沿山而至於白頭番國。人即西域之狀:綣須環耳,衣西洋布,大領、小袖,纒腰,裹白頭,故以「白頭」呼之。國有二,東為小白頭,西為包社大白頭。二國北接三馬爾丹,即噶爾丹之本國也。而三馬爾丹之北,鄰細密里也國;而細密里也之西,為俄羅斯國。小白頭,東鄰民呀國。民呀人黑,穿著皆白,類似白頭】
➨ 머리가 어지럽도록 복잡(複雜)하게 이어졌으나, 답(答)은 의외(意外)로 간단(簡單)하다.
➊ ➥「리해(裏海)」 : 「카스피해(海)= 등길사해(騰吉思海)=북고해(北高海)=가토비암해(加土比唵海)=격등리해(格騰裏海)=뇌저해(雷翥海)」이다. 오늘날의 「카스피해[Caspian, 海]」를 말하는 것이다. ➥ 「사해(死海)」 : 「흑해(黑海)=묵아저호(墨阿底湖)」를 말하는 것이다. 곧 「리해(裏海)와 사해(四海) 사이의 땅에 “서여국(西女國)”이 있었다」라는 뜻인데, 바로 「코카서스=캡카스 산맥(山脈)이 있는 땅이다」
➋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 : 〈西海在佛菻國境. 中略. 亦謂之秦海, 以與大秦國近也. 水經注:崑崙西有新頭河, 經中天竺國, 又西徑安息南, 注於雷翥海, 雷翥海, 即西海也. 胡氏曰:西海之濱, 古有條支, 大秦, 蒙奇, 兜勒諸國. 中略. : 서해(西海)는 불름국(拂菻國) 지경에 있다. 중략(中略). 또한 진해(秦海)라고 하며, 대진국(大秦國)이 가깝다. 수경주(水經注) : 곤륜(崑崙)의 서(西)쪽에 신두하(新頭河)가 있는데, 중천축국(中天竺國)을 지나, 또 서(西)쪽으로 안식(安息)의 남(南)쪽으로 가, 뇌저해(雷翥海)로 흐른다. 뇌저해(雷翥海)는, 곧 서해(西海)이다. 호(胡)씨가 이르기를 : 옛 조지(條支)·대진(大秦)·몽기(蒙奇)·두륵(兜勒)의 여러 나라가 서해(西海)의 물가에 있었다. 중략(中略)〉라고 하였으니,
「서해(西海)」는, 「뇌저해(雷翥海) 즉(卽) 리해(裏海), 카스피해(海)」를 말하는 것인데, 진해(秦海)」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대진국(大秦國)=불름(拂菻)’ 지경(地境)에 있었기 때문에 「진해(秦海)」라고 부른 것이다.
➨ 사견(私見)이지만 : 「불름(拂菻) 곧 대진(大秦)」과 「시황제(始皇帝)의 대진(大秦)」은 과연(果然) 어떤 관계(關係)였을까? 같은 왕국(王國)이었을까? 전혀 다른 왕국(王國)이었을까? 「개인적(個人的)으로 진지(眞知)하게 다뤄보고 싶다.」
㈠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터전이 바로 대진(大秦)의 강역(疆域)과 겹치기 때문이다.
㈡ 〈「진(秦)」에서 징병(徵兵)과 역(役)을 피해, 정치적(政治的) 박해(迫害) 등으로 무리를 이룬 진인(秦人)들이 유랑(流浪)하며 문전걸식(門前乞食)할 때,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이 동(東)쪽 일부(一部) 땅을 내어주고, 이들을 정착(定着)시켰는데, 이 무리는 자칭(自稱)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진한(辰韓)」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㈢ 이러한 당시(當時)의 “진한(秦韓)”이 갑자기 “반도(半島) 땅 동남(東南) 모퉁이 땅으로 공수(空輸)【항공수송(航空輸送)】될 수 있었을까?” 이건 100% 사기극(詐欺劇)이다. 그러니 ‘무려(無慮) 일천(一千) 년(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다’라는 “신라(新羅)” 역대(歷代) 군주(君主)들의 “릉(陵)” 역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만약(萬若) 「반도(半島) 땅에 반만년(半萬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많은 국가(國家)가 올망졸망 사이좋게 오순도순 살아왔다」라고 가정(假定)해 보면 : 삼천리(三千里) 금수강산(錦繡江山)에 “왕릉(王陵)”으로 인해 국토개발(國土開發)은 염두(念頭)조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온 국토(國土)를 개발(開發)의 열풍(熱風)으로 땅을 파헤치고,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은, 정부(政府)의 보조금(補助金) 또는 지원금(支援金)을 받아먹고 살기 위해, 최전선(最前線)에 투입(投入)되어 뛰어다녔으나, 결과(結果)가 있느냐?
