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수필은 교과서에 ‘왕후의 밥과 걸인의 찬’이름으로 실린 기억이 난다.
뭐 대충 쌀밥은 구했지만 반찬은 간장밖에 없는데, 거기서 행복을 찾는다 그런 얘기 같다.
내용이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가난한 부부였지만 풍족하지 않은 삶 가운데서도 감사했고, 만족했고, 행복했었던 부부를 그렸던 기억이 났다.
피천득은, 1910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아버지 피원근(皮元根)과 어머니 김수성(金守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홍천이며, 호는 금아(琴兒)이다.
부친은 구한말 군부주사(軍部主事)를 지낸 관료 출신으로 서울 종각에서 종로5가 땅까지, 강남에서는 양재동 땅에 이르기까지 소유한 유명한 부호였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은 대충 문학을 하는 남편이 돈을 못 벌고 글만 쓰다가 반찬 거리가 없자, 부인에게 변명하는 글 같다.
나라면, 문학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나가서 돈을 벌어서 아내에게 맛있는 반찬을 대접 했을 것이다.
아마, 평생을 부자로 살아온 피천득으로서는 가난 따위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문학은 배 부른 인간들이나 할 짓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자백한 것이다.
피천득 같은 문학인이 많다.
박목월 같은 자는 평생을 놀고 먹다가, 해방 뒤 우리 문학의 거목으로 추앙받는다.
허구헌날 술이 만땅이 되어 한심한 시나 써댔다.
특히 ‘나그네’ 라는 시는 경주에 사는 친구와 삼일을 술을 퍼마시고 기억도 안나는 시를 썼다.
그 시도 교과서에 올려져 있다.
피천득의 아버지는 가죽신을 팔아 큰 돈을 벌었으며, 앞서 말한 군부 주사는 돈을 내고 산 벼슬이라고. 그래서 관직이라기보다는 칭호에 가까웠다고 한다.
6살 무렵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일본인 대신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피천득이 10살이던 1920년에는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의 호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書畵)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가 붙여준 호이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도중 1926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1929년부터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호강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37년 졸업 때까지 국내를 여러 번 오가며 많은 문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다.
1937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社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가 서울에서 교원 생활을 하며 영문학 연구와 시 창작에 매진하던 중 1945년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이름이 바뀐 서울대학교에서 1974년까지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4년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약 1년간 영문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시의 성심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에는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다녀왔으며, 그 후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본동에 있는 집에서 살다 2007년 5월 25일 향년 96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를 멀리했기 때문에 97세까지 장수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