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1일 [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트루먼 쇼와 생명의 빵
오늘 복음도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으면 하늘 나라에
도달할 것이라는 성체성사와 관련된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라고 하실 때 의아해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것을 본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 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로서 인정받으셨음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당신을 먹는 이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 하십니다.
나중에 이들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씀에 이해하기 어렵다가 다들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왔을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지 못한 ‘표징’이 분명히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오늘 복음 사이에 우리가 간과하는 하나의 표징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은 이 표징과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같은
것이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두울 때 제자들은 호수 중앙에서 큰바람에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이들은 지쳐있는 데다 겁까지 집어먹습니다. 예수님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다”(I am who “I AM”)라는 말은 탈출기 3,14절에 하느님께서 “나는 나다”라고 하실 때의 하느님 이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맞아들이려 할 때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려던 곳은 어딜까요? 우리는 누구나 하늘 나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그만한 사랑의 수준을 가진 이들만 들어갑니다. 우리는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 세상 것에 집착할 때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집착은 잃는 두려움 때문에 생깁니다.
이 두려움이 없어져야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듯 사랑 실천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셨다면 우리는 이제 이 지상 것에는 집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성체를 영해야 합니다.
BTS나 김미경 강사 등이 세상 모든 것을 얻고도 우울증이나 번아웃에 고생하였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모든 것을 다 잃고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좋은 예는 영화 ‘트루먼 쇼’(1998)입니다.
트루먼은 조작된 세상에서 연기자들과 살며 세상에 생중계되는 스타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사는 세상이 전부라 믿었고 감독은 트루먼의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연출하여 트루먼이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 이가 트루먼을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사람인 실비아입니다.
실비아는 직장을 잃을 각오를 하는 키스와 진실한 말로 자신은 피지라는 곳에 있다고 말해줍니다.
이때부터 트루먼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실비아에게 갈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버리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비아의 진정한 희생은 트루먼이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 거대한 거짓 방송 세트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저도 성체를 많이 영했지만,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하시는 말씀에 삶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체는 하느님께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다 받은 사람이 세상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아직 성체가 하느님이라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사랑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악해지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고 성체는 그 죄를 없애는 분이십니다.
성체 안에 계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우리 부모처럼 살과 피를 나를 위해 내어주시는 분으로 믿읍시다.
그러면 이미 목적지에 닿은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1일 [연중 제19주일]
복음: 요한 6,41-51
오늘 더 깊은 감사의 정으로 성체를 영해야겠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매일 매일 하루 세끼 꼬박꼬박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면서 이런저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빵, 식사라는 것,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 삶 속에서 먹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맛있는 식사를 정성껏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복음적인 일인지?
그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식사로 인해 우리의 생명이 지속되니, 그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지상에서의 육신적인 빵의 중요성도 이토록 중요시여기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빵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수 없는 천상의 빵, 매일의 성체 성사를 통해 영하게 되는
생명의 빵에 대한 가치와 의미 부여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 깊이 성찰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세상의 빵이 지니는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히 먹었는데, 돌아서면 또 먹어야 합니다.
또 다시 허기와 갈증은 반복되고 먹어도 먹어도 온전히 충족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빵이 지니는 유효 기간은 길어야 사흘이요 일 주일입니다.
그래서 늘 내일 먹을 빵에 대해 걱정하고 언제나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는 너무나 은혜로운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과분하게도 예수님의 크신 배려와 희생으로 그 영원한 생명의 빵을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찾을 수 있고,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더 깊은 감사의 정으로 성체를 영해야겠습니다.
그 성체로 인해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으니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찬미의 송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9주일 강론>
(2024. 8. 11.)(요한 6,41-51)
<말씀의 표현이 아니라 뜻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3ㄴ-51).”
1) 여기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너희 조상들이 먹은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아니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47절의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50절의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절의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뜻이 같은 말씀들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은 나 자신이다.”입니다.
2) 예수님을 받아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아주 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먹는다.’는 말로 표현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나타내는 데에는 ‘먹는다.’는 말이 가장 적절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완전한
한 몸을 이루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완전한 한 몸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완성’인데, ‘먹는다.’는 말이 그 ‘믿음의 완성’을 나타내기에 가장 좋은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우선 먼저 믿고, 깊이 묵상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믿으면 언젠가는 온전히 깨달을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지금 이 말은, “이해가 안 되어도 그냥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말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언젠가는 선명하게 이해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라고 격려하는 말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0).”
이 말씀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차단하시고 사람들이 그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시지 않았는가? 정말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면 그 길을 왜 차단하셨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2-24).”
하느님께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죄인들’의 접근을 막으신 일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은 바로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창세 5,24), 에녹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은 허락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셨다는 것은, 그 전에는 그 길이 개방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 때문에 ‘죄’ 라는 것이 인간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 일이 없었다면, 그 길이 차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또 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담 때문에 차단되었던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개방됩니다(묵시 22,2).
그 나라는 의인들만 들어가서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