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과 방패라는 끝장대결 프로그램을 종종 보면서
사람의 승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막장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방탄 유리와 총의 대결, 전통검과 총의 대결, 수석 전문가와 돌조각 달인의 대결 등등
엽기에 가까운 끝장대결로 관심을 모았습니다.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내는 방패의 대결은
말 그대로 끝장대결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달인과 프로의 대결은
대결, 그 자체만으로 흥미진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결이 대결인 만큼 승자와 패자는 갈라지고......
달인의 비애와 프로의 낙담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이지만
상극의 만남은 또 다른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승부적 호기심의 대리 만족은
축구나 야구등 스포츠 경기를 능가하였습니다.
창과 방패의 대결은
우리들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항상 존재합니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갈등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대리 만족에서 얻는 승부는 가상이지만
실생활에서 얻는 갈등의 아픔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빈부의 격차에서 오는 갈등은
가난한 비극이 극대화되고 부자에 대한 반항으로 폭동마저 유발합니다.
실력의 격차에서 오는 상대적 갈등은
극심한 열등의식과 패배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게 합니다.
주고 받는 것이 좋은 것일 때는 소통의 미학이 극대화되지만
주고 받는 것이 나쁜 것일 때는 적대감의 장벽이 높아질 것입니다.
소통을 말하면서 창으로 찌르는 사람은
불통의 주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통과 미소는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이루지만
소통과 화는 불통의 먹구름을 만들어냅니다.
뒷담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도마위에 난도질 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않을려면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들보로 티를 뺄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창으로 찌르면 방패로 막는 삶의 패러다임은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정글에서 육식 동물은 창를 가졌고
초식 동물은 방패를 가졌습니다.
정글의 평화는
하나님 나라에서만 가능한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그 나라에는 사자가 풀을 뜯고
독사가 독을 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징인 교회는
창과 방패가 없고 사자가 풀을 뜯고 독사가 독을 품지 않는 화평을 이루어야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유구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참혹한 전쟁사로 얼룩졌습니다.
참과 거짓의 갈등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으로 굴곡진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이웃와 이웃의 화평을 이루었지만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은 선과 악의 끝장 대결이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화평을 사랑과 평강의 은혜로 누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십자가 처형의 끝장 대결을 펼치는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방패라고 의미있게 묘사하였습니다.
믿음의 방패는
거짓과 악한 사상의 공격과 악한 영의 유혹을 물리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는
믿음의 창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믿음의 방패는 적을 방어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믿음의 창은 아군을 역습하는 반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다산 교회에서
믿음의 창과 방패를 동시에 만났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난도질하는 믿음의 창과
담임 목사님을 보호하는 믿음의 방패를 가진 장립 집사님을 서로 엇갈리게 만났습니다.
앉은 자리도 냄새난다는 말은
20년 묵은 담임 목사를 비방하는 교인의 말입니다.
20년 동안 설교하고 기도하고 목양한 결과......
건강한 목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썩게하는 종양을 배양하였습니다.
종양의 발견은
어떤 형태로든 치료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건강한 양도 내 양이요, 병든 양도 내 양이라는
담임 목사님의 눈물이 기억납니다.
경천애인하며 목양일념하였던 20년의 목회는
대외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던 평범한 목회였지만 언젠가부터 뒷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스캔들이 있었던 것도 비자금을 조성하여 부를 축적한 것도 아니었지만
앉은 자리도 냄새난다는 실증은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원로 장로님의 탄식......
평생을 장로로 봉사하여 원로 장로가 되었는 데
사위가 장로인 교회를 떠날 수도 없고 머물러 있자니 꼴보기 싫고 늙으막에 재앙이라고 하였습니다.
해묵은 감정은 종양으로 발전하였고.....
창과 방패의 끝장대결이 폭풍전야와 같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진 집사님께......
"참으로 집사님의 어깨가 무겁습니다"고 하였더니
큰 한 숨을 쉬며 "모든 말을 듣고 있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도여서
교회의 덕이라는 대의를 잃어 버리고 개인적인 불의에 촛점이 마추어져
방패가 창으로 돌변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입니다.
천석군의 농사를 짓는 집사님은
올 해도 수박 하우스 21동의 모종을 하였습니다.
겨울인데도 하우스 농사로 온 몸이 멍들어 잠시 시간을 내어
물리 치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두어 시간 물리치료를 하는 동안 나눈 이야기는
방패의 능력을 더욱 강화하여 용역 불러놓고 예배 드리는 일이 없도록하는 것이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집사님은
옳고 그른 것의 상대적 평가에 대한 올바른 가치 판단의 기준을 분명히 가졌습니다.
담임 목사에 대한 뒷담을 떠나서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세력들을 대항할 임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물었더니
인덕이 높은 수석 장로님과 연대하면 모두가 잠잠할 것이라고 자신하였습니다.
수석 장로님은 덕망이 높아
안티와 적이 없고 모든 교인의 존경을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인 집사님이 떠나가고.......
잠시 후 믿음의 창인 집사님이 개인적인 일로 교회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믿음의 창을 가진 집사님께.....
철없는 아이들 처럼 소란 피우지 말고, 선동하지 말고, 흥분하지 말라고 조용하게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말고.......모든 생업을 중단하고......
1년 정도 푹 쉬면서 오직 자신의 건강만 관리하시라고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충고하였습니다.
집사님은 얼마전 적혈구 절대 감소라는 병으로 입원치료하여 퇴원하였지만
절대 안정과 휴식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정상적인 건강 수치와 면역성 증가를 위해서 치료와 휴식이 최선인데
믿음의 창으로서의 역활은 죽음의 위기를 앞당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패와 창을 가진 집사님들의 갈등은
앞으로도 더욱 고조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듣고 있는 선임 장로님은
믿음의 방패로서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양날의 창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선임 장로님과도 교회 문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초읽기에 들어간 교회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교회의 안정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담임 목사님 인품의 몇 배라는 선임 장로님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가장 선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갈등은 외부의 적으로 인한 혼란이 아니라 내부의 문제라서
담임 목사의 거취를 두고 갈등하면 대부분 분립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이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