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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7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0ㄴ-69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임이 오신다면
가끔 실의에 빠져 자신을 추스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상심의 깊은 나락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가슴을 뻥 뚫을 수 있는 큰끌이나 망치가 있으면 얼음처럼 나를 가두고 있는 것들을 다 깼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비상(飛翔)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면 한 없이 오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실타래가 엉클어져 있는 것을 풀기가 너무 힘들다고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복잡한 길목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 갈 길을 잃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고, 사람들을 만나고, 아귀다툼을 하고, 부지런히 약을 먹고 살고 있는지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세상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도 그 신앙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고 지표에 뿌리를 내려 큰 바람이 불면, 뿌리 채 뽑혀 넘어지고, 가지가 부러지고, 뒤집혀져 말라버릴 소지가 많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들은 그럴 때 일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그걸 깨닫고 우울해 하는 나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욕심을 없애고, 밝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라고 권고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나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랑이 가슴 깊이 새겨지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괴롭고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실의에 빠져 상심의 깊은 나락에 떨어져 내립니다.
바람도 쉬여 넘난 고개
작자미상
바람도 쉬여 넘난 고개 구름이라도 쉬여 넘난 고개
산진(山眞)이 수진(水眞)이 해동청(海東靑) 보라매라도 다 쉬여 넘난 고봉(高峰) 장성령(長城嶺) 고개
그 넘어 님이 왓다 하면 나난 아니 한 번(番)도 쉬여 넘으리라
바람도 힘이 들어 쉬어 넘고 구름까지도 너무 높아서 쉬어 넘는 고개
산에서 자란 매, 집에서 길들인 매, 송골매, 보라매까지도 모두 쉬어 넘는 높은 장성령(전남 장성) 고개
그 너머에 임이 오셨다고 하면,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넘어가겠다.
임이 오셨다면 힘이 솟고 기운이 넘쳐 그 높은 고개도 쉬지 않고 달려가서 임을 맞이하겠다는 간절한 소망과 함께 연모의 정을 강하게 묘사한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임을 그리워하는 그 모양을 너무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워하는 임, 나를 사랑하는 임, 그가 도포자락 휘날리며 높은 고개 너머에서 오고 있다면 기운이 펄펄 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이 빠지도록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임을 매일 기다리다 지친다면 나는 고개 마루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매일 까치가 반갑게 짖어대어서 혹시나 하고 기다리다가 긴긴 밤을 혼자서 지새우며 베개를 적시고 울다 잠이 들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과 당신의 깊은 사랑을 얘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신반의하는 제자들을 봅니다. 예수님을 떠나며 못 믿을 말씀을 하신다고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대합니다. 나처럼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을 다시 듣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주님의 질문에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솔직한 대답을 원하시는 주님께 숨김없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 주님, 솔직히 말씀드려서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고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 믿음이 부족해서 아직도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세상의 온갖 유혹에 빠져서 아직도 섭섭한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교만해서 제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당신을 주신다는 말씀을 아직도 확실하게 믿지 못하고 있는 탓입니다. 제가 당신을 갈구하게 하소서. 베드로처럼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고백하게 하소서.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31-42
그 무렵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축일5월 7일 성녀 로사 베네리니 (Rose Venerini)
신분 : 동정녀, 설립자
활동 연도 : 1656-1728년
같은 이름 : 로싸, 로즈
성녀 로사 베네리니(Rosa Venerini)는 1656년 2월 9일 이탈리아의 비테르보(Viterbo)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고프레도(Goffredo)는 안코나(Ancona)의 카스텔레오네 디 수아사(Castelleone di Suasa) 출신으로 로마(Roma)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비테르보의 대형 병원에서 의사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비테르보의 오래된 가문 출신인 마르지아 잠피체티(Marzia Zampichetti)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 즉 도메니코(Domenico),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ddalena), 로사 베네리니, 오라지오(Orazio)를 두었다.
로사 베네리니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함과 비범한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가정교육을 통해 확고한 그리스도교적 원칙 안에서 형성된 많은 심리적인 재능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녀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인 지롤라모 안드레우치(Girolamo Andreucci) 신부에 의하면 그녀는 7살 때 이미 자신의 삶을 봉헌하기 위한 서원을 했다고 한다. 청소년기 동안 그녀는 세상의 매력과 하느님께 드린 약속 사이에서 고민하며 지냈는데, 이 위기를 의심 없는 기도와 금욕으로써 이겨냈다. 20살 때 로사 베네리니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 여성들의 삶은 결혼 아니면 수도생활이라는 두 가지 방향의 선택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존중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유익과 당시 사회를 위해 다른 계획을 깨닫도록 그녀를 부르셨다. 이러한 예언적인 내적 움직임에 의해 그녀는 완전히 혁신적인 해결책에 도달할 때까지 고통과 탐색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676년 가을, 그녀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서원을 완성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의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녀의 이모인 안나 체칠리아(Anna Cecilia) 옆에서 그녀는 침묵과 묵상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의 수도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입회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가족에게 주어진 불행의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녀의 오빠인 도메니코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어머니 또한 세상을 떠나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는 중에 언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결혼을 했고, 집에는 이제 막내 오라지오와 24살이 된 로사 베네리니만이 남게 되었다.
