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번개> 로 잘 알려졌던 고대 앞 중국집 배달원 조태훈씨.....한 때 조태훈이란 이름으로 스타 강사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김대중씨…이제 자신의 본명 김대중으로 재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번개 조태훈이란 이름으로 중국집 배달원에서 스타강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2년 전, 주민등록 위조 사실이 밝혀지면서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만 거죠...최근 자신의 서비스 철학을 담은 < 오디오 북>을 발간하고, 다시 강연에 나서면서, 재기를 위해 예전보다 더 열심히 뛰고 있는데요…
집중 인터뷰 오늘은, 김대중씨의 인생역정을 통해서, 진정한 서비스 철학과 아픔을 통해서 다시 깨닫게 된 삶의 자세를 알아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인적서비스전문인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인 김대중씨 입니다.
김대중씨는 고대 앞 중국집 배달원 일명 < 번개 >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8년간 동안 7천여 곳에 강의를 다닐 정도로 활발한 강연활동을 했고 스타 강사로 각광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부로부터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었죠.
그런데 2003년 7월, 주민등록 위조와 조세포탈 혐의가 알려져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아픔을 겪은 바 있습니다. 최근 자신의 서비스 철학을 담은 오디오 북을 출간했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인적서비스전문인협회> 사무실을 열고 강연활동을 재개, 재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박인규 : 안녕하십니까? 김대중씨…
김대중 사무국장 :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그 <번개>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뉴스 검색을 해보면 말이죠. <지난 2003년 7월...번개 조태훈씨로 알려졌던 김대중씨가 자신의 위법사실에 대해 사죄하고 새 인생을 살겠다...는 마지막 강연을 했다> 이런 기사가 나오는데요. 2003년 7월 이후로 상당히 고통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지난 2년간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위법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의 사회활동을 안 했다기 보다도…못하고 그냥 지냈었습니다.
박인규 : 한 때는 동네 목욕탕도 못 갈 정도로…사람 만나는 것을 어려워 했다고 하시던데…맞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숨어 들어가고 싶은…실제로 목욕탕에서 어떤 사람들이 저에 대한 얘기를 주제삼아 얘기를 할 때, 저 인줄 모르고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대립을 하는…의견을 나누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참 부정적인 시각에서 저를 평가할 때…나서기가 조금은 겁이 났었고…
박인규 : 지난 달로 집행유예기간이 끝나신 거죠? 활동은 그 전부터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KBS 1라디오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작년에 어느 지인을 통해서 어떤 저의 삶의 의지를 받게되는…그런 얘기들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통해서 알게 된 또 다른 어떤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세계는 것이…온라인 세계를 발견했었습니다. 그 전에는 평범하게 인터넷이라고 하면…제가 필요한 정보만 얻는 그런 공간으로서 밖에 발견을 못했었는데…내가 참여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런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까…굉장히 저의 인지도가 올라 가더라고요. 저라는 존재를 사이버공간의 사람들이…궁금해하고, 만나고 싶어하고…이러던 차에, 온라인 커뮤니티모임에 한 두번 참석하다 보니까…내가 이렇게 숨어서만 지내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실감을 했죠.
박인규 : 사이버 커뮤니티를 통해서 다시 말하자면…사회활동을 시작하시게 된 거군요? 강연 활동을 다시 시작하신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본격적으로 활동을 한 것은, 작년 5월부터 활동을 하다 보니까…작년 6월에 공기업체에서 사내 교양강사로 위촉을 해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박인규 : 요즘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한 달에…요즘에는 이틀 거리로…한 달에 15일 정도를 강의를 다니고 있습니다.
박인규 : 제가 처음에 소개해 드릴 때…<인적서비스전문인협회>라고 소개해 드렸는데…어떤 단체입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지난 5월에 저희 서비스를 담당하는 강사님들과 여러분이 모여서…"우리가 가지고 있는어떤 강사로서의 어떤 서비스 인드를 국민적으로 펼쳐보자"는 이런 생각에서…서비스라고 하면 어떤 특정 업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그런 것이 아니라…누구든 사람을 만났을 때…배려하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해서 협회를 발촉하게 됐습니다.
