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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m.dcinside.com/board/napolitan/50555
매실차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항상 할머니 집 마루가 먼저 떠오른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기차 타고 내려가면 할머니는 항상 마루 끝에 나와 계셨다.
처마 아래 그늘에 앉아서 부채를 흔들면서.
그리고 항상 같은 것을 내오셨다.
매실차.
물에 그냥 타면 되는 건데 할머니 매실차는 맛이 달랐다.
뭔가 다른 게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할머니 손맛인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마시고 나면 잠이 잘 왔다.
낮잠을.
꿈도 꿨다.
선명한 꿈들을.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다.
짐 정리를 하러 내려갔을 때, 나는 부엌 찬장 안쪽에서 노트를 발견했다.
파란 표지의 대학 노트보다 조금 작은 낡은 노트.
표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첫 장을 펼쳤을 때, 첫 줄만 읽고 덮었다.
매실청을 담글 때는.
할머니 필체로 잉크가 갈변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레시피 노트겠구나 싶어서 짐 박스에 넣었다.
집에 들고 왔고, 그렇게 2년이 지났다.
꺼내 본 건 작년이었다.
딱히 할 게 없어서 매실청 한번 담가볼까 싶었다.
유행하기도 했고.
할머니 노트가 생각났다.
노트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앞부분은 진짜 레시피였다.
청매실 고르는 법, 씻는 법, 꼭지 제거하는 법, 병 소독하는 법.
할머니 글씨로 깨끗하게 쓰여 있었다.
군데군데 연필로 수정한 흔적도 있었다.
그리고 뒷부분은.
일단 앞부분부터.
ㅡㅡㅡ 청매실 선택 ㅡㅡㅡ
6월 초에 나오는 청매실을 쓴다.
너무 작은 것도 너무 큰 것도 피한다.
엄지손가락 첫째 마디 정도 크기의 표면에 흠집 없는 것을 고른다.
노란빛이 돌기 시작한 것은 쓰지 않는다.
반드시 청매실이어야 한다.
이미 노란 것은 너무 물러져 있다.
ㅡㅡㅡ 씻기 ㅡㅡㅡ
흐르는 물에 여러 번 씻는다.
소쿠리에 건져 그늘에 완전히 말린다.
물기가 남으면 안 된다.
물기가 조금이라도 남은 채로 담그면 안 된다.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려라.
보통 반나절에서 하루.
ㅡㅡㅡ 꼭지 제거 ㅡㅡㅡ
이쑤시개나 꼬치로 꼭지를 뽑는다.
한 번에 뽑아야 한다.
여기서 잠깐 멈췄다.
한 번에?
밑에 작은 글씨로 덧붙여 있었다.
* 두 번에 나눠 뽑으면 안 된다.
* 뽑다 꺾이면 안 된다.
* 구멍만 남기고 꼭지가 속으로 들어가면 그 매실은
버려라.
특이하긴 했다.
근데 이런 레시피들은 다 이렇잖아.
쓸데없이 엄격한 항목이 있게 마련이고.
계속 읽었다.
ㅡㅡㅡ 병 소독 ㅡㅡㅡ
유리병을 끓는 물에 소독한다.
완전히 식힌 다음, 물기 없이 건조한다.
뚜껑도 함께.
병에 금이 가거나 흠집이 있으면 쓰지 않는다.
ㅡㅡㅡ 담기 ㅡㅡㅡ
청매실과 설탕을 1:1로 준비한다.
병에 매실, 설탕, 매실, 설탕 순으로 켜켜이 담는다.
마지막 층은 반드시 설탕이어야 한다.
설탕이 1:1보다 적으면 담기지 않는다.
설탕이 1:1보다 많으면 너무 깊이 담겨서 나중에
꺼내기 어렵다.
반드시 1:1이어야 한다.
담기지 않는다.
이 표현이 처음으로 눈에 걸렸다.
매실청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게 담기지 않는다는 건지.
그냥 할머니 특유의 표현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ㅡㅡㅡ 뚜껑 ㅡㅡㅡ
뚜껑을 꼭 닫는다.
