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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 “보라” 또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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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보라” 또 “보라”
성탄 시기에 들어와 우리가 계속 읽는 요한복음 1장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말씀이 이 세상에 오신 얘기로 시작되는데 말씀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도 맞아들이지도 않았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주님을 증언하게 하는데
사람들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아 그리스도이신지 궁금하여 묻습니다.
그저께 복음에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자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답하고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재차 묻자,
요한은 다시 “아니다.”라고 답하고, 다시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어저께 복음에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요한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똑같은 증언을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탄생하시어 사람들 가운데 오신 주님을
사람들이 몰라보고 자기를 향하자 거듭 자기가 아니라 주님을 보라고 합니다.
“보라” 또 “보라”
이 두 번의 초대에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이 갈립니다.
본 사람이 제자들이고 보지 않은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오늘 보고 주님을 따라간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보지 않고 그래서 돌아선 사람은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보는 것은, 제자 되는 것의 시작, 곧 출발점입니다.
흘깃 보든 똑바로 보든 보는 것이 소위 관상이고,
관상이 제자 되는 것의 시작이요 출발점입니다.
그래도 제자가 되려면 제대로 보기 위해서 방향을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흘깃 보든, 곁눈질로 보든, 지나치며 보든, 정면으로 보지 않던 사람은
방향을 틀어 주님을 정면으로 봐야 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따라가야 합니다.
먼발치에서 또는 먼빛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려면 가까이 다가가 또렷이 봐야 하고,
더 나아가 함께 살며 주님을 더 그리고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觀察, 이것이 관상의 더 깊은 단계이고,
이것이 어쩌면 클라라가 얘기하는 관상의 두 번째 단계
곧 “Considera”의 단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은 관찰을 통해 통찰하게 되었을 것이고,
스승 세례자 요한의 증언대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심증을 확실히 갖게 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다른 제자들도 데리고 가 주님의 제자가 되게 했을 겁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이 보라고 한 대로 봄으로써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우리도 보라는 주님은 보지 않고 세례자 요한만 보고 돌아간
어리석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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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개의 증언입니다. 이는 마치 소개장처럼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두 명의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증언하는 소개장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가 형 베드로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증언하는 소개장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은 우리에게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것은 ‘행위’를 나타내는 ‘일곱 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의 두 가지 행위요, 만나서 함께 있는 중의 세 가지 행위요, 그리고 만난 후 그 결과로 발생하는 두 가지 행위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에는 증언을 “듣는” 행위와 들은 그분을 “뒤 따라르는” 행위요,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는 말씀을 주고받으며 “함께 가는” 행위와 그분이 묵으시는 곳을 “보는” 행위와 본 그곳에서 “함께 머무는(묵는)” 행위요, 그리고 만남 이후에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는(말하는)” 행위와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행위로 표현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그 것에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너머서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뒤따라간다.”는 것, 역시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너머서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당신을 찾아 나서면,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무엇을 원하느냐?”하시며, 진정 찾아야 할 것을 찾게 해주고,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도록 일깨워주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니,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참된 것’, 곧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는 묵는 곳을 “와서 보라”는 초대는 원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입니다. 또한 “함께 가” 주시며, 동행하여 당신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하고 이끌어주십니다. 손수 동반자가 되어 주시고, 반려자가 되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묵으시는 곳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며, “함께 묵으십니다.” 사랑을 속삭여 주시며 흠뻑 적셔주십니다. 이렇게 사랑을 먹은 이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하고 “증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갑니다.”