박인규 : 어쨌든, 이렇게 다시 씩씩하게 사회활동을 하시겠다 다행이고요. 본명이 김대중씨인데…전 대통령 하시던 분과도 한자도 같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외람되게도 같습니다.(웃음)
박인규 : 그런데…이렇게 좋은 이름을 놔두시고, 왜 조태훈이라는 이름을 써서 곤욕을 치르셨습니까? 어떻게 하다가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쓰게 된 겁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굉장히 오래된 얘기이고, 그런 일들을 사실 어디 가서 얘기 하자니…제 합리화밖에 되지 않는 거 같아서 그런 얘기들을…
박인규 : 한 번 풀어봐 주시죠? 어떻게 하다가 김대중에서 조태훈이 됐는지…?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중국음식점에서 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생활정착은 굉장히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안정이…되지 않고,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가 힘듭니다. 저도 역시 남의 중국집에서 배달 활동을 하다 보니까…그런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제가 오래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쉽게 말해서 경영주가 "자네…우리가 영업이 되지 않으니까…그만 두어야겠네" 라고 하면…저도 그만두어야 하는…그런 근무환경이다 보니까…그런 환경 속에서 지내다가…95년도에 제가 일하던 중국집이 갑작스럽게…정리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게 뒷정리를 제가…사장님께서 잠깐 잠적을 하시는 바람에…서류 같은 것을 정리하다가…조태훈이라는 친구의 신분증까지 제가…책상에 서랍에 있어서…
박인규 : 그 분은 같이 배달원으로 일하시던 분이셨나요?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아주 짧은 시간 같이 일하다가 그 친구가 그만두고 가는 바람에…그 신분증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그것을 제가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었죠. 그래서 제가 일하던 가게가 문을 닫게 되면서…저도 역시 그 무렵에 객지생활에서 모아둔 돈을 아는 분에게 빌려드리면서…그 아는 분이 부도가 나시는 바람에…일시에 불안한 어떤 상황에 닥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 주민등록 연고지가 원래는 을지로에 있는 일하던 가게였는데…제가 그 일을 그만두니까…새로 가게를 인수 받으신 분이…저의 예비군통지서가 왔는데…이 사람 이곳에 거주하지 않습니다…라고 해서 얘기를 해서 주민등록이 말소가 되었던 거죠.
박인규 : 그래서 주민등록이 없어진 거군요?
김대중 사무국장 : 네. 그러다가 저는 잊고 지냈었죠. 그러다가 고려대 앞에서 취직이 되어서 일을 하다가 제가 신분증을 분실해서, 다시 신분증을 발급받으러 갔다가 제 주민등록이 말소가 되어있고, 거기에 주민등록위반법에…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그 때 바로 해결을 했어야 했는데…그런 위반법에 걸리고…벌금이 있고…그 당시에 당장 마련된 돈도 없고…얼마 뒤에 다시 와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고려대 앞에서 갑자기 유명해 진 겁니다.
박인규 : 그 때부터 번개가 되신 거군요?
김대중 사무국장 : 네. 그래서 언론에 인터뷰를 하면서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쓸 수도 있었는데…시대적으로 그 때 당시에 야당후보이셨고,
박인규 : 97년 선거 직전…?
김대중 사무국장 : 네. 그 무렵이다 보니까…그냥 얼떨결에 둘러댄 이름이 조태훈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박인규 : 그럼 그 당시에 같이 고대 앞에서 같이 일하던 중국집에서는 김대중이라는 이름으로 통했겠네요?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친구들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모두 아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박인규 : 그럼 김대중 전대통령 후보와 이름 같으면 자랑스러웠을 수도 있는데…쓰기가 겁이 나셨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아닙니다. 김대중이라는 이름 때문에 굉장히 타지 생활에서 많은 놀림 대상이 됐었습니다. 심지어 빨갱이…더구나 제가 고향이 호남이다 보니까…하다못해 선입관이 안 좋은 사람들에게는 놀림의 대상이 됐었습니다.
