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요일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재형 신부
복음; 요한14,6-14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 미 뵌 것이다.”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 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 게 되시도록 하겠다.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노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의 특성을 들어서 이야기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겸손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니 부드러움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니 유연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부드럽지만 시간을 주면 바위를 뚫으니 강인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자연에 활력을 주니 생명력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물의 특성을 들어서 노자는 물을 가장 좋은 선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물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은 잘못을 씻어주니 정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물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회개와 정화의 상징이었던 물은 이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聖事)가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지난날의 죄를 사함 받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물은 은총의 성사가 되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였던 루르드는 ‘치유의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루르드의 샘물로 치유된 사람이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하니 치유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례에 온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물을 몸에 바르면서 치유의 은사를 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물에 침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물의 예식만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고, 손과 눈에 물을 바른 후에 물을 마시는 예식입니다.
저는 루르드의 물이 아닌 다른 것에서 치유의 은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루르드에는 많은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휠체어에 의지하는 환자들을 샘물로 모셔 왔습니다. 물의 예식을 하는 곳에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음악 봉사자들이 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많은 젊은이가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는 봉사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물에 들어가지 못했던, 그래서 치유의 은사를 받지 못했던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그렇습니다. 연못의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치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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