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동 '책방' 골목
'없는 책 없어' 전국 최대 규모 부산문화의 상징 '지식창고'

켜켜이 쌓여있다.
알록달록 색색의 책들이 쌓이고 쌓여 가을 산처럼 만산홍엽(滿山紅葉),단풍이 들었다.
깊은 지층이 땅 위로 솟아오르듯,숨겨두었던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솟아나 만화경처럼 온통 펼쳐져 있다.
언제였던가?
문학의 열정을 못 이겨 흘러흘러 들어왔던 '보수동 책방골목'.
이곳에서 책방의 두꺼운 먼지 속 곰팡내 맡으며 살았던 몇 년 동안,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사람들을 책 속에서 만났다.
'도스토옙스키','헤르만 헷세','네루다','김수영'과 '이청준' 그리고 '루쉰'….
서가와 서가 사이를,책과 책 사이를 모험하듯 헤집고 다니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가슴 떨리는 연인을 만나듯이,그렇게 극적으로 동서양의 문호들을 만나곤 했던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냉철한 삶의 나침반을 얻었고,어떤 이에게서는 맑고 투명한 영혼의 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지적 충만감'이란 그 도도한 물결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호사도 부렸다.
서점 안을 온통 헝클어 놓고서야 겨우 책 한권 손에 쥘 수 있던,
헌책 속 '보물찾기'의 묘미가 더할 나위 없이 짜릿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나이 지긋한 서점 주인에게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는 불편도 감수해야 했었다.
개인적으로 책 욕심이 많았던 터라,이곳에서 수집한 희귀본들이 몇 권 되는 것 같다.
이광수의 '유정',모윤숙의 '렌의 애가',김동환의 '국경의 밤',김동리의 '등신불'등과 '사상계',
강제 폐간 전의 '창작과 비평' 등의 잡지류가 이 골목에서 얻은 대표적 수확물(?)이다.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의 지식창고'이자 '부산문화의 상징'.
부산 사람이라면 이 골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까?
대청동 교차로에서 보수동 방면 바로 입구에 있는 전국 최대규모의 헌책방 골목.
150여 미터에 걸쳐 좁은 골목길에 50여 개의 서점이 빼곡히 차 있는 이 골목은,
고서와 신간,전문서적과 대중서적,예술잡지 통속잡지,외국 원서와 번역본. 등
없는 책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보유권수도 상상을 초월한다.
서점마다 취급하는 서적이 달라 단골고객도 서점마다 다른 것이 이 골목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6.25 전쟁 발발 직후 구덕산 일대와 보수동 뒷산 등에는 피난 온 많은 학교가 '천막교실 수업'을 했었다.
때문에 학생들의 통학로였던 보수동 골목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자연히 유동인구가 많은 이곳에서 책을 팔려는 사람들과 책을 살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노점 헌책방이
성황을 이루었고,이 노점들이 하나둘 현재의 골목에 자리 잡게 된 것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시초다.
50년이 훌쩍 지나간 시절의 일이다.
한 때 70여 곳이 성업하던 이 골목은 이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50여 곳으로 줄었다.
하루 이용고객도 하루 평균 3천명에서 이제 600여 명도 채 안된다고 한다.
'헌책 삽니다.' 입간판 옆에 '신간 입하' 간판이 함께 공생하는 지금은 '신간전문서점'만도 절반 가까이나 된다.
'헌책방 골목'이라는 명성의 무게가 다소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러나 귀한 책 싸게 사려고 흥정하던 시절의 따뜻함과 한권의 책을 구하기 위하여 종일 책먼지를 뒤집어 쓰던 낭만,책을 사고 난 후 '옥생관'의 자장면이나 골목 한쪽의 '만두집',찹쌀도너츠가 맛있던 '빵집'의 주전부리에
천하가 아름답던 시절의 향수는,골목골목마다,책 사이사이마다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과 철학과 사상이 이합(離合)되고 집산(集散)되던 곳.
다양한 정보와 지식이 입고(入庫)되고 출고(出庫)되던 이 곳이,매년 열리는 '책방골목축제'처럼,
하루하루가 '축제'같은 빛나는 시절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원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