박인규 : 그러니까…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매스컴을 타는 것이 두려우신 것도 있으셨군요?
김대중 사무국장 : 그런 것도 있었죠.
박인규 : 그래서 조태훈이라고 했다…?
김대중 사무국장 : 그냥 조태훈이라고 둘러 댔는데…언론에 자꾸 나오다 보니까…텔레비전 프로에 출연을 하게 됐는데…출연료 지급 때문에 주민번호라든지, 통장 개설을 요구를 해서 그 때 신분증을 위조를 하는 상황까지 갔었던 것이죠.
박인규 : 그러면서 사회에서 조태훈으로 알려졌던 거군요? 그것이 2년 전에 진짜 조태훈씨가…그 때는 이미 본명 김대중씨가 워낙 알려지고, 세금 고지서를 받게 되고…그러면서 조태훈씨가 신고를 해서 알려 진 것이 아닙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진정을 해서…
박인규 : 그 당시에 말하자면 입건이 되고, 본명이 아니었다더라…주민등록증을 위조 했다더라…등등알려지니까…어땠나요? 그 당시에는…
김대중 사무국장 : 홀가분했습니다.
박인규 : 홀가분 했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오히려 더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니까…너무 홀가분 했었고…이제 정말 내가 이 것 때문에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박인규 : 97년도 이후에…굉장히 유명해 지셨잖아요? 그 당시에 사실은 내 이름이 김대중이었다고…말하자면 양심선언이라고 할까? 그렇게 하셔도 됐을텐데…그럴 기회가 없었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결단이 중요 했었는데…그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한 것이 저의 실수이고, 또 그 결단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주변에서 미묘한 일들이 자꾸 겹쳤습니다. 유명해지면서 저의 부인을 만났었고, 부인과 동거부터 시작해서…힘든 생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부인이 임신을 하고…그러면서 이런 가중을…저야 그냥 가서 법적인 조치를 받으면…
박인규 : 혼인신고를 하셔야 했을 텐데…
김대중 사무국장 : 그래서 법적인 조치를 받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부인은 임신 중에 있고…그러다 보니까…이렇게 조금만 이 사람을 위해서 안정을…
박인규 :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
김대중 사무국장 : 네. 그 때 당시는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는…고대 앞에서 부엌도 없는 방에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없더라도 부인이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자고 미뤘다가…후에 더 유명해 지는 바람에…거기다 유명해 지니까…옆에서 바람 잡는 사람들이 사업을 하게끔 유도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에 뛰어들었다가…엄청난 부채ㄹ,ㄹ안으니까…이제 그 부채 해결을 위해서 뛰어야 하고…
박인규 : 그것이 조태훈 시절에 부채를 안으신 겁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박인규 : 그러면 알려진 것처럼 크게 큰 돈을 벌거나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조태훈 시절에도…?
김대중 사무국장 : 알려지지 않은…이 일이 밝혀졌을 때 가장 홀가분했다는 거죠. 본명을 가지고 또 저를 뒤에서 갈취했던 사람도 있었었고…
박인규 : 그 얘기를 잠깐 해 주시죠? 2000년에 프렌차이즈 중국음식점을 하셨다고했는데…그것이 말하자면 성공을 못하신 겁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그래서 옆에서 당신의 어떤 브랜드정도면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겠다…그런데다가 저도 갑자기 유명해 지니까…뜬구름에 편승을 하게 된 거죠.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데…가장 후회되는 것이 그런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는 점이 실수한 부분이죠.
박인규 : 2003년도 7월달에 본인이 조태훈이 아니고 김대중이라는 것이 언론에 알려졌을 당시는, 어려웠을 때였겠네요? 그 당시가?
