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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요한계시록
1. 하나님의 성전 앞마당을 이방 나라들이 점령하는 기간 : 42달
2. 하나님의 두 증인이 이 땅에서 예언하는 기간 : 1260일
3. 사내아이를 낳은 여인이 용의 박해를 피하는 기간 : 1260일
4. 사내아이를 낳은 여인이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하늘에서 쫓겨난 용의 박해를 피하는 기간 :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5. 짐승이 용에게서 권세를 받아 이 땅에서 능력을 행하는 기간 : 42달
1-5의 기간은 모두 동일하다(4번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3년 6개월이라고 본다면). 그래서 내 생각에 1-5의 사건은 각각 서로 다른 시점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시점과 기간에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먼저 용이 하늘에서 쫓겨나서 사내아이를 낳은 여인을 박해하는 동안(4, 3), 동시에 짐승에게 자신의 권세를 주어 이 땅을 현혹시키고 하나님의 성전 앞마당을 짓밟게 하고(5, 1), 그 기간에 하나님의 두 증인은 짐승이 다스리는 이 땅에서 예언을 한다(2).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여인은 돌봄을 받는다(3, 4).
즉, 1260일/42달/3년반의 기간은 이미 하늘에서 패하여 쫓겨난 사탄이 발악을 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시기이며, 교회는 사탄의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자라고, 이 땅에서는 사탄의 권세를 받은 무언가에 의해 사람들이 현혹되어 하나님을 신성모독하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기간이다.
즉, 이 기간은 이 땅의 눈으로 보면 악이 득세하는 기간이나, 하늘의 눈으로 보면 도리어 성도들에게는 소망의 기간이며 견인의 기간이기도 하다.
#20220913
#나사로
내생각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전에 두번이나 비통해 하신것은 나사로가 앞으로 살아가야할 험난한 인생과,가난과 굶주림의 비참한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셨기 때문이 아닐까싶다.나사로가 다시 살림받지 않았었다면 그는 병고로 한번 죽었어도 이후에는 낙원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릴수 있었을텐데, 주님의 영광과 두 자매의 안위를 위해 다시 살림받음으로써 유대지도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했고 아마도 지속적인 핍박으로인해 가산을 빼앗기고 거지가 되어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못하고 굶어죽은 후에야 비로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기 때문이다.
#20210913
#비하
그리스도께서는 이땅의 부귀한 왕이 아니라 빈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낮아지셨다고 일컫는것이 아니다.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땅의 사람은 그자체가 저주를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설령 느부갓네살이나 아하수에로 같은 왕으로 태어나셨다 할지라도 그런 인간으로 오신것 자체가 하나님 우편에 계셨던 영광에 비하면 무한히 낮아지신 것이다.
#신명기 #Deuteronomy 31:20-22
20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인간의 죄악된 속성중 하나는 호의가 거듭해서 계속되면 당연한 권리인 줄 알고 호의를 베푼 이에게 감사하지 않으며 배은망덕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모든 족속들보다 이런 경향이 가장 심해서 만약에 다른 민족이 여호와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다면 저지르지 않았을 배은망덕한 우상숭배를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지르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이를 미리 그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 중에서 가장 패역한 족속인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여호와의 선하신 뜻에 의해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이루시고 그들이 멸망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리라는 의지를 내비치신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된 속성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신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주셔서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허접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신 성경을 주셨지만 우리는 성령과 성경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가 그 후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것으로 여겨 뒷전으로 두고 성경과 성령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 자신의 종교심을 만족시키려고 애를 쓴다. 이스라엘처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우상숭배가 아닌 것은 아니다. 도리어 복음의 은혜가 편만해진만큼 우상숭배의 범위 또한 넓고 깊게 확장되어서 사도는 우리의 탐심 자체가 우상숭배라고 규정을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긴다 하더라도 우리의 탐심에 기반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스라엘이 저지른 우상숭배보다 더 극심하고 교묘한 우상숭배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배은망덕을 저지르리라는 엄중한 경고와 예언의 말씀은 당연히 이스라엘에게는 거북하고 거슬리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의 기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의 명을 받들어서 그 거북한 말씀을 빠짐없이 그대로, 익히기 쉽게 노래의 형태로 백성에게 가르친다. 모세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의 여호와의 모든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심판의 말씀으로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였고,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돌에 맞아죽을 각오로 유대인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규탄하였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언제나 불의한 왕과 백성들이 듣고 좋아할만한 것들만을 이야기하였고, 예수님께서 서신을 보내신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서는 교인들의 귀를 간지럽히는 니골라당과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목사들은 교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죄와 심판과 회개와 고난과 인내는 설교하지 않고 오로지 위로와 은혜와 회복과 형통과 번영 같은 달달한 것들만 이야기한다. 