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518이다.
세계 역사상 이런 기가막힌 위록지마(爲鹿指馬)의 역사도 있을까?
적과 내통하여 무장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애국자가 되고 누란의 위기에서 목숨바쳐 나라를 구한 사람은 용서못할 죄인이 되는 세상.
부정못할 증거를 가지고 바른말 하는 사람이 억울한 옥고를 치루고 적과 내통하여 이웃과 형제를 쏘아죽이고 무장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수억의 보상을 받고 애국자가 되는 기가막힌 세상.
조금만 상식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명맥히 들어날 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바보같은 국민들은 뭐냐?
아래의 내용은 518민주화를 외치는 자들이 바이블로 여기는 518측의 사료인 [1997년 검찰 수사기록]과 당시 일간신문에 나와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한점의 의혹도 없을 것이다.
1. 1026이후 518 직전까지 정부(최규하)의 조치
1) 박정희대통령 영결식이 끝난지 일주일후에 최규하는 향후조치사항을 발표했다.
"현행헌법에 의해 대통령을 뽑되 잔여임기(2년?)도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기간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아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새로운 헌법에 의해 직접선거를 해서 새로운 정권에 물려주겠다." 물론 각계각층에는 김영삼 김대중의 야당도 당연히 포함되는 거지.
2) 그럼에도 불복하고 소요가 계속되자 이를 지속적으로 재천명하고 3월 중순까지 헌법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했어.
3)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전원 석방하고 형집행 면제등 가능한 모든 조치를 했어.
여기까지 최규하의 조치에 어떤 부족한 점이라도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김대중은 여기에 불복하고 당장 정권을 내놓으라고 떼를 쓴거야.
2. 김영삼 김대중의 도에 넘는 지나친 요구들
1) 불과 몇달만 기다리면 원하는 모든 조치가 이루어 질 텐데도 그걸 못참고 "당장 물러나고 정권을 내놔라." 요구한거야.
여당도 아니고 야당인사로서 될법이나 한 얘기인가? 정권 내주면 대통령 누가 할껀데????
2) 정부의 합리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뗑깡을 쓰고 시위를 확산하며 정국을 혼란으로 몰아갔어.
3) 그 이유는 합리적인 선거를 하면 도저히 자신이 없으니 나라를 폭력혁명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어 그 와중에 정권을 잡겠다는 술책이었지.
3. 김대중. 김영삼의 내란준비 및 정부에 대한 최후의 선전포고
1) 5월 16일날 서울역광장에 전국에서 친좌익, 호남인들 약 20여만명을 동언 최후의 시한을 5월 19일 10시로 정하고 그때까지 정부가 항복하고 정권을 내놓으라고 최후통첩이란 선전포고까지 했어. 내각명단까지 짜놓고.......
이건 무슨 의미야?
당시 박대통령 사망으로 비상계엄 상태기 때문에 군이 당연히 개입하겠지만 이것마저 우습게 생각하고 선전포고 한거야.
초딩이 동네 양아치한테 가진것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할때는 두가지 경우야.
그놈이 정신병자 이거나, 아니면 전국구 조폭두목쯤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가능 하겠어?
2) 만약 불응하면 22일을 기해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최후통첩이라며 협박까지했어.
소결론 : 1) 이미 22일에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킬 계획도 완성하고 조직도 완전히 준비해 있었다.(내란준비 완료)
2) 대한민국국군 정도는 우습게 알 정도의 막강한 세력이 뒤에 준비되어 있다. (적과 내통)
3) 만약 사전에 국군보다 더 강력한 적과 내통한게 아니라면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5.18 주동세력은 모두 중증 정신병자라는 결론
4. 몇번씩 나오는 22일과 518 사태를 연결해 보자.
1)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기로 선전포고한 22일의 바로전날인 21일 광주에서는
- 정체를 모르는 600명의 연고대생이 출현하여
. 20사단 지휘부를 습격. 총기와 지휘차 14대를 탈취하여 그차를 몰고
. 아시아자동차를 습격하여 4대의 장갑차와 수백대의 군수용 차량을 탈취하고 그차를 이용해
. 44곳에 이르는 무기고를 순식간에 습격하여 5천여정의 총기와 25만발의 탄약, 수류탄, 폭약을 확보하여
. 시위대에게 총기사용법을 가르치고 무장을 시켰어.
