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연 "이기는 전략 아니라 차별하는 전략…이동권 이행 약속, 인권 교육 계획하라"
'사회적 약자와 여론전 맞서기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지하철 시위를 사례로.pptx'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서울교통공사 홍보실 언론팀 직원 A가 작성한 문건 제목이다. 그는 표지 우측 하단에 서울교통공사 로고를 단 이 PPT 파일을 3월 4일 사내 게시판에 공개했다. 해당 문건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박경석 상임공동대표)가 어떤 단체인지, 이들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여론전'을 펼쳐야 하는지 등 공사의 대응 지침이 구체적으로 적혔다. 3월 17일 YTN 보도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교통공사는 사과문을 내고 "한 직원이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사내 자유 게시판에 올린 것으로, 공사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전장연은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라며 반발했다.
3월 4일 서울교통공사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사회적 약자와 여론전 맞서기' 문건 내용. 전장연과 공사의 갈등을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전쟁?"이라고 빗대거나, 장애인·노숙인·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을 "언더 도그마와의 싸움" 이라고 표현한 내용도 있다. 해당 문건 갈무리
25쪽으로 된 해당 문건에는 전장연을 향한 혐오가 그대로 담겨 있다. 문건에는 장애인 지하철 시위가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약하다는 '언더 도그마'가 지배 논리로 자리 잡은 이슈"라면서 "이성보다 감성이 더 중시되며, 원칙과 절차가 유명무실해진다"고 돼 있다. "공사 실점은 최대한 줄이고, 상대의 실점 요소를 찾아 가면서 '여론전'에 장기 대응해야 한다"며 "충분한 공감 및 (예산·공간 문제 등으로 인해 근본적인 장애인 이동권 해결은 불가하다는) 호소가 필요하다. 별개로 교통 약자를 위한 서비스는 실효성이 있든 없든 언론 플레이용으로 좋은 소재"라고도 했다.
전장연에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언론에 직접 자료를 제공한 정황도 등장했다. 문건에는 '여론전'을 위한 구체적인 대응 전략으로, "바퀴를 열차와 승강장 틈 사이로 끼워 넣기, 휠체어로 문을 가로막기 사진 확보 후 '자연스럽게' 알리면 고의적 열차 운행 방해 증빙하는 것이 됨", "한 시민이 '할머니 임종 봐야 하는데 시위 때문에 못 간다'라고 현장에서 울분. 전장연 측 표정 변화 없이 '버스 타고 가세요' 답변. 여론전 위한 보도 자료 준비 중 정보 확인 후 시민 피해 상황 알리는 소재로 활용" 등이 제시돼 있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보도하는 진보 언론을 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특히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를 향해 "전장연 대표가 창립 멤버로 포함돼 있는 완전한 당 기관지"라며 "약자는 선하다는 기조의 기성 언론, 장애인 전용 언론 조합과 싸워야 한다"고 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3월 18일 서울교통공사 본사 앞에서 문건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김상범 사장의 공개 사과 및 사퇴, 장애인 이동권 이행 등을 요구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문건이 공개된 다음 날인 3월 18일 전장연은 혜화역을 출발해 서울교통공사가 위치한 답십리역까지 70번째 '지하철 출근 시위'를 재개했다. 2월 22일 진행된 대선 TV 토론에서 이동권 예산 확보를 약속한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의 발언 이후 시위를 잠정 종료한 지 한 달 만이었다. 시위를 마친 후 서울교통공사 본사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연 전장연은 "분노를 넘어 비참한 마음이 든다"며 "해당 문건을 통해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하는 서울교통공사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저급한 인식을 가지고, 혐오를 조장하고 행동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만들고 실행한 것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전장연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앉아 있던 휠체어에서 내린 뒤 한 손으로 바닥을 지탱한 채 주저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나도 얼마 전 한성대입구역에서 승강장과 지하철 사이에 바퀴가 끼어서 이렇게 떨어졌다. 승강장의 간격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장애인들이 다치고 중상을 입었다. 고쳐 달라고 요구해도 고쳐 주지 않으면서, 문건에는 우리가 승강기에 일부러 바퀴를 끼워서 열차 운행을 지연시켰다는 내용이 담겼다"며 문건에 제기된 '고의 운행 방해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정부가 교통약자편의증진법에 규정된 장애인 이동권 예산을 보장하지 않고 있기에 시위를 계속 이어 갈 수 밖에 없다며, 법에 명시된 장애인 이동권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책임 있게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대통령이나 서울시장 한 사람의 몫이 아니다. 1999년 오이도역 리프트 사망 사건 이후 21년간 외쳐 온 목소리에 시민들도 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자회견에서 발언 중인 전국장애인철폐연대 박경석 상임공동대표. 뉴스앤조이 나수진
공사가 시민 불편을 내세우며 장애 단체와 시민들을 갈라치기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황인준 활동가는 "지하철 선전전에 참여하며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묵묵히 지켜보며 힘내라고 응원해 주신 시민들도 여럿 있었다. 또한 많은 언론이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다루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장애인 이동권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서울교통공사는 장애인을 시민들과 싸우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연대 발언에 나선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지오 공동집행위원장도 "서울교통공사는 장애인 지하철 시위를 장애인과 시민의 싸움으로 편 가르기 하면서 시민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서울교통공사는 어떻게 잘 차별할 수 있을지를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포함한 교통 약자들이 안전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환경과 예산을 검토하고, 서울시에 협조 요청을 했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차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차별금지법이 조속히 제정돼야 한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이번 문건을 통해 서울교통공사의 '혐오 여론전' 기획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진은선 활동가는 "서울교통공사가 언급한 것은 이기는 전략이 아니라 차별하는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들이 차별을 주도한 증거들이 명백하다며 "서울교통공사는 개인의 잘못이라며 꼬리 자르기 하지 말고 이동권 이행 약속과 인권 교육 계획이 담긴 제대로 된 사과를 하라"고 말했다.
<비마이너> 하민지 기자는 "장애인 시위를 수십 번 넘게 취재하면서 봐 온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의 태도를 생각할 때 이번 문건이 나온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사 직원들은 시위 현장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활동가의 얼굴 앞에 들이대고, '대단한 일 하시네요', '정말 멋집니다' 같은 말로 조롱하는 등 혐오와 모욕을 부추겼다"고 했다.
또 "공사는 문건에서 할머니 임종을 지켜야 한다는 시민의 절박한 상황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장애인 활동가가 자신도 이동할 수 없어 임종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다며 울며 죄송하다고 사과한 사실은 고의로 배제했다"며 "장애인에게 이동 편의를 적용하기는커녕 사실을 조작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말했다.
이들은 장애인 이동권이 실현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며, 서울교통공사 김상범 사장의 사퇴 및 오세훈 서울시장의 공개 사과, 재발 방지를 위한 인권 교육 등을 촉구했다.
첫댓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배려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기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