잠금장치가 있는 병이라면 잠근다.
* 만약 뚜껑이 잘 맞지 않거나
* 틈이 생기거나
* 어떤 이유로든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면
그 병으로는 담그지 말아라.
다른 병을 써라.
이건 중요하다.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
ㅡㅡㅡ 보관 ㅡㅡㅡ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둔다.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 빛이 들면 안 된다.
*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곳도 피해라.
* 혼자 있게 해라.
ㅡㅡㅡ 기다리기 ㅡㅡㅡ
3개월을 기다린다.
3개월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열지 말아라.
그리고.
3개월이 지나면 반드시 열어야 한다.
4개월이 지나면 늦다.
손이 멈췄다.
레시피에서 기다리는 기간 이야기는 흔하다.
근데 보통은 "최소 3개월"이지 "4개월이 지나면 늦다"는 말은 없다.
매실청은 설탕이 방부제 역할을 해서 몇 년도 간다고 어디서 읽었다.
상하는 게 아닐 텐데.
4개월이 지나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건지.
노트에는 그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았다.
ㅡㅡㅡ 담그는 동안 ㅡㅡㅡ
병에 말을 걸지 말아라.
특히 이름을 부르지 말아라.
이름이라는 건 뭔 이름인지.
매실 이름? 병 이름?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한 노트였다.
보관 중에 병 근처에서 잠들면 안 된다.
같은 방도 안 된다.
병이 스스로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방에
들어가지 말아라.
3개월이 다 된 것이다.
그 즉시 열어라.
3개월이 다 됐으면 바로 열라고. 이건 또 뭔 말인지.
병이 움직일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리고 뒷부분.
뒷부분은 앞부분과는 다른 필체로 쓰여 있었다.
할머니 글씨가 맞는데 더 오래된 것 같았다.
잉크가 더 바래 있었고, 글씨도 젊은 시절 쓴 것처럼 달랐다.
제목은 따로 없었다.
그냥 바로 시작됐다.
집에는 것들이 있다.
여기서 또 멈췄다.
"것들이 있다." 주어가 없었다.
"집에는" 다음에 무언가가 빠진 것처럼.
아니면 원래 이 문장이 맞는 건지.
"집에는 것들이 있다."
집마다 다른 것들이.
오래된 집일수록 많다.
이것들은 해롭지 않다.
다만 관리해야 한다.
매실청은 관리하는 방법이다.
여기까지 읽고 노트를 내려놓았다.
한 5분쯤 그냥 앉아 있었다.
이거 뭔 소리야.
진짜 뭔 소리야.
집에 뭔가가 있고, 그게 해롭지는 않은데 매실청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민간 신앙 같은 건가.
시골 할머니들이 믿는 집 귀신 같은 것.
그걸 관리하는 방법이 매실청이라는 건가.
그냥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다시 읽었다.
매실 꼭지에는 입구가 있다.
꼭지를 뽑으면 그 입구가 열린다.
매실의 향은 집 안의 것들을 끌어당긴다.
설탕은 가둔다.
뚜껑은 잠근다.
어둠 속에서 3개월.
앞부분 레시피의 모든 이상한 지시들이 갑자기 맞춰지기 시작했다.
한 번에 꼭지를 뽑아야 하는 이유.
입구가 깔끔하게 열려야 하니까.
꼭지가 속으로 들어가면 버려야 하는 이유.
입구가 막히니까.
설탕을 1:1로 해야 하는 이유.
적으면 담기지 않고, 많으면 너무 깊이 담긴다.
뚜껑이 완전히 닫혀야 하는 이유.
잠금이 안 되면 못 쓴다.
빛이 들면 안 되는 이유.
병 근처에서 자면 안 되는 이유.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이유.
그리고.
3개월이 지나면 반드시 열어야 하는 이유.
계속 읽었다.
3개월이 지나 완성된 것은 안전하다.
열어서 마셔도 된다.
이미 매실 안에 가둬진 것은 흩어지지 않는다.
마시면 몸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도 괜찮다.