- 방송국2곳을 불지르고, 수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하는등 참으로 비정상적인 시위가 일어났지.
이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어? 치밀하게 사전에 계획되지 않고도 가능했던 일이야?
5. 진압군의 발빠르고 현명한 조치로 대규모 유혈사태 방지. 반란 무산
- 시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진압군의 재빠른 상황판단으로 21일 광주에서 철수, 외곽포위
- 온건시위대와 시민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총기자진반납 유도 시위자제 호소.
- 진압군과 접촉하여 사태수습방안 강구.
- 광주도청에 설치된 폭약의 뇌관제거등
- 시위가 의도대로 되지 않음을 느낀 연고대생(?) 자취를 감춤
만약 진압군이 시내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면 무슨일이 일어났을까?
아마 심각한 무력충돌로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거고,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대한민국은 무너지고 대한민국은 시위주동자와 배후세력에게 넘어갔을거야.
결론 :
1. 518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고, 적과 내통하여 전국적으로 일으키려 했던 반란의 일부로 광주에서만 부분적으로 성공한 "적과 내통하여 부모형제 자식과 이웃을 처죽인, 인류역사상 가장 추잡한 무장반란이었다."
2. 만약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시위주도세력은 모두 중증 정신병자다.
만약 1.의 경우라면 당장 [518은 적과 내통한 무장폭동]임을 천명하고 모든 조치를 적과 내통한 무장반란에 의해 처리하라.
만 약 2.의 경우라면 정신병자는 당연히 대통령이 될 수 없음이니 두명의 전직대통령의 자격을 박탈하고 518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공직을 취소함은 물론 당시 대통령의 자격으로 행한 모든사항을 무효화하고 정신병자에게 수여한 노벨평화상까지 취소토록 요청해야 할 것이다
518검찰수사 사건일지(1997)
일자 |
제 목 |
내 용 |
79.10.4 |
김영삼 의원직제명 |
김영삼이 카터방한때 주한미군철수, 군원중단등으로 박대통령 압박해야 한다고 하다 의원직 제명당함 |
10월 13일 |
신민당.통일당79명 의원직사퇴 |
국회의 신민당 김영삼 총재 변칙 제명에 항의하여 의원직 사퇴서 제출 |
10월 15일 |
부마항쟁 시작 |
김영삼 의원직제명에 항의, 부마항쟁 시작 |
10월 26일 |
삽교천방조제 준공 |
임시수도 용수공급위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
10월 26일 |
박정희대통령 서거 |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대통령 사망 |
11월 3일 |
박정희대통령 영결식 |
|
11월 6일 |
박대통령 시해사건 전모 발표 |
|
11월 10일 |
정국에 관한 특별담화(최규하) |
“정부는 현행헌법에 따라 대통령 보궐선거의 시한인 1980년 1월 25일 이전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아 헌법을 개정하며, 헌법이 개정되면 즉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이양한다.” |
11월 12일 |
김대중:
정부의 즉각적인 퇴진요구 |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정부의 즉각적인 퇴진요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권선거를 반대한다. 유신헌법을 즉시 폐지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여 조기총선을 실시하라” |
11월13일 |
김영삼: 김대중과 동조 |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도 김대중의 말에 동조 |
11월 23일 |
서울대생 김대중유인물살포 |
서울대생 150여명이 김대중의 주장이 담긴 유인물을 살포 |
11월 24일 |
YWCA사건 발생 |
반정부 인사 400여 명이 연세대 제적학생인 홍성업의 결혼식을 위장하여 서울 YWCA에 집결한 후 김대중의 주장을 반복하는 성명서 발표 |
11월 26일 |
계엄사, YWCA 사건 발표 |
이 사건은 결혼식을 위장하여 민주 세력들이 대통령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선출을 반대한 시위 사건임. 총 96명을 포고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검거 |
11월 27일 |
반정부인사 광주농성시위 |
광주 YWCA에서 재야인사 100여 명이 모여 역시 김대중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살포하고 농성시위 |