결과(結果)라고는 꼬챙이로 눌러 쓴 모양의 한문(漢文) 몇 자, 추정(推定), 추측(推測), 비정(比定), 미상(未詳) 등으로 이어지는 설명(說明)만이 반도(半島) 땅에 메아리칠 뿐이다. 어디에서 누구의 명문(銘文)이나 지석(誌石) 한 건 올린 적이 있는가? 오직 있는 것은 ‘식민지(植民地) 통치시절(統治時節) 일제(日帝) 하수인(下手人)’들이 찾아내었다는 그것이 전부(全部)다. 그것이 진품(眞品)인지 모조품(模造品)인지 반도(半島) 학자(學者)들은 분별(分別)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그것이 진품(眞品)일 수 있겠는가?
반도(半島) 땅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핵심(核心) 요지(要地)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핵심요지(核心要地)였다」라고 말하는 자가 이상(異常)한 것이다. 왜냐하면 “반도(半島) 땅”에는 옛 왕조(王朝)들과 직접적(直接的)으로 연결(連結)된 유물(遺物) 유적(遺跡)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있다”라고 말할 텐가?
「대진국(大秦國) 또는 불름(拂菻)」의 옛 나라는, ‘이탈리아 로마(Rome) 중심(中心)의 제국(帝國)’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로마제국 곧 비잔틴제국’을 말하는 것이다.
➌ 「서여국(西女國)」은, 위의 고전(古典) 원문(原文) 설명(說明)한 바에 따르면 :
「카스피해(海)【리해(裏海)】와 흑해(黑海)【사해(死海)】사이(間)의 땅, ‘러시아(Russia)…조지아(Georgia)…아르메니아(Armenia)…아제르바이잔(Azerbaijan)’ 등의 ‘카프카스산맥(山脈)【캅카스산맥(Caucasus Mountains)=코카서스(Caucasus) 산맥(山脈)】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던 나라’가 “여인국(女人國)”이었다」라는 설명(說明)이다.
이러한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뒤집을 수 있는 기록(記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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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參考) [출처(出處) : 두산백과] : 캅카스[Kavkaz] : 러시아 남부, 카스피해(海)와 흑해(黑海) 사이에 있는 산계·지역의 총칭. 영어로는 코카서스(Caucasus)·코카시아라고도 한다. 동쪽으로 카스피해(海), 서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해(海)를 경계로 한 지협상(地峽狀)의 지방이다. 캅카스 산계는 카스피해 남서해안의 아프셰론 반도에서 흑해 북동해안인 쿠반강(江) 어귀까지 약 1,200㎞ 정도 뻗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엘브루스산(5,633m)를 비롯하여 디흐타우산(5,204m), 슈하라산(5,068m), 코슈탄타우산(5,144m), 카스벡산(5,037m) 등이 캅카스 산계에 속해 있다. 이 산맥의 북부지방은 프레트카프카지에, 남부지방은 자카프카지에라고 하는데, 화강암과 수정 암석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2,000여 개의 빙하가 있다. 남북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으나, 대개 북쪽은 러시아 연방의 마니치강(江)·쿠마강 지구대(地溝帶)를, 남쪽은 터키·이란과의 국경을 경계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국경 너머 지역까지도 포함한다. 전자(前者)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면적은 약 44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캅카스 [Kavkaz] (두산백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캅카스산맥【Caucasus Mountains)=Caucasus 산맥 (코카서스산맥)】 / 러시아·조지아·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이란·터키
구역 : 볼쇼이캅카스 산맥 · 말리캅카스 산맥
최고봉 : 옐브루스 산 / 높이 5,642m
길이 1,100km
너비 160km
캅카스 산맥(문화어: 깝까즈 산맥)은 캅카스 지방의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있는 산맥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룬다.
캅카스의 주민은 캅카스계 민족(조지아인, 압하스인, 아디게인, 체첸인, 인구시인, 레즈긴인, 아바르인, 라크인, 체르케스인, 카바르딘인, 기타), 인도유럽계 민족(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오세트인, 쿠르드족 등), 투르크계 민족(아제르바이잔인, 카라차이인, 발카르족, 쿠미크인, 노가이인) 등이 거주한다.
