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죄를 짓는 것이 좋은 일일까요?
아브라함에 대해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늙었을 때, 그는 “나이의 무렵에 이르렀다(come into days)”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건 오타가 아닙니다. 레베는 이 말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데, 이는 그가 온 존재를 다해 삶의 매일을 맞이했고, 그날그 날을 최대한으로 살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니다. (Likutei Sichot, volume 35, page 91)
그래서 그는 175년을 살았는데, 그 모든 날들이 완벽했고, 모두가 충만했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영혼과 악마, 나무 조각상과 돌 조각상을 숭배하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양, 달, 별, 그리고 수많은 다른 신들의 신전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동굴에 숨어 지내야 했던 세상이었습니다.
마이모니데스가 기록했듯이,(Mishneh Torah, Hilchot Avoda Zarah 1:3.) 그 역시 그들과 함께 숭배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었을까요? 한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은 세 살 때 창조주를 깨달았다”라고 말합니다. (Nedarim, 32a.) 또 다른 기록은 마흔 살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기록은 마흔여덟 살이라고 합니다. (Breishit Rabba 30:8.) 아마도 그는 어릴 때부터 시작하여 전체 퍼즐을 완성하는 데 40년 정도가 걸렸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 생애의 상당 기간 동안 그가 어둠 속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 또한 온전하고 완벽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은 아브라함이 그 모든 일에 대해 큰 회개를 느꼈을 것이며, 그래서 그의 진심 어린 회개가 그 시절의 추악함을 선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에게 그 시절을 후회하느냐, 그때 자신의 삶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느냐, 쓰라린 후회를 느끼느냐고 물었다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반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담하세요? 바로 그 덕분에 제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아이였습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나 주변 어른들에게 “왜 어떤 사람들은 이쪽을 숭배하고, 다른 사람들은 저쪽을 숭배할까? 왜 성전이 필요한 거지? 누가 더 많은 걸 만들었어? 누가 가장 위대한 신이야? 만약 이쪽이 저쪽을 때리면, 저쪽은 어떻게 할까?” 같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며 귀찮게 굴던 그런 아이였습니다. (Siddur Im Dach, Shaar HaLulav, daf 263, amud 4.)
아브라함의 어린 시절에 관한 전설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가 아주 어렸을 때, 한때는 태양이 가장 큰 신일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가 밤새도록 깨어 있다가, 새벽을 기다리며 언덕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는 짙은 어둠을 서서히 누그러뜨리기 시작하는 아침 해의 첫 광선을 목격합니다. 가만히 앉아 눈을 크게 뜬 채, 그는 밤의 생물들이 굴로 돌아가고 낮의 생물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찾아옵니다.
새벽의 드라마가 온전한 영광을 드러내며, 수평선 너머 바위 절벽 뒤에서 불타는 공이 떠오르는데, 이는 온 풍경을 변화시키고, 모든 공간을 빛으로 채우며, 그 온기로 모든 생명을 키웁니다. 너무나 강렬하게 빛나서 그 누구도 직접 바라볼 수 없고, 너무나 강력하여 그 광선 앞에서는 그 무엇도 예전 그대로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슬이 땅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안개로 변하고, 사막의 꽃들은 꽃잎을 피우기 시작하며, 나무들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넵니다. 새들은 황홀한 기쁨에 차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서로에게 노래를 부르며 소리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모든 것은 마치 생명의 교향곡 전체가 ‘태양’이라 불리는 이 위대한 존재를 찬양하는 듯 보였고, 그는 그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그는 하루 종일 그 자리에 꽂힌 듯 서서 입을 벌린 채 경이로움에 휩싸여,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궤적을 꼼꼼히 지켜봅니다. 그에게 태양은 자신의 왕국을 살피는 하늘의 최고 통치자이자, 그 아래 모든 생명에 생명을 내려주는 자비로운 주인입니다. 어린 아브라함은 밥도 먹을 수 없고, 누워 쉴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발견했고, 그 경외심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극심한 고통 속에 그 광경을 지켜봅니다. 다른 누구도 해가 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제도 지었고, 오늘도 지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은 그를 버렸고, 그의 온 세상은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왜 다른 누구도 그런 환멸을 겪지 않았을까요? 그들도 태양을 숭배하지 않았던가요?
아니,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신화였습니다. 그리고 신화란 원래 그런 법, 아무도 진심으로 믿은 적은 없었습니다. 신화는 사회 구조에 있어 유용하고, 환상적이며, 전통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숭배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깨달았습니다.
미드라쉬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불안해하는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아버지의 땅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두려워하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거짓 신들을 숭배했기에 죄가 있어서 그런가.”
