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염시태 성모신심의 역사적 위력
창세 12,1-7; 마태 2,13-23 / 2022.2.12.; 성모신심미사; 이기우 신부
어제는 1858년 2월 11일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서 성모 마리아께서 프랑스 루르드에 발현하신 날을 기념했습니다. 그때 주신 메시지는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 관한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교리 정식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마리아는 동정의 몸으로 성령에 의해 구세주를 잉태하셨다는 것, 둘째, 마리아는 평생 동정으로 사셨으며 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것, 셋째,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 넷째,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중 세 번째 교리 정식이 오늘 전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교리 정식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신자들의 구두 전승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는 점에서 교리로 반포되는 시기가 19세기와 20세기로 늦추어졌습니다. 그만큼 신학자들과 교황청 관료 성직자들이 심사숙고를 거듭했다는 반증입니다. 하지만 이를 믿을 교리로 반포해 달라는 신자들의 청원이 열화와 같이 빗발치자 이 두 가지 교리 명제 모두 교황의 무류지권을 발동하여 반포되었습니다. 루르드 성모 발현 4년 전인 1854년 12월 8일 발표된 교황 비오 9세의 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으로부터 확정된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는 1950년 11월 1일에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성모 승천 교의를 선포하는데 보다 큰 밑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리가 정식으로 확정되기 16년 전인 1838년에 조선교구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주교는 조선으로 향하는 길에 새로운 조선교구의 주보로 성모무염시태를 정해 달라고 교황청 포교성에 청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동안 북경교구의 주보로 모셔왔던 성 요셉을 함께 지낼 것을 조건으로 허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셉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는 남부 프랑스 지방 마리냔느 출신인 앵베르 주교가 이 지방 신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열렬한 무염시태 신심의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만, 한참 혹독한 박해가 진행 중인 조선교회의 주교로 임명되어 가면서 이 박해가 하루라도 빨리 종식되거나 또는 그 전에라도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하지 않고 치명의 영광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향에서였을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서, 과연 박해가 공식적으로 종식된 후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명동성당을 1898년에 축성할 때, 성당의 주보로서 무염시태 성모를 지정하였습니다.
무염시태 성모를 한국 교회의 주보로 청원할 때의 지향이 60년 만에 이루어졌으니 늦은 감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역사적 의미를 따져보면 그렇게만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18세기 말엽에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는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작금의 2천 년 동안 거슬러 흘러가던 흐름을 하느님의 뜻대로 돌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조선왕조는 두 가지 커다란 모순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시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천손의식으로 3천 년 동안 살아오던 민족을 양반 계층 위주로 백성을 신분으로 나누어 차별하던 불평등 신분 사회를 유지하고 있던 점이고, 다른 하나는 본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홍익인간 사상을 받아 살던 민족을 조선 시대에 들어서 주자학을 유교로 교조화시켜 통치하면서 중국 명 왕조의 속국으로 자처하느라 민족 역사의 초기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하느님 신앙을 억누르고 천시해 왔으므로 하느님을 믿을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리를 천명하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양반도, 상민도, 천민도 다 같이 믿음의 벗이라는 뜻으로 교우로 불렀던 교우촌의 실천이 그 역사적 증거입니다. 또 천주교는 모든 신자들이 매일 하느님께 기도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매일의 기도는 제물 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교리는 고구려 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고 고려 말에 유학이 들어온 이래 금지되어 온 하느님 제사를 천주교가 재개한 것으로서, 2천 년 동안의 금기를 깨뜨린 일이었습니다. - 이 점이 조선보다 앞서서 서양에서 천주교를 선교한 두 이웃 나라와 근본 정신적 토양이 달랐던 점인데다가, 민족성에 있어서 선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나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신자들의 교세도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현재까지 두드러지게 다른 차이를 보이는 이유입니다. - 이는 백성을 신분으로 차별하고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해 오던 아킬레스 건을 평등 교리와 기도 교리로 혁파한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피지배층이 지배층과 다른 가치관을 내세워 저항한 일은 여러 번 일어났지만, 조선 천주교 신자들처럼 독자적 가치관을 지니고 무려 백 년 동안이나 저항한 적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더군다나 무기 하나 들지 않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저항한 집단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무염시태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묵주뿐이었습니다. 이 기도의 무기로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와 인간으로서 평등해야 함을 끝내 관철해 낸 것입니다.
고구려의 지배층과 지식층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하느님 신앙은 민간으로 숨어 들어야 했고, 조선의 사대부들이 유학을 국교로 떠받들고 중국 명 왕조를 상전으로 모시기 시작하면서 하늘에 바치던 제사는 명 왕조의 자칭 천자에게만 허용되고 조선의 왕조차도 금지되었던 역사를 원래대로 역전시킨, 한민족 역사 안에서 이 같은 움직임은 전무후무한 기적이었으며 정신적이고도 사회적인 혁명이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최고선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낸 무염시태 성모신심의 힘이 이토록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