◆ 등산상식사전 : 카프카즈[Kavkaz] : 러시아 남부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산계를 부르는 이름. Caucasus(코카서스)(영어)라고도 한다. 중앙부에는 우랄 산맥에서 우랄 강, 카스피 해 서안(西岸)을 따라 코카 산맥으로 이어지는 볼쇼이 코카서스 산맥이 솟아 있다. 유럽에서는 그레이트 코카서스(Great Caucasus)라고 하며, 길이가 약 1,200킬로미터, 넓이 18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산맥이다. 서쪽은 피레네와 알프스로 이어지고 동쪽은 파미르 고원과 카라코람으로 연결된다.
카프카즈는 서부, 중부, 동부로 나뉘며 엘브루즈에서 카즈벡(5,047m)으로 연결되는 중부 지역에 등반성이 높은 고봉들이 모여 있다. 5,000미터 급 14개와 4,000미터 급 12개의 산이 솟아 있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고봉은 엘브루즈(5,642m)이며, 돈 구조룬(4,468m), 나크라 타우(4,451m), 우쉬바(4,700m) 등이 포진하고 있다. 그중 최고봉인 엘브루즈는 유럽 대륙의 최고봉이다. 이 지역은 일찍이 유럽의 알피니스트들이 철의 시대를 열면서 히말라야 진출에 앞서 수많은 등반을 성공시켰던 곳이다. 등반 적기는 7~8월이며 가이드 등반이 활성화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프카즈 [Kavkaz] (등산상식사전, 2010. 10. 7. 해냄)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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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곳에 옛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이 있었으니 「산해경(山海經)의 대황서경(大荒西經)이나 해외서경(海外西經)」에 기록(記錄)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렇다면 「옥저국(沃沮國)」은 어디에 있었을까?
「옥저국(沃沮國)과 여국(女國)」 : 「옥저국(沃沮國)의 동(東)쪽 대해(大海)에 여국(女國)이 있다.」 : 옥저국(沃沮國)은, 흑해(黑海) 서안(西岸), 바로 그곳 땅에 있어야만 흑해(黑海) 동안(東岸)의 땅에 있었던 “여인국(女人國)”에 대한 정보(情報)를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위치(位置)가 된다.
○ 강조(强調)하는 메세지[Message]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는 옛 옥저국(沃沮國)은 없었다」라는 것이다.
곧 「김정호(金正浩)라고 하는 분이 삼천리(三千里) 금수강산(錦繡江山) 방방곡곡(坊坊曲曲) 발품을 팔아 만들고 저술(著述)했다는 대동지지(大東地志)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도대체 그 정체(正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며, 이렇게 개인 한 사람이 국가(國家)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국가(國家)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으로 일생일대(一生一代)를 마쳤다고 전해지는데… …그분에 대한 것은 모조리 극비밀(極祕密)로 취급(取扱)되어 공개(公開)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누구도 김정호(金正浩)라는 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
도대체 뭔가? 더더구나 그분이 저술(著述)했다는 대동지지(大東地志) 속의 함경도(咸鏡道) 땅에 대한 설명(說明)은, 수만리(數萬里)∼만리(萬里)쯤 되는 반도(半島) 땅을 벗어난 서북방(西北方)과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설명(說明)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 이는 바로「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독자(讀者)」분들이시어! 부디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인 오늘날의 ‘동북삼성(東北三省)’ 땅에 「“옛 숙신국(肅愼國)이나 그 후예(後裔)들인 말갈(靺鞨)이 있었다”라는 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에 놀아나지 맙시다.」
“옛 숙신국(肅愼國)의 후예(後裔)들인 말갈(靺鞨)은, 오늘도 동구라파(東歐羅巴) 땅에서 잘 먹으며, 잘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속의 ‘대동지지(大東地志)’로 본 본시(本是)의 함경도(咸鏡道) 땅[제3편]으로 계속(繼續)됩니다.
2025년 02월 14일 [글쓴이 : 문무]
첫댓글 [제3편]에서는 :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는 함경도 땅에 대해,
* 청사 해당 기록
* 만주원류고 해당 기록
* 청기사본말 해당 기록
* 영고탑기략 해당기록
* 세종실록지리지 해당 기록
* 조선왕조실록 해당 기록등을 보면서 :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존재(存在)한 적이 없다. 실재(實在)한 적이 없다"는 것을 고증하려 합니다.
이는 곧 "반도사학"은, "조선과 한민족을 위한 사학"이 아닌 "일제(日帝)와 서세(西勢)를 위한 사학(史學)"이었음을 증명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