60년이나 된 교회가 여전히 단단한 말씀은 싫어하고 젖과 같이 물렁한 말씀만 듣고 가르친다는 것은 분유나 이유식이나 먹으려고 떼를 쓰는 60세 노인과도 같다. 교인들에게 듣기 좋은 달달한 이야기나 하는 목사들은 자녀의 건강에는 관심없이 입맛에만 신경써서 인스턴트 음식이나 주는 덜떨어진 부모와도 같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이 패역하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말씀은 그들의 신앙이 최고조일 때 주어졌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의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은 그들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전무후무 할 정도로 한결같이 일치되게 높고 견고하였다. 그래서 아마도 여호와께서는 당시의 이스라엘이라면 그런 엄중한 말씀을 받아도 낙심하거나 시험에 들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두려움과 황송함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며 그들의 후손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더 철저히 다짐하리라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신앙수준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이 얼마나 엄중하고 단단하며 우리의 심령을 아프게 하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
#20200913
#레위기 #Leviticus 20:8-9
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9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의 상세 규례이다. 부모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가장 많이 부여받은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 지정해서 사랑의 속성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녀를 낳은 부모라면 누구라도 자녀에 대한 거의 무한대와 같은 사랑을 줄 수 있도록 영혼과 육신의 속성을 변화시키신다. 이는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는 모든 동물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이런 사랑이 과연 정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우리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이런 신비한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무한히 이기적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어느 때건 배고파도 울고 불편해도 울고 배변을 해도 운다. 자기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채워질 때까지 계속 보채고 운다. 마치 부모의 사랑을 시험하기라도 하는듯이 그렇다. 그럼에도 갓난 아기들의 이기심이 용인되는 것은 작고 연약하고 귀엽기 때문이다. 동물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어미 고양이의 젖을 먹는 새끼 고양이들의 모습을 보면 서로간에 더 많은 젖을 먹겠다고 얼마나 치열한지 모른다. 부모가 끊임없이 자녀를 훈육하는 이유는 바로 자녀들의 그런 타고난 이기심 때문이다. 아무런 가르침 없이 내버려두면 아이들은 자기 좋은대로만 한다. 이는 아이들의 영혼은 백지와 같아서 선악을 분별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되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죄성 때문에 오로지 악한 탐심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훈육을 받는 동안 끊임없이 대꾸하고 반항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부모가 자꾸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만이 쌓이다 분출되면 급기야는 엄마 미워, 아빠 미워 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말이 얼마나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모도 자녀에게 이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혼자서 삭일 뿐이다. 이런 유아들의 죄악 된 언행을 보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어떠셨을지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잉태 된 때에도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영유아기 시절에도 죄가 없으셨을 것은 분명하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영유아기 시절에도 여느 아이들처럼 이기적으로 부모를 보채셨다거나 부모의 훈육에 반항하셨다거나 하는 죄를 짓지 않으셨을 것을 생각할 수가 있다. 아마도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보채지도 않고 순둥순둥한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의아해 했을지도 모른다. 자녀들이 좀 더 자라 사춘기가 되면 그 타고난 죄성이 극대화 된다. 이 또한 거의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것이라서 일명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며 대체로 이해해 주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먼 이 시기에는 영유아의 충동적 이기심과 더불어 정신적으로는 사악한 의지가 곁들여져 무차별적으로 반항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부모는 어느 때보다 더 자녀의 사춘기에 애를 먹는다. 귀여운 시기도 지나서 사실 자녀의 모든 언행이 거슬리고 꼴보기 싫은 기간인데도 부모는 한없는 사랑으로 인내해 나간다. 그런 험난한 시기를 지나 자녀가 장성하여 독립하게 된다고 해서 딱히 부모에게 감사해 하지는 않는다. 자녀들은 여전히 자기 스스로 잘 큰 줄 안다. 그렇게 장성하여 독립할 때까지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녀들은 이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은 이후에야 서서히 조금씩 부모가 자기들에게 베푼 것들을 생각하며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모는 그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과도 같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부모의 권위를 거의 절대적으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부모의 한없는 사랑을 받은 자녀가 부모를 저주한다는 것은 부모의 사랑 자체를 부정한 것임과 동시에 여호와의 형상을 멸시한 것이므로 결국 여호와를 멸시한 것과 방불한 죄악인 것이다. 