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실체| 29사랑방
鷄龍眞人朴成眞 |조회 16 |추천 0| 2015.07.14. 20:55
♡ 일제가 왜곡(歪曲)한 국사(國史),
- 위막조선과 한사군의 실체를 밝힙니다.
☆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記) 중 번한세가(番韓世家) 상(上) 편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與唐堯로 竝世하니 堯德이 益衰하야
여당요 병세 요덕 익쇠
來與爭地不休라. 天王이 乃命虞舜
래여쟁지불휴 천왕 내명우순
分土而治하시고 遣兵而屯하사 約而共
분토이치 견병이둔 약이공
伐唐堯하시니 堯乃力屈하야 依舜而
벌당요 요내역굴 의순이
保命하야 以國讓하니라.
보명 이국양
於是에 舜之父子兄弟가 復歸同家하니
어시 순지부자형제 부귀동가
蓋爲國之道는 孝悌爲先이니라.
개위국지도 효제위선 」
「단군왕검 때는 당요(당나라 요임금)와 같은 때인데, 요의 덕이 갈수록 쇠하여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천왕(단군왕검)께서 우순(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보내 주둔시켰다. 우순과 함께 당요를 정벌할 것을 언약하시니,
요임금이 힘에 굴복하고 순에게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나라를 넘겨 주었다.
이때 순 부자와 형제가 다시 돌아가 한집안을 이루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함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본문을 생략하고 번역본만 기술합니다.
「9년 동안 홍수가 일어나 그 재앙이 만민에게 미치므로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어
우나라 순임금과 약속하게 하시고 도산(塗山) 회의를 소집하셨다. 순임금이 사공(司空) 우(虞)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받아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때 감우소(監虞所)를 낭야성(낭耶城)에 설치하여 구려(九黎) 분쟁에서 논의된 일을
결정하였다. 서경(書經)에 이른바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멀리 산천을 바라보며
제사 지내고, 동방 천자를 알현하였다." 는 구절은 바로 이 내용을 말한 것이다.
진국(辰國: 진 단군조선)은 천제(天帝:하느님)의 아들(天子)이 다스리므로 5년에 한번
낭야를 순행하였으나 순(舜)은 제후이므로 진한(辰韓)에 조근(朝覲)한 것이 네번이었다.
이때 단군왕검께서 치우천황(배달국 14세 환웅)의 후손 중에서 지모와 용력이 뛰어난 자를
택하여 번한(番韓) 왕으로 임명하고 험독(險瀆)에 수도를 세우게 하시니, 지금은 왕검성이라
칭한다.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왕의 후손이다. 용맹과 지혜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단군께서 불러 만나보시고 기특하게 여겨 곧 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우순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셨다.
경자(BC. 2301)년에 요수(遼水) 주위에 12성을 쌓으니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용도(埇道), 거용(渠용),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 그것이다. 」

* 후에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적자(嫡子) 유리를 태자로 봉할 것이라고 하자, 왕비였던 소서노
(召西弩)는 자신의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 염려하다가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백제성으로 옮겨와 터를 잡고 고주몽의 재가를
요청하므로, 소서노를 제후로 책봉하고 어하라(於瑕羅) 란 칭호를 부여했다고 합니다.
이후에 한반도로 옮겨와서도 국호와 임금의 칭호는 백제와 어하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군요.
* 번한조선은 이후 75세 기준왕까지 이어집니다.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이 번조선에 망명을 구하므로 북부여를 일으킨 해모수 단군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번조선 왕은 때를 놓쳐 상하 운장을 떼어주고 위만 박사로 삼아 지키게
하였습니다. 후에 위만이 이를 배반하고 침략해오므로 기준왕은 바다로 도주하여 익산으로
간뒤 돌아오지 않으므로서 번한은 마침내 문을 닫게 됩니다.

★ 86년 후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때에 한(漢) 무제(武帝)가 침략하여 위만정권을 무너뜨리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습니다. 국사 교과서에 나온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하북성인 지금의 난하 임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