11월 29일 |
각대학 유인물살포 |
서울대, 연대, 고대 등 각 대학에서 “유진잔당 즉각 퇴진”이라는 선동성 구호가 담긴 유인물을 살포 |
|
김일성이 통전부에 내린 비밀교시 |
*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 동원하여 전민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한다” |
12월8일 |
긴급조치 9호 해제 |
최규하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해제
긴급조치 위반자 68명에 대해 형집행을 면제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 |
12월12일 |
1212사태 발발 |
박대통령 시해에 정승화총장 관련여부 조사위한 연행에 불복, 1212사태 발생 |
12월14일 |
최규하 과도정부 출범 |
신현확 내각이 임명되어 최규하 과도정부가 합법적으로 출범
* 김대중이 선도하는 재야세력은 최규하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즉시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총선을 실시하자며 학생들을 선동함으로써 폭력투쟁의 전선을 펴기 시작 |
1980년
1월18일 |
정부주도개헌 천명 |
최규하 대통령 정부주도개헌 천명
80년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발족 약속 |
2월29일 |
김대중 사면복권 |
학생 373, 정치인 22, 종교인 42, 교수 24, 언론인 9, 기타 217 |
3월14일 |
헌법개정 착수 |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발족시켜 본격적인 헌법개정 작업 돌입 |
3월15일 |
김영삼의 난동 시작 |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은 ‘민주화촉진대회’를 열고,
정부의 헌법개정심의기구를 즉시 해체하고, 신현확 내각의 즉각 사퇴를 촉구했다.
응하지 않으면 중대결단을 내리겠다고 협박 |
3월15일 |
김대중의 난동 시작 |
재야세력의 대표인 김대중은 '민주화투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이후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유언비어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정부가 유신세력을 주축으로 신당을 구상하고 있다” 유언비어에 의한 정치공작이 동원되기 시작 |
4월29일 |
불법 장외투쟁 개시 |
김대중이 주도하는 ‘국민연합’은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선포와 함께 불법적인 장외투쟁을 전개하기 시작 |
5월3일 |
김영삼 신현학 국무총리 회동 |
김영삼은 ‘선 민주화’를 주장, 여기에서 민주화라는 것은 최규하 과도정부를 즉시 해체하라! 는 의미 |
5월6일 |
최규하 대통령 개헌약속재천명 |
최규하 대통령 국무회의 자리에서
“이미 발표한 정치일정을 준수할 것”이라고 확약!!! |
5월 15일 |
서울역 대규모 시위발생 |
시위대 속에서 뛰쳐나온 괴한들이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전경1명을 압살, 4명 중상 |
5월 16일 |
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들 명단을 치안본부에 제출 |
일부 대학생들이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들 명단을 치안본부에 제출(한민통 조직원들 중심으로 5월22일 전국적인 봉기 사전계획) |
5월 16일 |
김대중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선언문" 발표 |
'비상계엄 즉각해제, 신현확 총리의 퇴진, 개헌심의위원회의 해체'등에 대해 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시에는 이른바 '국민연합'이 5월 22일부터 국민과 함께 행동에 들어갈 것임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경우 모든 책임이 정부에게 있음을 경고하면서 '최후통첩'임을 강조 |
5월17일 |
비상계엄 확대 선포 |
△모든 정치활동 중지 및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
김대중·김상현·김종필·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들을 학원·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 김영삼 가택연금 |
1980년 3~5월 |
김대중이 대중연설 내용들 |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10.26사태는 독재에 항거한 전 국민의 혁명이다.
