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18101249 철학과 송진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온 치히로의 가족이 어떤 신비한 터널을 통해 신들이 쉬는 공간으로 가게되며 치히로는 신비로운 일들을 겪개되며 성장해 나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몇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성장이다. 치히로는 처음에는 모든 바뀌어버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부모님과 하쿠 등 주변에 도와줄 사람을 찾아 의지하고자 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하지만 가오나시가 폭주 하였을 때에 치히로는 그 살황에서 당당하게 폭주한 가오나시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며 그에 맛서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간다. 또한 치히로가 이름을 빼앗기고 나서 센이 되었을 때 치히로는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둔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지만 치히로가 하쿠를 위해 마녀 지바바를 찾아갈 때에 그녀의 선임은 둔하다고 했던 것을 사과한다. 그 후 치히로가 자신의 부모님을 찾으러 돌아왔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치히로를 응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의 모습은 사춘기의 성장과정의 의미를 담고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둔해 보였지만 모든 일이 끝났을 때에 치히로는 성장하였다.
두 번쩨 주제는 바로 이름 이다. 마녀 유바바는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킬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빼앗는다. 초반 부분에 하쿠는 치히로에게 센으로 일하고 생활하되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잊지 말라고 한다. 이곳에서 진짜 이름을 잊어버리면 원래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동양의 사상에서 이름 즉 칭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사람을 인식하는 것과 그 사람의 개념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름을 통해 사람들을 인식하고 그 사람의 행동이나 직업 상황들을 이름 즉 칭함으로서 사용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자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센은 치히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저 그 온천의 일꾼으로서의 센의 자아이다. 즉 치히로는 이름을 빼앗기고 센 이라 칭해질 때 독립된 자신에서 그저 일꾼중 하나로 변해 버린 것 이다. 하쿠 역시 하쿠라는 거짓 이름을 사용할때는 하쿠로서의 능력을 완벽하게 사용하지 못한다. 치히로가 하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며 코하쿠 라는 이름을 알려 주었을 때 하쿠는 마치 각성을 한 듯 자기 자신을 기억해내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자아를 찾으며 비로서 완벽해지고 그 다음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작품에서 나오는 가오나시는 얼굴없는 요괴라는 뜻으로 다른 신들처럼 어떠한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 여서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상황에서 치히로가 인사해 인식해 줌으로 자신을 인식해주는 치히로를 계속 따라다니고 치히로에게 집착한다. 계속 자신을 알아봐 주길 원하며 그것을 위해 목욕 패나 사금등 으로 환심을 사고자 하지만 치히로가 받아 주지 않자 폭주한다. 하지만 치히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오나시가 무언가를 주어서 알아봐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봐주고 도와준다. 가오나시는 치히로가 주는 쓴 경단을 먹고 자신이 먹었던 모든 것을 토해내고 치히로를 따라가 결국 마녀 자바바의 집에 정착하게 된다. 자기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낸 것이다. 치히로도 결국 끝부분에 사람들과 하쿠 부모님이 치히로로서 인식하게 되며 자기 자신을 찾고 나가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욕망과 자본주의를 주제로 한다. 처음에 주인의 허락도 없이 음식을 먹는 부모들은 결국 돼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후 유바바는 ‘돈도 없으면서 손님의 음식을 먹으니’ 라고 말한다. 여기서 부모는 욕망의 상징인 돼지가 되고 유바바는 그 이유가 돈도 없이 먹으니 라고 한다. 즉 돈이 있었더라면 만약 부모가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었더라면 돼지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가오나시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가오나시는 처음 치히로에게 인식되고 계속 알아보여지고 싶은 마음에 치히로를 따라다닌다. 그러던 중 강의신이 사금을 뿌렸을 때 사람들이 사금을 보고 달려드는 것을 본후 손에서 사금을 만들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잡아먹기도 하며 자신을 손님으로 대접하라고 한다. 사금을 본 사람들은 그를 손님으로 대접하며 음식을 주며 오직 사금을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한다. 그 후 치히로가 그를 거절하였을 때 그는 2명의 사람을 잡아먹지만 그 후에도 돈이 있다는 이유로 그는 계속 대접을 받는다. 후에 치히로가 준 쓴 경단을 먹고 이제까지 자신의 사금으로 먹어왔던 모든 것을 토해내고 치히로를 따라가 결국 그런 돈 없이도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 여기서 가오나시는 자신을 알아봐 줬으면 하는 욕망이 있다. 돈이나 물질로 채우려 하지만 계속 먹고 대접 받아도 배고프다 말한다. 진짜 배가고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으로 인식되어 지고 싶은 바람을 배고프다. 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는 사람을 잡아먹었지만 돈이 있었기에 손님 으로서 대접을 받는데 이는 자본주의에 물질 만능 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 보인다. 마지막으로 여기서는 일하지 않으면 존제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처음 가마 할아범을 찾아 갔을 때 검댕이들이 치히로에게 일을 주고 안하고자 할 때 가마 할아범은 일을 하지않으면 마법이 풀려버려 그냥 검댕이로 돌아가게된다고 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하쿠는 치히로에게 괴로워 도 싫어도 일하게 해 달라고 하여야 한다고 한다. 일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과 행동들이 의미를 담고있어 이를 다 설명하지는 못 하지만 이 영화와 주제에 대해 정리하자면 사춘기의 소녀가 자신의 자아를 찾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는 영화 라고 할수 있겠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모두가 성장해 나가는 것이 마치 사회가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역할로서 주어진 이름 즉 역할로서의 정체성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고 나아가는 것이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강의시간에 다루었던 내용을 축약했군요. 물론 개인의 성장이 사회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조금 다르지만요. 그래서 오히려 이 점에 좀 더 주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정말로 개인이 정신적으로, 윤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장하면 그 사회도 같은 면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의 원인은 개인이고, 해결책도 개인에게 있는 것이 확실할까요? 도덕적인 인간들의 모임은 도덕적일까요? 반대로 도덕적인 모임의 개인은 도덕적일까요? 그렇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