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名勝)’ 지정이 예고된 대왕암공원을 찾은 것은 장맛비가 잠시 고개를 숙인 지난 13일 오후. 구청의 대대적인 손질 덕분일까, 한때 번성했던 횟집들은 흔적마저 찾을 길 없었지만 연두와 진 초록으로 뒤덮인 공원 초입의 경관은 예보다 더 한 오만을 뽐내고 있었다.
시야에서 더욱 가까워진 것은 ‘울산교육연수원’ 표지판. 이끼와 조약돌이 사열하듯 옹벽을 이룬 긴 진입로를 따라 내려가면 그 끝자락 한 모퉁이 에 외롭게 터를 지키는 비석 하나를 만난다. 잿빛 대리석 비면(碑面)에 붉은 색 글씨가 음각된 ‘고( 故) 리공(李公)종산 공덕비’가 그 주인공.
이날따라 돌비석에 새긴 문구들을 낱낱이 읽어보 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공덕비를 언제 다시 같은 자리에서 또 만나게 될지 기약할 수 없는 탓도 있 었다. 비석의 왼쪽 옆면에서 시작된 글은 뒷면에 서 끝이 났다. 세월의 이끼에 덮인 비문(碑文)의 전문은 이랬다.
<공(公)은 경주 익제의 후계다. 이 골에 나서 자 라나 어업 농업에 종사하더니 우리 조국이 광복 함에 그 모은 재산 토지 3만4천평과 돈 2백만원 을 다 바쳐서 재단법인을 만들고 방어진중학교를 세워서 지방 청년의 진학의 길을 열었다. 교육사 업에 연조함은 다소간 세상에 흔한 일이나 집을 기우려 혼자서 하는 것은 주례가 드물다. 우리 학 회는 여기에 비를 세워 공의 업적을 기념하는 바 이다. 단기 4284년 10월 27일. 재단법인 해양학 회 적다.>
그 옆에 따로 세운 안내판 ‘이종산선생(1896∼19 49) 공적비’의 설명도 눈여겨볼 필요를 느낀다. < 조국의 광복으로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았으나 일제의 가혹한 식민정책으로 대부분의 우리 청소 년들은 중등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께서는 사재를 털어 방어진수산중학 교(현 울산교육연수원)를 설립하셨다. 암울했던 시기에 배움에 굶주린 후학들을 위하여 오직 이 선생은 “나라를 부강의 반석 위에 올려 세우는 원 동력은 오로지 청소년을 교육시키는 데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사유지 3만4천평과 당시 2 00만원의 현찰을 아낌없이 투입하여 1947년 12 월에 수산중학교를 설립하셨다. 이것이 현재 방 어진중학교의 전신이다. 그러나 국고에서 보조금 이 전혀 없던 당시로서는 학교법인의 기본재산과 수입만으로는 학교 운영이 어려웠다. 이에 이 선 생은 후진들의 보다 충실한 교육을 위하여 공립 으로의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당국 에 신청하여 1959년 6월 1일 공립 방어진중학교 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으며, 1990년 5월 2일 동구 화정동으로 방어진중학교가 신축 이전하면 서 현재 울산교육연수원으로 개원하여 오늘에 이 르고 있다.>
그로부터 22년 2개월이 더 지난 시점, 울산교육 연수원은 시간이 정지된 침묵의 공간, 흐름이 끊 긴 마른 내(乾川)로 변모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활엽수에 둥지를 튼 작은 새들의 날갯짓과 재잘거림, 간간이 이어지는 갈매기 뻐꾸기의 울 음소리, 그리고 앞바다의 파도소리뿐이었다. 돌 본 지 오래인 듯 버려지다시피 한 텃밭과 화단, ‘ 사용불가’ 딱지가 붙은 화장실, 거꾸로 포개진 식 당 의자들, ‘청렴교육과정’이 진행된 4층 합동2강 의실 하나만 빼고 깡그리 비어있는 강의실 분임 실이 더욱 그런 느낌을 짙게 했다.
문화재청까지 눈독을 들인 명당자리, 그 중에서 도 노른자위 격인 연수원 터. 이 소중한 공간이 후학 교육을 위해 흔쾌히 사재를 바쳤던 고(故) 이종산 선생의 유지가 짓밟힐지 모른다는 우려에 휩싸이고 있다. 울산교육의 수장이 취임 2주년에 즈음해 ‘이전’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연수원 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곽 용 전 강북교 육청 평생교육체육과장(71·별명 ‘비둘기 아저씨’) 은 최근 지역신문 기고문에 이런 주장을 담았다. ‘방어진중학교가 이전하던 1990년부터 3년간 연 수원 관리를 맡았던 그는 ‘연수원 이전은 합법을 가장한 교육재산 탈취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극단 적 표현까지 구사했다.
<“연수원은 그 수려한 경관 때문에 재벌기업이 매입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당시 박 정석 경남교육감에게 연수원을 팔면 안 된다고 강력히 건의해 관철시킨 바 있다. 연수원을 화장 장으로 이전하고 그 터에 관광시설을 짓는다니, 역사적 가치나 교육적 측면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이 소식을 고인이 지하에서 들으면 통곡할 일이 다. 이는 고인의 전 재산 기부로 어렵게 하루하루 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심장을 후벼 파는 일이다. 연수원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반드시 교육 용도 로 이어 나가야 한다.”> ⓒ울산제일일보(http://www.ujeil.com)무단전재및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