원래 집 안의 것들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마시는 것은 계속 함께 사는 방법이다.
다만.
오래 마시다 보면 어떤 꿈을 꾸게 된다.
이상하게 선명한 여름의 꿈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오는 꿈.
처음 가보는 여름들.
그것들이 기억하는 여름들이다.
원래 네 기억이 아닌 것들이다.
놀라지 않아도 된다.
할머니가 매년 매실청을 담그셨다.
내가 마실 때마다 좋다고, 어서 마시라고 하셨다.
여름방학마다 매실차를 내오셨다.
나는 마시고 낮잠을 잤다.
꿈을 꿨다.
처음 가보는 여름들의 꿈을.
그게 뭔지 이제 알았다.
계속 읽었다.
담그지 않는 집에 대해서.
매해 담그지 않으면 그것들은 가둬지지 않는다.
3년 이상 담그지 않은 집의 것들은 오래 가둬지지
않은 것들이다.
오래 가둬지지 않으면.
이것들은 더 이상 매실의 향에 끌리지 않는다.
이미 배운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다음 줄에서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었다.
읽히지 않는 글자들이 반 줄 정도 이어지다가 그 다음 줄도 번져 있었고, 그 다음 줄도.
총 네 줄이 번져 있었다.
번진 자국의 모양이 눈물이 떨어진 자국 같았다.
노트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한참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담갔다.
할머니 말대로 다 지켰다.
꼭지는 한 번에 뽑았다.
설탕은 1:1로 맞췄다.
뚜껑이 잘 안 닫히는 병은 버리고 새 병을 샀다.
창고 안 어두운 선반 위에 올려뒀다.
말도 안 걸었다.
근처에서 자지도 않았다.
3개월 뒤에 열었다.
색이 예뻤다.
냄새도 좋았다.
맛도 좋았다.
그해 여름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마루에 앉아 있는 꿈.
모르는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꿈.
논이 다 말라가는 어떤 가뭄의 여름 꿈.
군복 입고 떠나는 남자를 배웅하는 꿈.
산에 불이 난 여름의 꿈.
아주 오래된 아주 낯선 여름들.
*이상하게 선명한 여름 기억이 생겼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원래 네 기억이 아닌 것들이다.*
그렇구나.
할머니가 매년 담그셨구나.
할머니가 마실 때마다 어떤 꿈을 꾸셨을까.
어떤 여름들을 꾸셨을까.
작년에 다 마시고 병을 씻어 치웠다.
올해는 담그지 않았다.
이사를 했다.
새 아파트다.
서늘한 창고가 없다.
이사 온 첫날 밤에 잠이 안 왔다.
새 집 특유의 낯선 냄새.
그런 거겠지 했다.
이전 사람들이 매실청을 담갔는지 안 담갔는지 모른다.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아파트가 지어진 게 2003년이다.
23년이 됐다.
오늘로 이 집에 온 지 딱 100일이다.
어젯밤에 잠을 자다가 낯선 여름 꿈을 꿨다.
처음 보는 아이가 어두운 방 구석에서 나를 보고 있는 꿈.
움직이지 않고, 말도 없이 그냥 서 있는 꿈.
그리고 오늘 아침에 거실에서 매실 냄새가 났다.
지금 마트에 매실이 나오는 계절인지 모르겠다.
6월이 아직 멀었나.
마트에 없으면 인터넷으로라도 사야 할 것 같다.
노트에 번진 네 줄.
끝까지 읽혔으면 거기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이런 경우에는.
그 다음.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빨리 담가야 할 것 같다.
이 집에서 몇 년을 담그지 않고 살았을지 모르는데.
벌써 꿈을 꾸고 있으니까.
첫댓글 갑자기 매실차 시원하게 먹고싶다
몬가아름다워,,
충사 느낌나고 좋다
글이 뭔가 잔잔하고 좋다
어른제국의 역습같다..
머야왤케좋아
글에서 단내가 느껴짐
뭔가 글에서 여름 향기랑 노을진 하늘 같은 게 느껴짐
매실요정들
여름이엇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