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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터
시편 11 : 1 - 7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시편 11편은 다윗의 시임에 틀림이 없지만 어느 때에 쓴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을 때 쓴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 델리치 같은 분은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내용대로 블레셋과 다윗이 전쟁을 할 때나, 아니면 압살롬이 배반한 때가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어느 때에 쓴 시이든지 다윗이 퍽 어려운 환경 속에서 쓴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이 그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1절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다윗의 확고부동한 결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에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희망은 영혼의 닻”이라고 말했습니다. 닻을 바위에 튼튼히 걸어 놓은 배가 파도가 아무리 요동해도 떠내려가지 아니합니다. 반면에 닻이 반석에 걸려 있지 않는 배는 물결치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밀려갑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는 모르지마는 사람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도 유혹을 받기가 쉽습니다. 지난 시간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이 멀리 서 계시며, 나는 견디기 어려운 환난에 처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숨으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악인들은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저를 감찰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내버려두신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그러나 이 시인은 말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이처럼 내 영혼의 안식처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려는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내 사냥꾼의 손에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라 하느냐?”
이 말은 물론 소심한 친구들의 신중한 충고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진심으로 다윗이 잘 되기를 원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사울이 너무 격동해서 심술궂게 다윗의 생명을 노리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피난처와 같은 곳으로 도망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목숨을 건지기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잃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제의 속에서 다윗은 번뇌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제 원수의 공격을 무서워해서 도망간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고 무사로서 어울리지 않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항상 말해 오던 것이 어떻게 될까 생각할 때 성도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의 친구들이 그를 피신시키려 했습니까? 다윗은 지금 그가 있는 곳에서는 안전하게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했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부하들은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 있으며 다윗의 정직한 마음만 가지고서는 자신을 안전케 해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악한 사람은 언제나 의로운 사람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언제나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해치기 위해서 굉장한 노력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그들을 쏘려 한다고 했습니다. 밝은 데서가 아니라 어두운 데서 쏘려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은 무엇을 할꼬”(3절) 합니다. 다른 말로 나라 안의 통치와 질서가 흐트러져 모든 것이 문란해지면 어떻게 네가 네 의로움으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가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형편없이 파괴된 왕국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다른 시편에 보면 “너는 하나님이 네 산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에게로 도망가서 그곳으로 네가 좀더 잘 되는가를 보아라. 저희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조롱하고 있어서 성도들이 피조물에 대해서 가했던 모든 소망과 기쁨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께 갖는 확신과 의로는 세상적인 사람들에게 수수께끼가 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이 때 다윗은 정중하게 그 유혹에 저항을 합니다.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고 말합니다.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의심을 품고 피하려 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토대를 부수어뜨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그 토대를 무너뜨리면, 하나님에 대한 선한 백성들의 그 토대를 무너뜨리면, 그들의 믿음이 속임수였으며 농담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원리는 의로운 사람의 믿음과 소망의 토대가 됩니다. 불의로 향하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일 뿐 아니라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터가 무너질 때 의인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히브리 원문에는 ‘만일’이라는 낱말이 붙어 있습니다. “만일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세상에서 집을 짓는 사람들도 터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비록 그것이 보이는 부분이 아니지마는 성심 성의를 다해서, 물질과 시간을 다 바쳐서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터는 견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터가 흔들리면 건축물이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이 책, 성경은 말하자면, 우리 신앙의 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선지자와 예언자,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만들어진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꼭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학습이나 세례 입교 문답을 하고 서약할 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까?”고 묻고 성도들은 그대로 믿는다고 분명하게 대답을 합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책이 그런 책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것만 못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국제 기드온 협회에서 오셔서 학교나 군대, 병원, 교도소 여러 곳에 성경을 드리는 일을 하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 터가 무너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국제적으로 수많은 실업가들이 수많은 액수의 헌금을 해서 성경을 해마다 수천 만 권씩 찍어 전 세계 국민에게 나누어주는데 이것이 다 사기꾼들의 행사가 될 것입니다. 만일 이 터가 무너지면 의인들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성경에는 마음 상한 사람에게 위로해 주시는 말씀, 더러운 심령을 깨끗하게 하시는 말씀, 죄 지은 심령을 용서해 주시는 말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진리, 어두운 데 헤매이는 사람에게 광명을, 길 잃은 심령에게 바른 길을, 미워하는 심령에게 사랑을, 사망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절망적인 사람에게 희망을, 어리석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된 것이 아니라면 잠시 동안만이라도 우리를 믿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 잔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성경이 참된 것이라고 믿을 때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만족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터 위에 세워진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교리를 믿습니다.
만일에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가 진실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정죄함을 받게 되고 모두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배가 가라앉지 않는 한 아주 약한 사람이라고 해도 물에 빠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배가 침몰될 때에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물위로 솟아날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우리의 희망의 터가 무너진다면 우리는 모두가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리를 위해서 어떤 비난도 감수하십시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도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터는 회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만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함을 그치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무너지고, 거룩한 성령의 역사가 물러간다면,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가운데 은혜의 역사가 없다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게 된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것이 한푼의 가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 반석의 역사가 모두 무너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행복할 것입니다. 은혜의 역사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쁨도, 감사도, 사랑도, 평화도, 만족도 찬송도 없는 반면에 슬픔과 불평, 미움과 불안,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찬 지옥으로 화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여러분, 이 은혜의 역사가 계속되게 하십시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도록 하십시다. 이것이 교회의 생명이요 성도의 왕관입니다. 은혜가 역사하지 않는 교회는 세상의 어느 단체보다도 초라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가 역사할 때 초대 교회와 같이 더욱 왕성해지는 교회가 되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한 가지 터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의 터입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하는 소망입니다.
