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가 서양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작성자:셀리
1517년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로 통한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공개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붙였다. 교황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독점하는 기존 시스템을 거부하는 개신교도들은 늘어만 갔다. 특히 유럽 북부지역에서 확산세가 빨랐다.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의 대립만은 아니었다. 한 음식이 갈등을 불렀다. 버터가 그 주인공이다. 음식의 풍미를 더 하는 버터가 어쩌다 종교개혁을 부른 원인으로 지목됐을까.
버터는 유목민의 음식이었다. 기원전 8000년경 아프리카에서 처음 발명된 것으로 전해진다. 소 염소 양의 젖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버터를 만들었다. 맛있는 음식은 빠르게 전파되기 마련이다. 유목민들의 음식이 고대 문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2500년 수메르 문명의 기록에는 소의 젖으로 어떻게 버터를 만드는지 설명이 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은 버터를 평가절하 했다. 주로 게르만족을 비롯한 야만족(?)이 먹던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낙산드리데스는 야만인으로 여겨진 트라키아인을 두고 부티로파고이라고 불렀다. 버터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특정 집단의 음식을 폄훼하는 경향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문명의 요람 고대 그리스와 로마사람들은 버터 대신 올리브를 먹었다. 버터만큼이나 지방질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필수 영양소인 지방을 섭취할 좋은 음식이 있으니 굳이 야만족의 음식을 취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 로마와 같은 지중해성 기후에서는 버터가 상하기 쉬웠기에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으로 게르만족이 어느 정도 문명화(?)가 된 뒤에도 그들은 문명의 상징인 올리브를 먹을 수 없었다. 추운 북쪽 지방은 올리브 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문명화된 게르만족은 계속해서 지방질 섭취를 위해 버터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알프스산맥을 기점으로 남·북 유럽의 식문화가 단절된 채 발전한 셈이다.
버터가 사회적 문제로 지적된 건 14세기부터였다. 흑사병이 시작되면서 기독교 교리도 점점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변해가던 시기였다. 당시 가톨릭은 사순절과 금요일에는 육식을 금했다. 유제품·달걀·버터도 마찬가지로 먹을 수 없었다. 이런 제품들은 성욕을 부추기는 음식이었으니, 성스러운 날에는 피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버터 역시 금식령을 피할 순 없었다.
육식을 자제하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 이틀이라면 누구나 참을 수 있었겠지만 금식을 해야 했던 날은 1년 중 거의 절반에 달했다. 금요일과 사순절뿐만 아니라 성인 축일까지 엄격한 식단을 가톨릭교회가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와 같은 지중해에 면한 나라들은 금식일을 여유롭게 지킬 수 있었다. 고기나 유제품 대신 먹을 게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었다. 올리브기름도 풍부했고, 싱싱한 해산물은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줬다.
그들에게 고기와 유제품은 잠시 참을 수 있는 선택지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들은 버터를 여전히 야만적인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북부 지방을 여행할 때면 직접 기름을 가지고 다니곤 했을 정도였다. 버터를 먹게 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버터 금지령이 남유럽 사람들에겐 전혀 타격 없는 규제였던 것이다.
알프스 이북 지역의 사정은 달랐다. 척박한 내륙 지방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육류와 유제품뿐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고기와 버터를 먹지 말라는 건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삼겹살과 김치 금지령을 내린다고 상상해보라. 선전포고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값비싼 올리브유나 해산물을 수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황청도 버터 금지령이 북북 유럽에서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축산업이 기반인 나라들의 시민들에게 귀리만 먹고 살라고 요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리를 무시하고 마냥 허가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자들에게 요구했다. 죄를 면하게 해줄 대가를. 바로 면죄부였다.
금식 기간에 버터와 고기를 먹는 죄를 용서할 테니, 이에 상응하는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많은 북부 유럽의 유지들이 면죄부를 사들이면서까지 육식을 즐겼다. 살림살이가 어려운 사람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면죄부를 사야 했다. 고기와 버터를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프랑스 북서부 지방 루앙의 교구에서는 버터 면죄부로 천문학적인 수입을 거두기도 했다. 넉넉한 수입에 루앙 대성당에 두 개의 탑을 추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를 버터타워라고 불렀다.
잘못된 정치는 개혁가를 찾기 마련이다. 대표적 인물이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였다. 그 역시 고기와 버터를 즐기는 독일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도들에게 보내는 연설’이라는 글에서 버터면죄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가톨릭교도들은 버터를 먹는 일이 거짓말을 하거나 신을 모독하거나 부정을 탐하는 것보다 더 나쁜 죄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북부 유럽 국가들은 열광했다. 버터를 마음대로 먹으면서 신을 섬길 수 있다는 제안은 북부 유럽 사람들에게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개신교는 알프스 이북의 주요 종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종교개혁의 선봉장에 버터가 있었던 셈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장 루이 플랑드랭은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와 버터를 먹는 나라가 일치한다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19세기 버터는 전 유럽에서 사랑받는 식품이 되었다.
* 출처: 문학과 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