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85/『김일로전집』]향토문학의 “보석”!
엊그제 ‘모르는 분’이 자신의 부친 문집이라며 『김일로전집』(전4권, 목포문화원 2022년 2월 발행, 김강 엮음. 각권 400-600쪽, 비매품)이라는 거질巨帙의 책을 택배로 보내주셨다. 먼저 놀란 것은, 아름다운 동시와 동요 등을 많이 지어 아동문학이 이 땅에 정착하는데 있어 큰 기여를 한 ‘김일로’(1910-1984)라는 문학인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다. 동화작가 이원수 이름은 아시리라. 동년배 친구 이원수는 “모든 불행한 어린이들의 동심의 환경을 맑은 희망의 세계로 승화시킨 금싸라기처럼 고운 마음의 표현”이라며 동요집 『꽃씨』에 실린 그의 작품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그가 창안한 것으로 보이는 ‘단시短詩’를 접하고 노산 이은상은 “시조 이외의 새로운 고유시의 씨앗”이라며 “어느 가락에서도 향토의 아름다운 멋이 철철 넘치고 있다. 이같은 한국적 운치와 쾌적한 율조는 향토적 흙의 생활에서 빚어진 것”이라고까지 칭찬을 했다.
그분의 작품(시, 단시, 동시, 아동문학, 수필 등)을 언뜻언뜻 감상하고, 정민 교수의 서문을 비롯하여 전집3권에 실린 ‘김일로의 문학과 그 의의’를 다룬 논문 몇 편(최하림, 유홍준, 김병기, 이동순 등)을 보면서 ‘우리 문단의 숨은 진주’의 존성대명을 몰라봤던 게 민망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그분의 장남이 부친의 모든 글들을 망라해 전집을 펴낸 것(물론 목포문화원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의 문집 생각이 났다. 『율곡집』 『퇴계집』 등 수많은 학자와 선비들의 문집은 거의 대부분 살아생전 자신이 펴낸 게 아니고 사후 그의 장남이나 후손 아니면 제자들이 펴낸 것이라고 한다. 이보다 더 훌륭한 작업이 어디 있으랴? 정말 잘하신 일이다.. 효도는 이런 것이 '참 효도'일 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틀림없다. 그 아버지, 김일로 시인은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 보통학교조차 가보지 못했다 한다. 서당에서 한문을 약간 배웠을 뿐, 요즘말로 아예 '가방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야학을 개설하여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는가 하면, 해남에 '황산실업중학교'를 세워 국어선생님으로 제자들을 길렀으며, 그 학교 교가도 짓는 등 초등학교와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그분이 지은 시들이 노래로 작곡되어 실려 있다하니, 인품을 말해 무엇하랴. 요즘말로 '대다나신 분'이다.
아무튼, 이 전집을 접하면서 흔히 ‘향토문학’이라는 이유로 문인과 그 작품의 가치를 쉽게 경시하는 경향은 잘못된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목포는 문향文鄕인 듯하다. 평론가 김현, 여성작가 박화성과 그녀의 아들들도 유명하다. 목포지역에선 김일로 시인을 모르면 '간첩'을 듯한데, 과문의 소치로 여지껏 몰라본 게 죄송할 따름이다. 신석정시인도 전북지역에서만 활동했다. 이 전집을 엮은 김일로 시인의 장남은 “제 선친의 선미禪味가 있는 시를 같이 공유하는 기쁨이 크다”는 쪽지인사말을 남겼는데, 그것도 인상적이었다. 선미라니? 만해 한용운처럼 스님시인이었을까? 아닌데도 한두 편만 감상해도 ‘선미’를 무슨 의미로 썼는지 금세 다가왔다. 선미가 뚝뚝 떨어진다. ‘동심유불童心留佛’에 다름 아니었다. 일흔넷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끝끝내 동심을 간직하여 ‘동심=노심老心’을 작품으로 보여준 김일로 선생, 호 ‘일로一路’는 우리말 ‘한길’이 아닌가? 일찍이 1959년 남농 허건과 시화전을 개최했는데, 동양화의 화제畫題를 처음으로 그가 지은 한글 단시로 대체했다니 그의 한글사랑도 그만큼 지극정성이었다. 허나 한글 단시를 그 아래에 7언의 한시구로 축약한 것을 보면 경탄이 절로 나온다. 일단 한 편을 감상해보자.
그늘이 되어주다가
열매를 맺어주다가
소슬바람에
밀려나가는
노오란
은행잎 하나
人生如是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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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제목이 아래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시구같은 ‘人生如是亦如是’가 ‘인생은 이와 같고 또 이와 같은 것’이라는 뜻일진대 삶을 달관한 선지식 분위기가 물씬 난다. 한 중문학자는 어느 찻집 벽에 걸린 김일로 시인의 <꽃씨 하나/얻으려고 일 년/그/꽃/보려고/다시 일 년> 시를 보고 전율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김일로 시인의 단시 아래 한시구들을 번역하고 보술하여 <역보 譯輔>라는 책을 냈을 것인가. .
또한 이런 단시는 어떤가?
저
몸가짐
이 숨소리
돌 한 개
풀 한 포기면
좋을 것을
一石一艸人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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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石一艸人不及’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까? 할 수 있을까? 놀랍다. 문학의 새로운 장르같다. 평생토록 갈고 닦아 선보인 수많은 시, 시인의 내공이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한 편만 더 감상해보자.
어머니를
붓끝으로
어떻게
새기리
차라리
천 번 만 번
어머니를
부르리라
心琴尙奏思母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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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을 잃는다. 한 마리로 깔끔하고 너무 멋지다. 제목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읽다보면 그냥 금방 알아버린다. 이런 것이 좋은 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한자 7언구를 풀이해보는 재미까지 있음에야. 장남은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사부곡思父曲 글에서 “아버지의 평생 가난은 차라리 '착한 선善'이었다. 아버지의 자아실현에 대한 정신세계는 (비록 가난한 시인이었지만) 늘 궁궐에 머무르시면서 왕의 감각을 지니고 계셨다”고 회억하고 있다.
‘모르는 분’에게 좋은 책 보내주셔서 고맙다고 전화를 드리니 “이것도 인연이니 언제 한번 만나자”고 하신다. 그러잖아도 이리 좋은 책을 선물받았으니 탁주라도 한잔 대접해야 할 참이었다. 얼마 전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쓰지 않는 글씨> 전시회가 있었는데, 엮은이의 절친 선배께 초대권을 보내드렸는데 ‘모르는 분’이 그 전시회를 같이 보셨다한다. 노산 이은상의 『조국강산』이라는 시조집 전편을 전각하여 열 폭 병풍으로 만든 전각예술인 진공재의 작품을 보면서 선배께서 나와 작가 이야기를 해서 이 전집을 받게 된 것이다. 김일로 시인이 금수강산을 사랑하며 읊은 『송산하頌山河』와 『조국강산』이 정서적으로 교감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엮은이(김강, 강자도 가람을 뜻하는 강江자인 게 이채롭다)의 할머니가 아들인 김일로 시인에게 “수인사를 나누면 이승에서 인연을 맺은 것. 인연을 맺었거든 그이의 가슴에 네 모습을 곱게 새겨라” 고 가르쳤다는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 전집 네 권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아무 때든 한두 편씩 읽으면서 그윽하고 청아한 선미를 맛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