이처럼, 이 ‘일곱 가지의 행위’가 바로 오늘 우리가 제자로서 걷는 길이요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나에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아버지께 가는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은 주님께서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서로에게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함께 아버지께 가는, 이토록 아름다운 구원의 동반자들이요, 반려자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오늘도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어,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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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와서 보아라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문제를 알면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해결하기보다 남을 탓하기에 급급해합니다. 소이 잘 난 사람은 많은데 진정으로 이웃을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없고,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 나서 문제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삶은 없고 입술만 살아 움직이면 앞날이 밝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37).하고 말하였습니다. “바라봄의 절정은 우리를 바라보시던 그분을 우리가 비로소 바라보는 것입니다”(발타살).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주님은 오래전부터 나를 애타게 찾으셨고, 언제나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 치며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스승 노릇을 하지 않고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하며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는 것이 요한의 진심입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을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주제를 알고 분수를 지켰으며 있어야 할 자리를 고수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나의 삶이 이러니 너희도 내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났으면 전해야 합니다. 신앙의 기쁨을 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삶의 자리,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
우리의 삶을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필리피2,15)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희생 봉사하는 삶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사랑으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증거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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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다큐멘터리 ‘우리들의 우주’를 보면서 지구에 계절이 생긴 이유를 알았습니다. 원시 태양계에는 지구와 가까이에 지금은 없어진 행성 테이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중력 때문에 테이아는 지구와 충돌하였고 그 충격의 여파로 지구는 23.5도 기울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충돌로 떨어진 잔해들이 모여서 지금의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계절의 변화가 생긴다고 합니다. 달은 지구의 회전축이 23.5도 기울어질 수 있도록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달의 인력이 조수간만의 차이를 만들면서 다양한 생명이 살아가는 갯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양이 빛과 에너지를 지구에 보내고 있어도 45억 년 전에 원시행성 테이아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 결과로 달이 생기지 않았다면 지구는 지금처럼 생명이 넘쳐나는 푸른 별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에는 마리아의 순명, 요셉의 순명이라는 선택이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였던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콜레스테롤’에 대한 강의도 들었습니다. 저도 혈액검사를 하면서 의사 선생님께 콜레스테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콜레스테롤이 조금 높은 편이라고 하였습니다. 콜레스테롤은 간에서 만들어지는 물질이라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이라는 이름은 각각 담즙과 고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chole- 와 stereos, 그리고 알코올을 의미하는 -ol 이 합쳐져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이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우리 몸에 염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은 염증을 없애주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이 적으면 우리의 몸은 영양실조와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은 세포의 형성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세포의 뼈대를 이룬다고 합니다.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은 적당한 양의 콜레스테롤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의 양을 조절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근본적으로 생활습관을 건강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바람을 탓하는 것은 나뭇잎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탓하는 것도 나뭇잎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무에 붙어있는 동안 충실하게 빛을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지난 3년간 코로나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바이러스를 탓하는 것은 팬데믹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치료약을 만들고,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건강한 생활습관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여정에도 가라지와 같은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시편 23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악의 세력을 탓하고, 고통을 탓하는 것은 신앙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악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이 걸림돌이 되어서 하느님과 멀어지기 보다는 고통을 디딤돌로 삼아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마음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일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형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의로운 일을 실천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신앙생활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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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행복의 욕망 충족 이론을 단순하게 공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 = 소유(have) / 욕망(want)
행복은 욕망을 줄이거나, 소유를 늘릴 때 커진다는 것을 이 공식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소유를 놀리는 방법은 ‘채움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유가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욕망이 너무 크면 소유가 다른 이에 비해 많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두 번째 방법이 중요합니다. 욕망을 줄이는 것으로 ‘비움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공식의 분자(소유)와 분모(욕망) 중 어떤 것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편하게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욕망을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심리학자 브릭만과 그의 동료들은 거액 복권 당첨자와 척추 손상 환자들의 삶을 조사했습니다. 대다수의 복권 당첨자들은 당첨 초기에 행복감이 급격하게 상승했지만, 1년이 되지 않아 행복도가 당첨 이전 수준 또는 그 이하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고로 사지가 마비되어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척추 손상 환자들은 초기에는 절망감에 휩싸여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복도가 서서히 회복되어 나중에는 복권 당첨자들보다 더 행복도가 올라갔습니다. 소유를 늘리는 채움의 삶보다 욕망을 줄이는 비움의 삶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라고 물으십니다. 소유를 찾는지, 욕망을 찾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요한 1,39)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삶을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 모범은 채움의 삶일까요? 아니면 비움의 삶일까요? 바로 비움의 삶이었습니다. 욕망을 줄이면서 참 행복의 길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행복을 보았기에, 그들은 큰 기쁨 안에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하길 원하는 ‘우리’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비움의 길을 따라서 참 행복의 길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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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엇을 그릴지 알기 위해서는 그리기를 시작해야 한다(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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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행복한 제자의 삶
-주님을 증언하는,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삶-
-“신부님,
충전 잘하고 왔습니다. 수도원에서 힘 받아서 속세에서 홧팅하면서 살아가야지요! 약발 떨어질 때쯤 충전하러 또 가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멜라니아”
조용히 며칠간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주님 안에 머물다간 아름다운 분의 카톡메세지입니다. 즉시 수도원 하늘길 사진과 더불어 드린 답신입니다. 이번 수백통 드렸던 성탄 카드 답신의 전형적 사진에 문구입니다. 이름 앞에는 반드시 ‘사랑하는 형제님(또는 자매님)’이란 말이 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
새해 수도원 하늘길 축복선물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뿐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긴 축복 말씀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세 말마디가 계속 마음에 긴 울림을 줍니다.
1.“베네딕도 교황님의 마지막 말씀, ‘Lord, I love you!(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전 수십년동안 왜관 수도원에 사셨던 독일 출신의 노수사님의 노동으로 거친 손을 보며 짧은 독일어로 ‘이히 리벤 지(Ich liben Sie;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말하면, 활짝 웃으면서 ‘정말’ 하고 한국어로 대답하던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사랑한다 고백하면 정말 고백대로 이루어지니 우선 용감하게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2.“We thank God for the gift of Benedict 16”(우리는 베네딕도 16세의 선물에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새해 첫날 삼종기도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3.“Benedict spent his life seeking the face of Jesus(베네딕도는 평생 예수님의 얼굴을 찾았다)”라는 롬바르디 신부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증언자로 주님의 소명에 충실했던 주님의 제자, 참으로 성인답게 사셨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한폭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귀감이 되는 살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차례대로 그 중요한 내용을 살펴 봅니다.