"탄압을 받더라도 끈질기게 저항하면 10.26과 같은 또 다른 사태가 올 수 있다" |
1980년 4월 |
당시 대학들의 소요사태 |
시위-농성 106개교, 수업거부 25개교, 휴강조치 44개교, 경희대, 세종대, 한양대 등에서는 철야농성이 일주일 이상이나 유지
성균관대, 목원대, 세원대, 전남대 등에서는 복학생들이 노선을 달리하는 교수들을 폭행하고, 심지어는 70세 노령의 대학원장을 구타
서울대, 조선대, 전북대, 총신대 등에서는 학교시설을 점거-파괴 |
1980년 4월 |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퇴임 |
6월에 후임자 노태우에게 완전 인수인계 예정 |
5월 17일 |
김대중 연행 |
중장정보부 총무국장으로서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주도 |
5월 17일 11시30분 |
김대중자택에서 2건의 비밀문서 압수 |
* 문서1 :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
* 문서2 : 김대중 ‘예비내각’ 명단 |
5월18일
9시 이후 |
비상계엄 전국확대소식 보도 |
9시이후 비상계엄 전국확대소식 보도 |
10시경 |
전남대정문앞 학생시위시작 |
10시경 대학에 진주한 공수부대 대상으로 학생시위가 투석전으로 시작 |
11:30~17:40 |
광주파출소 습격 |
시민군이 돌과 화염병으로 광주파출소등 습격(순경들을 묶어놓고 구타) |
오후 3시경 |
기동경찰 45명이 인질로 납치 |
광주경찰서의 지원요청으로 32향토사단이 그 예하부대였던 7공수 2개 대대파견 |
5월 19일 |
11공수 추가 지원 |
|
16:30분경 |
금성파출소 무기고 피탈 |
금성파출소 무기고 피탈, 16:30분경 조대부고 김영찬 계엄군 총상에 부상 |
|
5월 19일 - 첫 사망자 병원에서 발생 |
언어소통 문제로 구타사망 |
5월 20일 |
시민군 첫 무장 확인 |
독일기자 한터펠츠 확인 |
12시 30분 |
시위격화 |
평온했던 오전과 달리 오후부터 시위가 격화됨 |
|
아시아자동차 차량피탈 |
아세아자동차 광장의 군수차량 314대, 민수차 82대 , 기타 18대 등 414대의 차량을 시위대가 가져감. 시위대가 주도권을 획득하기 시작 |
21: 05분 |
경찰4명 사망 |
버스돌진으로 경찰 4명 사망 |
23:00 |
계엄군 발포로 시민사망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로 시민4명사망 |
5월21일
01시 45분 |
광주교도소 습격첩보 |
전교사/ 광주교도소 급격첩보 입수에 따라 방어명령하달. |
03시 30분 |
카빈17정 탈취 |
광주세무서에서 카빈17정 탈취 |
04시 30분 |
광주KBS 건물 방화 |
|
08:00경 |
20사단 지휘부차량 14대 탈취 |
300명의 괴한이 차량 14대, M16 4정 탈취 |
09:00경 |
아시아자동차 습격 |
0사단 지휘차량인솔대에서 지프를 탈취해온 300여명,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300 여명이 아시아자동차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등 차량 3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 |
13시경 |
무기고습격 총기탈취 |
광산 하남파출소 카빈 9정 탈취, 함평 신광지서 총기 100여정/실탄 2상자 탈취 |
13시 35분 |
무기고습격 총기탈취 |
화순소재 4개파출소 총기 460정 실탄 1만발 탈취 |
14시 00분 |
무기고습격 총기탈취 |
시 위대가 나주(카빈520 여정,M1 200 여정 / 실탄 5만여발), 화순( 카빈 1300여정, M1 72정, 실탄3만여발) 등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 시작. 기타 지역에서 총기 4900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70발 탈취 |
14시 40분 |
TNT 탈취 |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00분 |
무기사용교육 실시 |
광주공원, 학운동/ 시위대 무기사용교육 실시. 무기를 분배받은 시위대는 지프차를 타고 시내에 상황전파 |
21~23일 |
교도소 습격 |
시민군4명 사망, 카빈사 2명, 타박상 1명, 자상1명 |
5월 22일 |
진압주체 변경 |
폭동진압주체 변경 광주경찰서 -> 계엄사 |
광주시와 5.18조직들이 신주단지 같이 모시는 UNESCO세계 유산등록 시킨 5.19광주사태 당시
일지내용을 "연고대생 600명 전남도청 도착 환영식 거행"을 북괴특수군과 연계됌이 확실해 지
자 홈페이지의 공문서 내용은 슬그머니 그 내용을 조작하여 홈페이지에 게게되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