김대중 사무국장 : 네. 그 때 2000년부터 사업을 접으면서 굉장히 많은 부채에 시달리고, 힘들게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박인규 : 그 조태훈씨도 어떻게 보면…피해자인데 그 분과 만나서 용서를 구하셨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2003년 7월에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제가 찾아가서 이런저런 사실 명의도용을 해서…그래도 의외로 어떤 다른 피해가 발생 된 부분이 아니니까…크게 문제를 삼지는 않으시더라고요.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다는 부분이 신용문제에 누가 되지 않을까…많이 걱정 했었답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을 피해를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신용카드 같은 도 발급을 받아 본 적도 없고, 단지 통장 개설에서 그 통장 사용과 가끔 원천징수 영수증이 그 쪽 집으로 오니까…그런 것에서 내가 이런 소득을 올린 적이 없는데…왔다 해서 제기를 하게 된거죠.
박인규 : 한 1년여 만에 작년부터 강사를 하신 건데…좀 두렵지 않던가요?
김대중 사무국장 : 사실은 처음에는 굉장히 두려웠었습니다. 그리고 남들 앞에 섰을 때…그 분들이…"저 사람예전에 이런 일 있었잖아…"이런 시각으로…또 그것을 직접적으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장 힘들죠. 그 때에 유연하게 넘어가기 위해서…그런 문제가 발생이 됐었습니다. "저의 어떤 잘못이었기 때문에…다른 변명의 말씀은 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봐야 저의 합리화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그러나 단 한가지 여기 계신 분들 앞에 제 인생을 얘기하자고 선 것은 아닙니다. 저는 자장면을 배달할 때 그 서비스철학을 말씀 드리고 그 자장면 배달 만큼은, 거짓이라든지 위선으로 들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단순하게 자장면 하나 갖다 드릴 때…내 마음을 전해주고, 지금도 이렇게 다니면서 그 때 자장면을 받아 드셨던 분들을 만났을 때…그 분들이 주는 격려로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박인규 : 그럼 6~7년간 다른 이름으로 사시다가…이름을 찾으신 건데…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무엇인가…배운 교훈이랄까? 그런 것이 있으십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굉장히 많죠.
박인규 : 한 두가지만 말씀해 주시죠?
ⓒKBS 1라디오
김대중 사무국장 : 첫째는, 남의 이목을 받다 보니까…굉장히 모범적인 시민이 됩니다. 그리고 흐트러지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정말 얻은 교훈은 이것입니다. 위선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 인지…그 위선을 쓰고 살았을 때…받는 피해는…이익보다 피해가 훨씬 더 많습니다.
박인규 :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다시 강사로 돌아오신 것을 축하 드리고요.
김대중 사무국장 : 감사합니다.
박인규 : 자장면 배달을 하시다가 강사로 변신 하신다는 게 쉬운 것은 아닌 것 같은데…원래 김대중씨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직업적으로 그렇게 다듬어진 것입니다. 배달을 가면 손님들 앞에는 저 밖에 없습니다. 손님들은 중국음식점을 이용하실 때…그 업소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오로지 전화번호만 가지고 배달을 가면…어떤 문제가 발생이 됐을 때…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저였습니다. 그러니까 손님을 설득시키고…이해를 시켜야만이 제가 욕을 듣지 않습니다. 손님 앞에 저 밖에 없으니까…욕을 제가 가장 먼저 듣게 되어 있습니다.
박인규 : 처음 공식강연을 하신 게 언제이셨습니까? 고대였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97년도 4월에 고려대 경영대학에서 서비스마케팅을 가지고 교수님의 요청에 의해서 처음 출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인규 : 좀 떨리지 않았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아닙니다. 그냥 원래 학교 앞에서 유명인사가 되다 보니까…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니까…떨리는 것은 없었습니다.