1.“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활짝 사랑의 눈이 열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 보며 최초로 자기 제자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참으로 순수한 영혼의 요한 세례자입니다. 정말 제자든, 이웃이든 사랑한다면, 그 최고의 사랑은 예수님을 증언함으로 예수님께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사심없는 순수한 사랑이 참 반갑고 감사합니다.
때가 되자 미련없이, 집착함 없이 제 사랑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떠나 보내는 참으로 자신을 비운 무욕의 겸손한 요한 세례자의 삶이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질투심이나 경쟁의식이 전무해 보이니 말입니다. 문득 어제 쓴 “겨울나무가 좋다’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본질(本質)로 서있는 겨울나무가 좋다
하늘만을 향해 살아왔기에 저리도 훌쩍 컸나 보다
별만을 사모(思慕)하였기에 저리도 초연(超然한)가 보다
수도원 하늘길옆 가로수 메타세콰이어 겨울나무들”
침묵과 고독중 겨울 동안거(冬安居)중인 겨울 배나무들이 흡사 기도하는 수도승들 같습니다. 이런 본질로 서있는 겨울나무같은 순수한 영혼의 사람이 바로 요한 세례자입니다.
2.“무엇을 찾느냐?”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자기를 따라오는 요한의 두 제자를 보시며 물으십니다. 아, 이 물음은 주님을 찾는 구도자들인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찾는 자’가 수도승입니다. 어찌 수도승뿐입니까! 모두가 내면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그리워, 하느님을 목말라 하느님을 찾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참 사람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시편의 실존적 고백입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의 그립나이다.”(시편63,2)
저절로 연상되는 요한1서 말씀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애타게 끊임없이 찾는 자들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의 씨가 상징하는 말씀이, 성령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1요한3,9)
이런면에서 주님을 증언하면서 이웃을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도록 이끄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무죄한 사람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주님의 증언자들을 일컫는다 생각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자도 그렇습니다.”(1요한3,10ㄴㄷ)
참으로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자기 형제를 진정 사랑하는 주님의 증언자는 요한 세례자처럼 자기 제자나 형제를 자기가 아닌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3.“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자가, 무엇보다 그분과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이가 제자입니다. 여기 ‘머물다(stay)’라는 그리스어로 ‘메네인(menein)’은 ‘살다(abide)’ 또는 ‘머무르다(remain)’를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항구한 관계를 뜻합니다.
바로 제자들의 이 말씀 안에는 스승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보고 배우며, 항구하고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싶은 염원이 배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소명에 응답한 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늘 당신 안에 머무르기를 바라십니다.
4.“와서 보아라.”
감격에 벅찬 주님의 환대의 초대입니다. 늘 우리를 “와서 보라”고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와서 사랑의 주님으로부터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수도원 팜프렛 사진과 함께 씌어진 성구가 바로 “와서 보라”란 초대입니다.
정말 "와서 보아라"할 정도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우리의 삶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주님이 없는 집, 정말 얼마나 썰렁하고 쓸쓸하고 공허하겠는지요! 모든 것 다 지녔어도 그 안에 주님의 기쁨이, 주님의 평화가, 주님의 희망이,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빛이, 주님의 생명이, 주님의 영이 없다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일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초대에 감읍하여 응답함으로 마침내 주님의 첫 제자들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합니다. 참으로 생애에 획기적 회개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5.“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살아 있는 진리, 메시아 주님을 만난 안드레아는 지체없이 자기 형 시몬을 만나자 주님을 증언, 고백함으로 그를 예수님께 안내함으로 소명에 응답하게 합니다. 이처럼 살아 있는 진리이신 주님의 체험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는 본능적입니다. 이것이 진정 최고의 이웃 형제 사랑입니다.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눈여겨 보시며 이르십니다.
6.“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내심 시몬 베드로를 기다려왔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여 신의 한 수와도 같이 주님의 첫 제자들이 된 축복받은 제자들입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소명의 응답이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증언하는 삶,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다음 제 좌우명 기도처럼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사랑의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순례자되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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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사람>
요한 1,35-42 (첫 제자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분의 사람>
그분 찾아
나에게 오신
사랑하는 벗이여
나는
그분이 아니라
그분의 사람이랍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르는
그분의 사람 말이지요
그러니
애써 그분을 찾아
나에게 오신 벗이여
미련 없이
나를 딛고서라도
나의 그분께로 가세요
그러면
나의 그분을
반드시 만나실 테니
그때에 비로소
그대의 그분으로 모시고
그분의 사람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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