하느님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하고 싶었던 그녀는 1684년 5월에 주변의 처녀와 부인들을 모아 저녁마다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그들과 기도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기도 전후의 대화를 통해 당시의 슬픈 현실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여성들은 문화적 · 교육적 · 영성적 가난의 노예와도 같았다. 로사 베네리니는 하느님께서 젊은 여성들의 교육과 그리스도교적 양성이라는 보다 높은 사명을 위해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이해했고, 산발적인 만남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현실적이고 참된 감각을 갖고 투신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1685년 8월 30일 아버지의 집을 떠난 로사 베네리니는 비테르보의 주교인 우르바노 사케티(Urbano Sacchetti) 추기경의 승인을 받고, 두 명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제롤라마 콜루첼리(Gerolama Coluzzelli)와 포르지아 바키(Porzia Bacci)와 함께 혁신적인 계획을 따라 기도 안에서 성숙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첫 번째 여학교를 시작하였다.
설립자로서 로사 베네리니의 첫 번째 목적은 소녀들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으로 양성하고 사회생활을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거창한 주장은 없었지만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소녀들을 위한 공립학교를 개교한 것이었다. 비록 시작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만큼은 예언적이라 할만 했다. 여성들의 인간적 증진과 영성적 향상이 현실화되었고, 교회와 시 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첫 시작이 쉽지는 않았다. 자신의 직무로서 교리교육을 담당하는 성직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고, 무지한 소녀들의 교육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비테르보의 중상류 계층 여성들의 대담함에 충격을 느낀 순응주의자들로부터 호된 의혹을 사기도 했다. 로사 베네리니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극복하며 자신이 하느님의 계획을 올바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질 때까지 주어진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옳았다는 것은 교육사업의 결과로써 입증되었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목자들로부터 그녀의 교육방법이 가져온 교육적 개선을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창시한 혁신적 교육방법의 타당성이 인정받으면서 그녀의 명성은 교구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비테르보 프로젝트의 특징을 잘 이해한 몬테피아스코네(Montefiascone) 교구의 마르코 안토니오 바르바리고(Marco Antonio Barbarigo) 추기경은 로사 베네리니를 자신의 교구로 초대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항상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던 그녀는 이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였다. 그래서 1692년부터 1694년까지 몬테피아스코네와 볼세나(Bolsena) 호수 주변 마을에 열 개의 학교를 개교하였는데, 바르바리고 추기경은 적극적인 물질적 후원을 제공하였다. 한편 교사들의 훈련과 학교들을 조직할 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로사 베네리니는 추기경의 도움으로 교사 훈련원을 세웠고, 이곳에서 비슷한 사명을 수행하던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Lucia Filippini, 3월 25일)를 만나 그녀와 함께 ‘자비로운 교사회’를 공동으로 설립하였는데, 오늘날 베네리니의 자매회로 불린다.
비테르보와 몬테피아스코네에 여학교를 개교한 로사 베네리니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서부 라치오(Lazio) 지방에서 또 다른 학교들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706년에 로마로 진출했으나 한 동안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시 당국의 신뢰를 얻기까지 6년의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1713년 12월 8일 베네리니 가족의 위대한 친구인 아바테 데글리 아티(Abate Degli Atti)의 도움으로 로마의 중심지인 캄피도글리오(Campidoglio) 바로 아래에 학교를 개교할 수 있었다. 1716년 10월 24일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는 8명의 추기경을 동반하고 그녀가 설립한 학교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하여 “당신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행복을 가져다 줄 이 학교에 대해 너무도 고맙습니다.”라며 치하하였다. 이를 계기로 여러 지역의 당국자와 추기경들로부터 자신들의 지역에 학교를 세워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녀는 힘겨운 여행을 계속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기쁨과 희생이 뒤섞인 고된 작업을 이어갔다. 그녀가 새로운 학교를 시작하는 곳 어디서든 짧은 기간 안에 젊은이들 안에서 높은 교육적 증진의 효과를 가져왔다.
로사 베네리니는 1728년 5월 7일 오후 로마의 성 마르코 공동체에서 성인다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일생 동안 40개 이상의 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평소 그녀가 사랑했던 제수(Gesu)의 성당 근처에 안장되었고, 시복식을 즈음하여 로마에 있는 관구 본부의 경당으로 이장하였다. 그녀는 1952년 5월 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6년 10월 1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로사 베네리니 (Rose Venerini)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