박인규 : 워낙 말씀을 잘 하시나 보네요. 김대중씨 강의 본인이 강연을 7천번 하셨다고 하니까…나름대로 내 강의에서 핵심이랄까? 나는 항상 이런 메시지를 던져주려 한다? 이것만은 남겨 주려 한다? 그런 것이 있을 거 같은데요? 그런 것은 어떤 것입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지식보다는 지혜를 창출해 내는 그런 창의력을 갖추자는 것…물론 지식이 굉장한 집안을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 지식의 원천은 지혜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강조해드리고요. 그 다음에 하루를 하다 말 지언정…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라는…그런…
박인규 : 자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하자…혹시 7천번의 강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강연 같은 것이 있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강연 다니면서…제일 즐겁다고 느낄 수 있는…그리고 기억에 남기려고 한 강의는…지금은 군부대 출강이 없습니다만, 군부대 출강에서 가장 보람과 의미를 많이 남깁니다.
박인규 : 병사들과의 강의가 제일 재미있는…
김대중 사무국장 : 네.
박인규 : 왜 그런가요?
김대중 사무국장 : 어떤 동질감이라고 할까요? 굉장히 병영생활에서 힘들다고 느낄 때…참 남들이 바라 볼 때 힘든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같이 공감대를 형성 시켜 줄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의미를 많이 느낍니다.
박인규 : 최근 시청 공익근무요원들에 대해서 "집단의 소속감과 높은 고객만족 사이의 상관관계" 라는 상당히 어려운 제목인데…어떤 강연이었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공익근무 하시는 분들의 업무가 다양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지하철을 탈 때 그 지하철 안에서 근무하시는 공익근무요원들이 계세요. 그 분들은 "우리는 공익근무요원이지…지하철공사직원들이 아니다…"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근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곳을 이용하시는 시민들은…지하철 공사 직원으로 보는 거죠. 이럴 때 그것에서 올 수 있는 서비스의 평가…
박인규 : 소속감을 가져야만 높은 서비스가…좋은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기본적으로는 자장면배달원으로부터 서비스철학을 발전시켜 나가셨는데…서비스부분이 많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가지고 계신 서비스 철학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등병시절, 일등병시절, 상병시절, 나눠서 설명도 하신다고 하는데…본인이 가지고 있는 서비스정신의 요체라고 할까요? 설명을 해 주시죠?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서비스 철학…서비스라고 하면 봉사한다는 개념만 가지고 말을 하는 쪽이 많습니다. 그리고 어딜 갔더니…서비스가 좋아, 안좋아…이런 말씀들을 하시는데…서비스를 제공하시는 분이나 제공을 받는 분이나…똑 같은 선상에서 마주쳐야지만 서비스가 형성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우리가 쉽게 말해서 가장 한국적인 서비스라는 것을 발견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대형 할인마트 경우에 제가 직접 가서 쇼핑을 하고, 그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서…이 업체가 1위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저는 찾게됩니다.
박인규 : 그 비결이 뭡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한국사람들은 쇼핑을 갈 때 돈을 들고 갑니다. 그런데 가서 무엇을 사겠다는 리스트를 가지고 가서 그 리스트대로 쇼핑을 하는 경우는 20명중에 한 명도 되지 않습니다. 가서 봐서…그 때 갈등을 겪고 있는 그 사람 앞에 서비스맨이 있으면, 그것이 서비스의 효과는 최대의 극대화 효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분에서 서비스맨들이 서 있는 그런 대형 마켓을 보니까…이곳이 1등을 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을 갖추고 있구나…바로 이것이 정말 필요한 서비스이구나…그렇게 느낀 겁니다. 어떤 제도화 되어 있는..고객이 오면 90도로 인사를 해야 되는 이런 정형화된 서비스말고…
박인규 :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말씀이신 거 같네요. 요즘도 외삼촌께서 중국음식을 하셔서…가끔 철가방 들고 나가신다고 하는데…그 얘기가 맞습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중국 음식점은 아니고요. 그냥 밥집입니다. (웃음)
박인규 : 지금도 배달을 하십니까?
