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이탈리아 이민자들로 구성된 마피아를 소재로 한 [대부]가 1970년대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단지 금기시 된 무서운 마피아 사회를 화면으로 불러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피아 조직 내의 의리와 충성 그리고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뛰어 넘는 강렬한 가족적 유대의식이, 파편화 되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새로운 의미를 던졌기 때문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이스턴 프라미스]는 영국 내 러시아 마피아를 소재로 하고 있다. 러시아 마피아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세밀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 영화는 없었다. 서사적 스케일이나 조직의 규모는 [대부]보다 작지만 잔혹하다는 측면에서는 훨씬 더 강도가 센 러시아 마피아들의 세계를, [비디오드롬][네이키드 런치][크래쉬][엑시스턴즈]의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충격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필모그래피만 보아도 평범한 영화를 거부하고 잔혹하거나 독특하고 엽기적인 소재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에게, 려시아 마피아들의 세계는 매우 궁합이 잘 맞는 텍스트이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무겁고 음울하다. 웅장함까지는 아니지만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비극적 숭고함이 우리를 매력적으로 끌어들인다. 범죄조직에 접근하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나 감각적 측면의 세련미는 코플라 감독의 [대부]에 뒤지지만, 음울하고 잔혹한 측면은 훨씬 더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국과는 사회적 분위기가 다른 영국의 고전적 배경도 작품의 비극미를 장중하게 끌고 가는데 기여한다.
병원의 조산원으로 근무하는 안나(나오미 왓츠)는 임신한 몸으로 하혈을 하며 응급실로 실려 온 14살 어린 소녀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것을 목격한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의 가족을 한 달 안에 찾지 못하면 어린아이는 국가시설로 보내진다. 안나는 소녀가 남긴 일기장을 토대로 러시안 거리의 한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소녀는 러시아인이었고 일기는 러시아어로 쓰여 있었다. 안나의 아버지나 삼촌도 러시아 출신이어서 안나는 더욱 애착을 갖고 아이의 가족들을 찾아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레스토랑은 유럽 최대의 러시아 마파아 조직 보리V자콘파의 런던 지역 심장부였고, 인자하게 생긴 주인 세미온(아민 뮬러 스탈)은 조직의 보스였다. 더구나 죽은 소녀는 보리V자콘파에서 제거한 어린 창녀였다.
병원의 조산원으로 일하는 처녀가, 아이를 낳다 죽은 어린 소녀의 가족들을 찾아주려다가 무서운 마피아의 세계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스턴 프라미스]는, 안나의 눈을 통해 바라본 러시아 마피아의 이면세계가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안나는 레스토랑 앞에서 보리V자콘파 보스의 아들 키릴(벵상 카셀)과 그의 운전기사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를 만난다. 고독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과묵한 니콜라이는 안나를 우호적으로 대하지만, 조직은 보스의 치명적 약점이 들어 있는 러시아 소녀의 일기장을 회수하기 위해 안나와 그녀의 가족들을 위협한다. 니콜라이는 보스의 신임을 받아 조직 원로들의 테스트를 통과하고 정식 조직원이 된다.
안나의 역할은, 평범한 관객들의 시선을 대변해서 러시아 마피아 조직세계를 화면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국외자적 시선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형성된 니콜라이와의 러브라인은 강렬하지는 않지만 서사를 끌고 가는 추진력은 준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대중들과는 너무나 다른 러시아 마피아의 세계를, 대중적 시선으로 포장해서 유장한 리듬으로 부드럽게 끌고 가지 않는다. 따라서 이야기는 거칠고 캐릭터는 모가 나 있다. 이야기의 생략과 비약도 있지만 중심을 흐트릴 정도는 아니다.
보리V자콘파 내부의 갈등은 [이스턴 프라미스]의 서사적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보스 세미온과 그의 아들 키릴, 그리고 그의 운전기사 니콜라이, 또 행동책인 이발사까지 여러 명이 등장하지만,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하는 보리V자콘파의 명령체계에 니콜라이는 서서히 반항한다. 도둑의 계율을 뜻하는 보리V자콘파는, 1930년대 결성되어 1980년대 동유럽 붕괴와 함께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한, 유럽과 미국 등 세계12개 국가에서 수 천 명의 조직원들이 활동하는 유럽 최대의 러시아 마피아 조직이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주요 캐릭터나 줄거리들은 현실에서 가져왔다.
서사의 문은 안나가 열었지만 중심 서사를 변주하며 끌고 가는 것은 니콜라이다. 니콜라이 신분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개인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딜레마와 부딪쳤을 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과연 선한 폭력은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러시아 감독을 다룬 다큐멘타리 [마크 오브 케인]에서 많은 것을 빌려온 러시아 마피아에 대한 사실적 묘사, 특히 온몸에 새겨진 문신의 의미 등은 [이스턴 프라미스]의 리얼리티를 돋보이게 한다.
무채색의 어두은 아르마니 슈트를 입고, 담배 피는 해골, 파이프를 물고 있는 고양이 등 온 몸에 43개의 문신을 새긴 채 고독한 마피아를 연기하고 있는 비고 모텐슨을 비롯해서 나오미 왓츠, 벵상 카셀 등은 러시아식 영어를 익혀야만 했고, 그들의 강한 영어 악센트는 음울하고 잔인한 러시아 마피아의 세계를 드러내는데 언어적으로 큰 효과를 나타낸다. 70년대에서 80년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우리를 사로잡은 [대부]의 폭력적 세계 이면에는 가족에 대한 가치, 의리와 배신, 조직과 개인의 갈등 등의 문제가 잠복되어 있었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가족의 가치보다 조직의 내부와 외부의 투쟁, 그 과정에서의 인간적 본질에 더 깊이 천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