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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루카 1,39-56
성모님께서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셨다는 의미는?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의 소명에 참여한 우리가
모두 미래에 받게 될 영광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은 노력 끝에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아무 공로도 없이 받을 수 있는 영광은 없습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 선수들은 동메달의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군 생활이 면제되는 특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단 4분만 뛰고 군 면제를 받은 선수도 있었습니다.
바로 김기희 선수입니다.
그는 뛰어난 선수가 아니어서 단 한 번도 운동장에서 뛰어보지도 못하고 벤치만 지켜야 했습니다.
3·4위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홍명보 감독은 남은 교체 선수 카드 한 장을 김기희 선수를 위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단 1분이라도 승리에 공헌한 선수라야 올림픽 메달의 영광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는 일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기 동네에서 아무리 골을 많이 넣어도 올림픽 메달을 따거나 군면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께서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육체도 하느님 영광을 위해 쓰였다는 뜻입니다.
저는 꾸준히 만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제가 있는 본당의 신자들이 아닙니다.
이전에 담당했던 본당이나 꾸르실료 등에서 봉사했던 분들을 만납니다.
제가 지금도 그들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말하면 그분들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필요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영성관에 있을 때 저를 도와주는 오산성당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영성관 사정상 사제관 도우미를 둘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세 분의 자매들이 매주 한 번씩 와서 청소도 해 주고 빨래도 해 주고 밑반찬도 해 놓고 가곤 했습니다.
사실 저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그 일을 도와주는 이들이라면 그 육체도 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혼자 다 하지 않으시고 키레네 사람 시몬이 당신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은 구원의 십자가에서 오기에,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소명을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당신 영광에 참여시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구원에 육체적으로도 필요한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아드님이 인간이 되려고 하시는데 그 아들에게 인성을 내어줄 인간이 필요했는데,
흠 없는 육체를 지니신 분은 성모 마리아밖에 안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열매: karpos)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이 그리스도를 성모님의 ‘열매(karpos)’라고 표현한 데는 이미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한 분이란 뜻이 들어있습니다.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는 분명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성모님의 열매라 표현한 이유는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 무언가를 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죄가 없어야 하는데 그 나무에 죄가 있다면 열매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만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신 분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내리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는 육체는 본래 썩을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분께 계속 생명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성인 중에 몸이 썩지 않는 성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루르드의 성녀 베르나데트는 150년이 지났지만, 정말 아름다운 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성모님의 육신을 지닌 승천으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마음만 주님께 봉헌한 분들이 아니라 육신도 주님의 뜻에 봉헌하여 그만큼 주님께서 많이 필요로 하신 육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하실 때 사용한 성대가 썩지 않고 어떤 분은 세례 주던 오른팔과 선교하기 위해
다니던 발만 썩지 않고 어떤 분은 심장이 썩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그만큼 완벽히 봉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머리카락까지도 다 지니고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봉헌한다면 주님은 그것이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영광을 받을 것으로 축성하여 돌려주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5일 [성모승천 대축일]
복음: 루카 1,39-56
오늘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결핍과 흠결투성이인 저 자신의 모습, 백번 천번 결심을 하지만 크게 변화되거나
성장하지 않은 제 모습에 실망도 큽니다.
동료 형제들의 모습도 개진도진, 거기서 거기라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가뭄에 콩나듯이 멋진 형제를 만납니다.
부족함과 미성숙을 극복하고 하루 하루 일취월장합니다.
주어진 탈란트도 잘 활용해서 자신의 능력치를 극대화시킵니다.
그런 능력치를 바탕으로 공동체와 교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니, 선배 입장에서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성장은커녕 퇴보하고, 겨우겨우 현상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인생, 성장하는 않는 신앙, 성장하지 않는 공동체,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지.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오늘 대축일을 맞이하시는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이 올라간 분이십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가장 큰 진보를 이룬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오늘 우리에게 한 인간이 얼마나 변화될 수 있는지, 얼마나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과 자극을 주는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 양육을 위한 성모님의 큰 희생과 노고도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가 좀 더 예의주시해야 할 부분은 성모님의 신앙여정입니다.
한 평생 다양한 위기와 고통, 큰 십자가와 험난한 가시밭길이 성모님 생애 내내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희미한 안개 속의 위험한 길을 걸어가시면서도 그 발걸음이 늘 당당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들려온 하느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새롭게 결코 만만치 않은 신앙의 길을 기쁜 얼굴로 걸어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이제 성모님께 주어졌던 역할이 우리 모두에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그 옛날 성모님의 아기 예수 잉태는 그저 오래전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아기 예수님의 잉태는 되풀이되어야 합니다.
나도 힘들지만 미혼모가 낳고 떠난 아기 한 명을 입양하면 그것은 내가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도 힘들지만 도움이 필요한 보육시설 아동들의 구체적 결핍을 채워주는 일은 어떤 면에서 내가 직접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필요에 응하는 일, 작지만 시간 내어주는 일은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다른 하늘 아래서 멀리 계셔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늘 새롭게 거듭 태어나셔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아쉽지만 또 다시 나를 떠나고, 안타깝지만 어제와 결별하고, 늘 새로운 여행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부단히 다시 태어나실 것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때로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때로 작은 울타리에 갇혀 괴로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한히 성장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가 역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있음을, 성모님처럼 큰 도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결국 우리 안에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늘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 승천 대축일 강론>
(2024. 8. 15. 목)(루카 1,39-56)
<우리도 성모님처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46ㄴ-55).”
1)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예수님, 성모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사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성모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신앙인은 ‘위에(하늘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아래에(땅에) 있는 것’은 버리는 사람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이 두 권고는, 뜻으로는 ‘같은 권고’입니다.>
‘지나간다.’는, ‘허무하게 사라진다.’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 부리고 집착하는 일들은 모두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입니다.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고 허망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2) ‘마리아의 노래’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들어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통치자들’은 여기서는 ‘모든 통치자들’이 아니라,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권세를 부리는(루카 22,25)”, 어리석고 교만한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부유한 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일까? 있습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교만한 자들은 회개하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됩니다.
어리석은 통치자들도 회개하고, 권력을 내려놓고, 자신을 낮추고, 백성을 섬기는 참된 지도자로 변화하면 됩니다.
부유한 자들은 회개하고, 재물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만 섬기면 됩니다.
3) ‘마리아의 노래’에 언급되어 있는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인간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소외계층 사람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이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조건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까?
그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또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난해서 재물에 대해서 더 집착하고, 더 탐욕스러운 경우가 있고, 자신도 인간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차별 당하면서도 자기보다 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은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만 섬겨야 합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도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마리아의 노래’에 나오는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고, ‘라자로’는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입니다.
그 비유에서,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말,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라는 말은(루카 16,25), 지금 ‘가난하고 힘없는 처지에 있는 작은 이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신앙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