김대중 사무국장 : 네. 가끔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배달을 합니다.
박인규 : 아. 서비스정신의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
김대중 사무국장 : 아닙니다. 서비스정신도 서비스 정신이지만…제가 그동안에 17여년동안 배달통을 들었기 때문에…지금도 그것을 들을 때마다…"내가 예전에 이런 배달을 했었지…이번엔 어느 기업에 갔을 때…이런 포인트를 제공하자…" 이런 감각 때문에 합니다. 역시 천직입니다.
박인규 : 앞으로 공부를 더 하셔서 체계적인 강연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어느 쪽으로 공부를 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김대중 사무국장 : 마케팅이라든지…저는 자장면 집에서 배달하면서 제가 했던 행동이 마케팅인줄 모르고…서비스인줄은 몰랐었습니다.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계속 배달도 하시고, 강연도 하시면서 우리 나라의 어떤 서비스에 질적 향상을 위해서 기여를 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번개'(40)가 돌아왔다. 이번엔 훔친 이름 `조태훈'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김대중'으로.
중국집 배달원에서 일약 스타강사로 떠오르며 21세기 신지식인 반열까지 올랐으나 10년간 남의 이름으로 살아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곤두박질쳤다가 재기에 성공한 것.
부모가 차례로 재혼해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란 김씨가 자장면 배달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86년 지방에서 고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였다.
명동과 을지로의 중국집에서 9년간 배달생활로 모은 2천800만원으로 사업에 손 댔지만 부도를 맞았다.
건설현장 막노동과 한식집 배달원을 거쳐 고려대 앞 중국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자장면과 인연을 맺었다.
마음가짐 뿐 아니라 모든 게 달라졌다.
중국음식 배달에서 가장 중요한 신속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장안의 명물이 됐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일에 대한 열정까지 인정받아 `배달철학'과 서비스 정신을 설파하는 명강사가 됐다.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졌다는 말을 실감했다. 신지식인에 선정됐을 땐 그야말로 남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 2003년 7월 그동안 써온 `조태훈'이란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쳐 썼다는 사실이 경찰수사에서 드러났다.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 혐의로 기소중지되고 거처를 자주 옮기면서 이전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아 주민등록이 말소되자 옛 직장동료의 주민증에 자기 사진을 붙여 쓰다 적발된 것.
그동안 이룬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진실이 밝혀지니 오히려 홀가분했어요. 내 이름이 아니란 걸 먼저 밝혔어야 했는데 상황이 손댈 수 없이 커져서 스스로 바로잡기엔 이미 늦었더라구요."
이후 사람이 많은 곳엔 도무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목욕탕 가는 것도 꺼릴 정도로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번개'의 인생역정과 서비스 철학을 담은 `오디오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인터넷에 눈을 뜬 김씨는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올리면서 온라인에서 다시 유명세를 되찾았고 이 과정에서 재기할 수 있다는 용기도 얻었다.
세상에 나오자 다시 강의 요청이 밀려들었다.
한동안 망설인 끝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이란 생각에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강의를 재개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3∼4차례 전국 곳곳을 돌며 강단에 선다.
이달 17일엔 서울 구의동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적서비스전문인협회' 사무실을 열고 서비스 철학 전파도 본격화했다.