때문에 부모를 저주하는 것만으로 사형에 처하는 여호와의 규례는 정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여호와께서는 도저히 부모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패역한 자녀에 대한 처벌 규례도 지정하셨다. 패역한 자녀를 둔 부모는 그 자녀를 장로들에게 고발하여 사형을 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인데, 부모로서는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런 자녀의 패악질이 공동체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부모의 지위와 권세를 얼마나 높이셨는지를 본다면,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여전히 부모에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기들의 구원 여부를 아주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녀의 위치에 있는 신자들에게 권고하기를,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여기서 신자들의 죄악된 본성은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가르침보다는 '주 안에서' 라는 조건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역설적이게도 부모에게 불순종 할 것들을 먼저 찾곤 한다. 그래서 부모가 자기 신앙 생활에 조금이라도 간섭하거나 가로막는 것처럼 느끼면 주 안에서 순종한다는 미명하에 나름 신앙의 당위성을 가지고 부모에게 대드는 형식으로 따지며 거스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본래 우리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신자라면 평상시에는 불신자들의 효도 수준보다도 더 탁월하게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예외적으로 부모가 자기의 신앙에 부적절하게 간섭한다고 해서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빌미로 부모에게 분노를 표출해서는 안되고 공경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온유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을 이유로 자녀가 부모와 원수가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실제로 부모를 원수처럼 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신앙을 반대하고 간섭하더라도 공경과 온유를 잃지 말아아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모를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비단 혈육의 부모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보다 연장자, 상관, 상사 등을 전부 포함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 지도자도 포함된다. 자기가 존경하고 따르는 국가 지도자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옹호하는 반면에, 자기가 싫어하는 국가 지도자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꼬투리를 잡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 지도자라 하여도 남들과는 다른 수준의 대응이 필요하다. 아무리 그가 온갖 비리와 부패와 악을 행하더라도 그 악행에 대한 비판은 할지언정 그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과 저주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의 악행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절제되고 품격있는 비판과 대응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의 지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공경을 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지도자를 그 자리에 세우신 분은 바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지난 박근혜 정권 시절에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의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시위에 동참하면서 그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했던 것은 복음에 위배된 행위였음을 시인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은 목사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요구되는 성품이다. 누구보다도 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많은 권한과 의무를 부여받은 목사와 신학자들은 아무리 정부의 시행 정책이 비성경적이라 판단되더라도 함부로 지도자를 비난하거나 저주해서는 안된다. 이는 바로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세를 비난하고 저주한 것이기 때문에 부모를 저주한 자와 같은 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국가 지도자를 저주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자기를 비롯한 신앙개혁가와 이를 따르는 성도들을 극심하게 핍박한 프랑스 왕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공경을 담아 기독교 강요 헌사를 쓴 것이다.
신자들이 부모처럼 섬겨야 하는 대표적인 대상으로는 바로 자기 교회의 목회자들이다. 하지만 이는 내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많은 고민과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이전 담임목사는 모든 면에서 목사로서의 자질이 없는데다 교회에서 일어난 사고를 불의하게 대응하였으면서도 전혀 자기 태도를 고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묵상하면서 그의 잘못된 설교를 격렬하게 반박하고 그의 불의한 행위를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지금도 여전히 8년 동안 담임목사로서 교회에 끼친 해악들이 용서되지 못하고 그를 증오하고 있는데 이런 내 모습을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보실지가 염려되곤 한다. 설령 교회에 대한 내 특심함은 진심어었어도 바로잡고자 하는 방법과 그에 대한 인간적 증오는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아직도 고민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