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몽룡의 <월매도>와 그 전통
1. 고려 태조 왕건릉과 송죽매
한국에서 언제부터 매화를 그림으로 표현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고려 왕건릉으로 알려진 무덤의 벽화에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매화가 등장한다. 고려 시대 초부터 세한삼우를 그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후 고려 말의 학자 박익(朴翊)의 묘에서도 대나무와 함께 그린 매화가 발견되었다. 박익은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로,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가 관직을 주려고 다섯 번이나 불렀으나 응하지 않은 고려 팔은(八隱)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무덤에 그려진 매화는 대나무와 더불어 박익의 충절을 상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고려 후기에 매화가 많이 그려진 이유는 성리학의 발달과 연관된다. 성리학을 받아들인 고려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삶과 의식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소재인 매화를 상찬하는 시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2. <월매도>와 <설매도>
성리학이 발달하던 조선 시대에는 매화를 더 많이 그렸다. 이때 매화도는 새로운 나라의 창건과 태평성대를 누리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뜻을 펴는 군자의 모습이거나, 현실에서 좌절한 자신의 심회를 매화에 붙여 그려내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뜻이 담긴 조선 시대의 대표적 묵매도는 어몽룡(魚夢龍)의 <월매도(月梅圖)>이다. 어몽룡은 매화도에 관한 한 당대 최고로 평가된다. 그의 <월매도>는 오랜 풍상을 이겨낸 듯한 밑둥이 굵은 고목을 달과 함께 그린 것이다. 비백(飛白)으로 처리한 굵은 줄기의 중간은 툭 부러져 있고, 부러진 줄기에서 새로 난 가지는 하늘에 닿을 듯 힘차게 솟아올라 둥근 달과 벗하고 있다.
이처럼 부러진 가지에서 새로운 가지가 난 매화의 모습은 역경을 이겨 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강직한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특히 여백을 충분히 살려 달에 닿을 듯 뻗은 새 가지의 공간 구성은 시적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모습의 매화도는 조속(趙涑)과 조지운(趙之耘)으로 이어져 조선 중기 매화도의 전형을 이루었다. 이는 같은 시기 중국의 매화도가 큰 화면에 가지가 휘어져 내려오면서 많은 꽃을 달고 있는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한국 매화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선비의 기개와 충절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오달제(吳達濟)의 <설매도(雪梅圖)>가 있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아 불과 29세의 나이에 무참히 살해된 사람이다. 그는 여러 폭의 매화도를 남겼는데, 그 중 〈설매도>는 눈을 맞고 꽃을 피운 매화에 바위와 대나무를 함께 그려 그 기백을 더하였다. 후에 영조는 이 매화도에 그의 충절을 기려 시를 지었다.
3. 정약용의 <매조서정도>
매화에 새를 함께 그려 우의적인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 가지에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까치를 그려 넣는 것이다. 조속(趙涑)의 <고매서작도(古梅棲鵲圖)>는 그러한 뜻을 살리면서도 그의 인품과 고결한 기상이 반영된 품격 있는 그림이다.
조속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지만 포상과 관직을 마다하고 향리로 돌아간 지조 있는 인물이다. <고매서작도>에서 매화는 패기 있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듯 먼 곳을 응시하는 까치는 늠름하다. 매화의 간결함과 까치의 구성이 여백과 어울려 조형상 극치를 이루는 작품이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매조서정도(梅鳥抒情圖)>에서는 매화에 담은 애절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시를 쓰고 거기에 삽화를 그린 형식으로, 발문을 통해 귀양살이 중에 부인이 보내온 헌 치마를 오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딸에게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배 생활의 외롭고 고달픈 심회를 매화에 실어, 매화에 매실이 무성하게 열리는 것처럼 좋은 날이 오기를 기약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4. 심사정의<파교심매도>
매화에 얽힌 고사를 소재로 그린 그림들이 있다. 이른 봄, 매화를 찾아 눈 쌓인 산을 다녔다는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의 고사를 그린 ‘탐매도’, 또는 ‘심매도’, 매화를 좋아하여 고산에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 삼아 일생을 은거하였던 송나라 임포의 삶을 그린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등을 말한다.
심사정(沈師正)의 <파교심매도(擺橋尋梅圖)>는 탐매도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모두 갖춘 걸작이다. 심사정 말년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행장을 차린 선비가 나귀를 타고 막 파교를 건너가려는 모습을 담고 있다. 눈 덮인 산은 덮칠 듯 겹쳐져 있고, 헐벗은 가지에도 눈이 쌓여 있는데, 매화를 찾아 나선 선비는 의연한 모습이다. 시동은 매화를 발견하면 매화음에 쓸 음식과 지필묵, 그리고 악기를 메고 가는지 긴 막대에 물건을 꿰어 메고 가고 있다. 설산에 핀 매화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선비의 이상향을 나타낸 것이다.
5. 개성 있는 필치의 <매화서옥도>
매화서옥도는 일정한 형식을 보이는 주제이다. 서호 근처의 고산에 은거하던 임포는 주변에 매화를 가득 심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따라서 한편에 물이 있는 산언덕에 조그만 서옥(書屋)이 있고 은거하는 선비가 있거나, 학이 함께 그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요소가 함께 다 그려지기도 하지만 매화가 핀 산언덕에 서옥이 있는 것만으로도 매화서옥도라 했다.
조희룡(趙熙龍)의 <매화서옥도>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매화도를 잘 그렸을 뿐만 아니라 매화를 심어 감상하고, 매화시를 읊고, 자신의 거처를 매화 백영루라 할 만큼 매화를 유난히 좋아하였던 조희룡은 임포의 삶을 동경하고 그처럼 은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매화서옥도>에 담아냈다.
그의 <매화서옥도>는 난만히 피어 마치 눈이 내린 것 같은 매화나무에 둘러싸인 조그만 서옥에서 글을 읽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선비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산과 나무를 이루는 필치는 분방하다. 이러한 필치는 당시 유행하던 추사체와 흡사하며 기존의 화보나 그 화보를 본뜬 다른 화가들과 구별되는 개성 있는 모습이다.
거친 듯 분방한 조희룡의 개성은 그의 <홍매도>에서도 볼 수 있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 같은 굵은 줄기에 붉은 매화가 가득 피어 있는 <홍매도(紅梅圖)>는 꽃송이 하나하나를 천녀가 내려앉은 것처럼, 또는 부처의 화신처럼 생각하고 그렸다는 그의 말대로 송이마다 둥근 꽃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조희룡의 매화도는 문인들의 고결한 이상을 표현한 상징물에서 나아가 혼신을 다한 한 폭의 예술품으로 승화되었다.
한국의 매화도는 독립된 화재로 그려지기도 했고, 대나무나 소나무, 달과 함께 그려지기도 했다. 또한 새와 함께 그려지기도 했으며, 매화에 얽힌 고사가 그림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러한 형식은 비슷한 문화권을 형성하던 중국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매화도는 부러진 줄기에 새 가지가 곧게 뻗어 있는 조선 중기 어몽룡의 매화도, 화려하면서도 역동적인 조희룡의 매화도 등 시대의 미의식을 반영하면서 매화의 성정과 기상을 담는 주요 소재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 이선옥 |
첫댓글 예원님! 노고 많으셨습니다, 귀한 옛 작품 감상 잘하고 갑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보고 감사히 담아감니다.
감사히 잘보았습니다...
귀한작품 감사드립니다...
좋은 작품 감사드립니다.
귀중품 이군요.
ㅈㄱ하고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