김씨는 "며칠 전 횡성 재래시장에서 상인들에게 강의를 했어요. 재래시장을 주로 찾는 이들이 서민인 만큼 이들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지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왔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내 경험만을 토대로 사례 위주의 강의를 했지만 이젠 마케팅 같은 전문 분야를 제대로 공부해 살아 있으면서도 좀 더 체계적인 강의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번개" 철가방이 가르쳐주는 고객만족 경영 10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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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1. 벤치마킹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남과 같아서는 언제나 2등이다. 옆 가게가 잘되면, 그만큼 시장성이 좋은 환경에 내가 있다는 증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2. 시스템적 서비스는 프로 서비스 맨의 자세가 아니다 서비스 체제가 좋은 회사보다는, 서비스가 투철한 사원이 많은 회사가 살아 남는다. 중국집 서비스는 모두가 따라하기 때문에 비슷비슷하다. 탕수육 주문 시 군만두 하나를 서비스로 주거나, 콜라를 제공하거나, 탕수육의 양을 많이 주는 서비스는 회사의 방침에 의해서 진행되는 서비스다. 이런 서비스를 잘한다고 해서 프로서비스맨 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진정한 프로는 자신만의 서비스를 개발한다. 예를 들어, 사무실로 배달할 때, 손님이 바쁘면 대신 탁자를 치우고 음식을 세팅해 준다. 그리고 손님의 상황을 살피며 그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한다.
3. 진실한 자세가 감동을 이끈다 잘못하거나 실수했을 때에는 변명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이고, 어떻게 수습하느냐 만이 문제이다. 이런 경우에는 진심만이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4.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라 흔히 중국 음식점에 탕수육을 시키면 군만두가 서비스로 제공된다. 고객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 보면, 탕수육 먹고 배가 부른데 군만두를 더 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차라리 탕수육을 술안주로 시켰다면 소주가 서비스 품목으로 제격이며, 자장면을 시켰을 때 짬뽕 국물을 내어 준다면 고객은 충분히 인상 깊은 배려를 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5. 생각하고 판촉한다. 의식 속에 파고든다 어떤 음식점이든 비슷비슷한 판촉 전을 벌이기 때문에 고객들에게 아무런 인지 효과도 얻지 못한다. 때문에 의식 속에 파고드는 독특한 전략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판촉용 성냥을 돌리는 대신 여직원용 스타킹을 판촉용으로 사용한다면 매우 효과적이다. 보통 식사를 주문하는 사람은 여직원이며, 여직원이 필요한 것은 성냥이 아니기 때문이다.
6. 사물을 삐딱하게 보면 묘안이 생긴다 항상 새로운 시각을 가지도록 노력하라. 예를 들어, 게시판은 항상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움직여야만 게시판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게시판을 오토바이 뒤에 붙이면 이동성이 된다. 내가 고려대 근처 설성반점의 배달사원이었을 때, 게시판의 약점인 부동성을 극복하기 위해 게시판을 오토바이에 붙이고 학교 구석구석을 종횡무진 누볐다. 그 이동용 게시판은 메뉴판이나, 고객인 학생들의 소자보판. 알림판. 홍보판 등으로 이용되어 고객의 주목을 끌었다.
7. 손님을 즐겁게 한다 나는 항상 먹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을 함께 추구해 왔다. 선글라스.머리띠.군복 바지의 번개 패션과 번개 학번, 그리고 번개 주제가 등은 손님의 즐거움을 위한 소도구였다.
8. 철저한 프로정신 - 프로는 관중이 있어야 신난다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할 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마라. 나를 삐에로로 만들 수 있는 정신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독특한 복장으로 고객의 웃음을 유발하고, 여러 가지 돌발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프로의 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벼운 웃음까지도, 번개가 손님에게 줄 수 있는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9. 배달통에 든 것은 자장면이 아니라 서비스이다 최선을 다해 손님을 섬겨라. 그리고 그 들이 말하기 전에 해결하라.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손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감동시키지 못하는 서비스는 진정한 서비스가 아니다. 생각하라. 머리속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서비스맨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실천하는 진취적인 기상이다.
10. 결국 나의 경쟁 상대는 고객이었다 서비스는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받아서 서비스라고 느낄 때, 진정한 서비스가 된다. 서비스맨은 서비스를 받는 고객에게 평가받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업소와 경쟁하는 것보다 고객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인정받는 것이다. 결국 나의 경쟁 상대는 고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