1.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이라
주 예수 밖에 믿을 이 세상에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 되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저 심한 바람 부는 밤 큰 물결 높이 설렐 때
주 예수 크신 은혜에 희망의 닻을 주리라
3.땅위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희망 더욱 크리라
4.저 하늘나라 올라가 주 하나님을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세 반석이 되십니다. 저는 결혼식을 주례할 때마다 새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가정의 기초를 그리스도로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은 모두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한 자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으니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워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부딪쳐도 무너지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아니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위에 세운 가정은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믿음의 식구 가정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튼튼한 가정, 흔들리지 아니하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위에 소망의 터를 닦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터는 무너집니다. 상업의 터도 무너집니다. 권력의 터도 무너집니다. 재물의 터도 무너집니다. 인간 사이의 신의의 터도 무너집니다. 사회의 구조는 여리고의 성벽처럼 흔들리고 사회의 반석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터로 정한 사람은 세상의 터가 다 무너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 것이 무너질 때 오히려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가 온다고 하더라도 담대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시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최악의 경우를 인내심을 가지고 참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를 최선의 경우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구름 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고 할지라도 욥의 경우처럼, 시험에 옳다 인정을 받은 사람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몇 해 전에 이리 신광 교회를 시무하시는 안경운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목사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을 퍽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이리 신광 교회를 지성으로 섬기시는 장로님이 계신데 내외분하고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외아들이 인물도 좋고, 성품도 온순하고, 겸손하고, 머리도 명석하고, 공부를 잘 했습니다. 그리고 가정 사정은 좀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그 아들을 서울에 올려 보내서 고등학교에 다니게 했습니다. 언제나 그 학교에서 상위권에서 맴돌 만큼 공부를 잘해서 서울 대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르고 거뜬히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 내외가 기뻐하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온 교회가 함께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제 등록할 때가 되어 장로님의 아드님은 먼저 상경해서 하숙집에 가고 장로님은 등록금을 마련해서 며칠 후에 올라오시면서 아드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내가 낮에 일을 보고 밤에 침대차를 타고 가서 새벽 6시에 서울역에 도착할게다.” 아드님은 “예, 아버지, 제가 역에 마중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전화를 나누고 아버지는 밤차로 아들이 있는 서울을 행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역(驛)에 나와 있을 아들이 안 보인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장로님은 아마 차를 못 잡아서 늦어지나? 혹 그 동안 너무 공부에 시달리다 이제 긴장이 풀려 잠이 들어서 제 시간에 깨지 못했나? 생각하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나오지 않기에 택시를 타고, 그 아들이 만리동에 하숙하고 있었는데, 그 집에 갔더니 아들 방이 아직 잠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깊이 잠이 들었는가 보다 생각하고 방문을 두드려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한참 방문을 두드리다 문을 탁 차고 열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습니다.
지난 밤에 연탄가스 중독을 세상을 떠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 즉시 교회 목사님께 전화가 와서 서울에 올라갔는데 무슨 말로도 위로할 수가 없으시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장로님 내외분이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신 데 있다고 합니다. 아들 고별 예배를 드리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아무 장로 예수 믿어 망했다”하며 수근수근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이 교회 앞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내 아들 대학 공부 못시켰는데 그 아이를 기념해서 제 형편이 되는 대로 학생들의 장학금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눈물의 바닷가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부터는 참기 어려운 일을 당한 가정이 생기면 장로님이 앞장서서 가셔서 위로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새 힘과 용기와 소망을 가지는 것을 보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의지하던 터가 무너질 때도 의인이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주변이 캄캄해지면 세상의 것들은 안보이지만 눈을 들어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것을 잃은 순간 세상 것으로 살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어찌할꼬? 이 대답에서 우리의 의인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하였습니다.
나무를 흔들면 사실 그 나무 뿌리가 더욱 튼튼히 깊이 박히는 법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의 존재가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마음에 담대함과 평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십시다. 영광의 보좌, 통치의 보좌, 심판의 보좌,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십시다.
더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정확히 아십니다. “그 눈은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실 뿐 아니라 아무리 그들이 겉으로 어떻게 가장할지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정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부적인 것만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체를 아십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람들의 소문이나 이야기에 의해 알지 아니하고 과오나 속임이 있을 수 없는 그 자신의 관찰에 의해서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 무엇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5절에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잠시 이기는 것 같은 때가 있어도 결국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6절에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또 매우 무서울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하였습니다.
이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새삼 가지고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을 당하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더욱 의지하세요. 주님은 우리를 건지시고 반석 위에 세워 주실 것입니다.
피함의 비밀
(시 11:1-18)
: 하나님께 피하면 진정 피할 길을 하나님께서 내신다.
찬송 432장/
시편 11편은 다윗의 시로서 여호와께 피한 자의 안전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사건이 본문의 배경으로 추측하는데, 1절에서 다윗의 친구들은 다급한 마음으로 온 나라가 다 압살롬에게 넘어갔다고 어서 피하라고 알려주지만 다윗은 도리어 느긋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피했기 때문입니다.
3절의 “터”는 규율 질서 법 기강 제도 도덕 등을 가키는데 난리가 나서 그런 것이 다 무너진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자식도 법도 도덕도 따르던 신하조차도 다윗을 배반하여 아무도 그 무엇도 지켜 주지 않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세상은 변하고 배반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성전에 계시고 하늘에서 통치하시고 통촉하시며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다스려 주심을 믿고 담대한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정말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해도 먼저는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진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방법으로든 피할 길을 내주시는 기적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