그러자 하나님께서 즉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청춘은 이슬과 같으니라! 해가 뜨기만 하면 이슬이 공중으로 날아가듯, 네 죄도 하늘로 날아가리라. 이슬이 세상에 축복의 표징인 것처럼, 너 또한 세상에 축복의 표징이니라.” (Midrash Rabba, Genesis 39,8.)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과거에 행했던 그 모든 숭배가 죄가 아니라 축복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슬이 사라지지 않고 위로 올라가 축복이 되는 것처럼, 바로 그 숭배가 그를 진리로 이끌었고, 그가 다른 이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진리로 가는 그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 길을 걷지 않았다면, 온 세상을 짊어지고 뒤집어놓은 유대의 조상 아브라함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를 가르쳐 줄 사람도, 스승도, 안내자도 없었습니다. 오직 스스로 발견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또다시 실수를 거듭하는 길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진리 그 자체가 그의 문 앞에 나타나 문을 두드리기까지.
이제 여러분께 할라카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이야기와 가장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유월절을 맞아 집을 청소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빵 부스러기, 쿠키, 파스타, 위스키, 집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한복판에, 밀가루를 발견합니다. 젖은 밀가루인데… 재앙 중의 재앙… 발효되어 버렸습니다!
그 젖은 밀가루를 방치해 두는 순간, 유월절 기간 동안 여러분의 집에는 하메츠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에 집안에 하메쯔를 두는 것은, 여러분이 그토록 오랜 시간 청소하고, 문질러 닦고, 샅샅이 뒤지며 피하려 했던 바로 그 일입니다. 여러분은 토라의 경고인 “유월절 기간 동안 너희 소유지에서는 하메쯔가 보이지도, 발견되지도 말아야 한다!”를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메쯔를 변기에 내려보내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10분? 5분? 정말 당황한 상황이라면 2분? 상관없습니다. 그 시간을 보내는 매 순간, 당신은 중대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사실, 할라카(유대법)에 따르면 당신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미쯔바(선행)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메쯔를 없애는 데 걸리는 모든 순간은 하메쯔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으로 간주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 조 골드버그가 랍비에게 와서 말합니다. "랍비님, 저는 좋은 유대인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그래서 랍비가 이렇게 말할까요? "음, 우선 부엌 전체를 코셔로 만들어야겠군요. 그 접시들을 전부 버리고 식료품 저장실의 모든 것을 처분하세요. 어쨌든, 당신의 집은 안식일에 회당까지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새 집을 사야 할 겁니다. 그리고 안식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모든 규칙을 다 배우기 전까지는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아마도 직장을 그만둬야 할 텐데, 아이들을 유대인 학교에 보내려면 큰돈이 필요하니 참 안타까운 일이죠. 게다가 매일 아침 테필린을 감아야 하고, 큰 탈릿과 셔츠 안에 찌찌트도 착용해야 해. 그리고 내일 아침에 외워야 할 기도문도 아주 많아. 네 아내에 관해서는…“
아니면 이렇게 말할까요? “그럼 코셔 고기를 사서 우유와 섞지 마. 가족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안식일 식사를 함께하면 기본은 익힐 수 있을 거야. 자, 지금 테필린을 감는 법을 보여줄게. 매일 아침 5분만 투자하면 돼. 그리고 아내가 준비가 되면, 내 아내와 미크바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어.”
만약 조가 울먹이며 항의한다면, 랍비는 이렇게 설명할 겁니다. "괜찮아, 조. 넌 죄 짓는 게 아니야.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는 한, 이미 정상에 다다른 것과 마찬가지야. 산 정상까지 달려가면 바로 굴러 떨어질 거야. 하지만 천천히 오르면 발판을 잡을 수 있어. 이것이 바로 길이고, 네가 이 길 위에 있는 한, 넌 괜찮은 거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이 "파괴적인 습관"을 배웠던 그 모든 "무의미한 세월"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산 아래로 내려간 게 아니라, 당신을 지으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이 그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주셨는데, 그 길은 우연히도 계곡, 그것도 깊은 계곡을 지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 계곡이 필요했을까요? 그 깊이를 헤아리지 않고서는 그토록 높은 산 정상에 결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그분은 당신을 그곳에 두지 않으셨을 겁니다. 당신은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은 자신의 소중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기 위한 유일한 길이 아니라면 그 자녀를 깊은 구덩이에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도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무엇을 찾는지 모른 채 헤매며, 갈증을 해소하려고 잘못된 것들만 움켜쥐고 마시곤 했습니다. 당신만큼 오랜 세월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일에 대해 원망하냐고요? 어쩌면 더 원망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원망은 영혼을 빛으로 더 가까이 날아가게 하니까요.
하지만 후회? 후회는 무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두신 그 길을 어떻게 후회할 수 있겠습니까? 그 협곡을 지나며 우리가 배운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삶이 흘러가면서 그 의미들은 서서히 드러날 것이며, 우리는 모든 경험이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교훈이 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마지막 날, 우리 삶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가 완성될 때, 그때 비로소 매일매일이 그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는 매 순간을 온전히 누리고, 온 존재를 다해 그 순간에 몰입하며, 지나간 일을 한탄하며 현재를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지나간 날들을 포함해 우리 삶의 모든 날이 온전한 하루가 될 것입니다.
By Tzvi Freeman
Art by Sefira Light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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