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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원교구 해외선교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별나으리
東北亞의 人權 問題,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
(의민단의 현실 참여 중심으로 연구)
李榮浩 벨라도
序論
우리가 병원에 가면 늘 만나는 명언이 있다. 치료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명언대로라면 치료하시는 분은 하느님이기 때문에 모든 환자들은 일시에 완쾌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환자들은 죽든가, 살든가 둘 중에 하나다. 어찌된 일인가? 잘못된 妄言은 아닐까?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疾病과 싸우는 이 세상은 未完成 作品이다. 이 세상은 점차 완성되어 가는 과정속에 있는 것이다. 질병에 대한 치료는 지금 당장 이곳에서 시작되지만 치료의 완성은 그곳에서 그분에 의해 이뤄진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治療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말로 救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믿는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믿는 信仰人이기 때문이다.
戰爭은 마치 인간에게 있어서 疾病과 같다. 전쟁 그 자체는 질병처럼 참담하고 고통스럽지만, 질병에 당당히 맞서는 의사처럼, 의로운 전쟁이라면 우리는 감히 해 볼만하다. 의사가 늘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의로운 사람들 역시 불의를 만날 때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正義의 實現과 平和의 完成은 하느님 방식대로 그분에 의해서 이뤄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늘 의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믿는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믿는 信仰人이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 역사안에 독립 운동사가 존재한다. 만주 팔도구 성당을 중심으로 한 義民團, 즉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 당연히 국가적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그 구성원이 천주교 신자라고 해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뤄 낸 결과일 뿐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의무를 다한 것뿐이다.
오늘, 우리는 의민단에 대한 보훈처 자료 중 자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의민단은 신자들의 봉헌금으로 자원을 확보하여 풍부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봉헌금이 독립 자금으로 쓰여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봉헌금은 고유하고 독립적인 교회의 운영 자금이기 때문에 독립 자금으로 사용될 수 없다.
봉헌금은 이미 명문화된 교회 세목에 따라 투명하게 집행된다. 극히 일부라고 해도 사목회의(평신도로 구성된 대표회의)를 거쳐 용도가 검토되고 주임신부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한다. 만일 그런 과정을 거처 봉헌금이 독립 자금으로 쓰여 졌다면, 그 당시 팔도구 성당의 주임 신부, 최문식 베드로는 당연히 의민단의 지도신부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사 안에서 그런 내용은 한 획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헌금에 대한 오해는 현실화 되었다. 최문식 베드로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간도 천주교회는 신협의 성공으로 신자들은 지역 사회안에서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교회 역시 신자들의 성실한 봉헌금으로 풍요로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간도천주교회는 독립운동 자금 동원에 기여한바가 대단히 크다. 또한 교회 구성원 전체는 중산층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유행처럼 번져갔던 돈벌이용 인질극의 표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교회는 많은 우려와 걱정속에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결국은 최문식 베드로 신부는 간도 천주교회안에 대표적인 인질극(1919년 7월19일-1920년 2월)의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최문식 베드로 신부의 인질극은 간도 천주교회 안에서 시작일 뿐이었다. 수 많은 중산층 신자들 대상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다만 평신도였기 때문에 세상에 들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인질극으로 시작된 간도 천주교의 혼란은 가정 해체는 물론하고 교우촌 증발까지 이어져 갔다. 최문식 베드로 신부에 이어 만주 사목을 이어받은 독일 선교사들 기록에 의하면 판공 성사 집행을 위해 찾아 간 공소가 하루 아침에 집단 이주하여 통째로 사라진 경우를 지금 우리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와같이 피해를 당하는 이유는 한결같이 (천주교 신자들은 부자다)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등으로 청산리 전투이후 간도 천주교회는 거의 해체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측면이 고려되어 오늘날 최문식 베드로 신부에 대한 납치극은 다양한 방향으로 새롭게 연구되고 있다. 지금까지 납치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만을 고집해 왔으나, 다른 원인들도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인질극의 구체적인 문제점을 나열해 보자. 이럴 수도 있었다.
1-장기인질극(1919년 7월19일-1920년 2월)
*인질을 보험처럼 끌고 다닌 피의자는 누구 였는가?
-인질극의 장본인 최문식 베드로 신부는 단순히 돈 많은 성직자가 아니라 강력한 독립군 단체의 지도자로 부각된 상태였다. 왜냐하면 의민단은 최강의 군인과 현대식 무기, 그리고 넉넉한 재력을 갖춘 독립군 단체였기 때문이다.
답-1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독립군 의민단의 대항군은 중국군, 일본군, 기타등이었다. 그들 중 일본군 또는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이 가장 유력하게 보인다.)
답-2 의민단과 소규모 전투 지속(장기 협상력 구실 제공)
2-피의자는 최초의 인질 목적을 왜 포기 하였는가?
*인질 목적-경제적 목적(현금), 또는 정치적 목적(독립군 해체 목적),
*청산리 전투 이전 많은 군소 독립군 단체들은 의민단처럼 주도 면밀한 일본군 첩보 작전에 의해 소멸되어 갔었다.)
답-의민단과의 전투 중 마적단 패배 인정과 인질극 마무리 명분(마약과 약간의 현금)
3-인질을 끝까지 추적한 자는 누구였는가?
답-독립군 의민단
4-인질극 결과
답-1 의민단과 인질극 전투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 패배
답-2 의민단 조직력과 전투력 강화
오늘의 주제, 즉 (동북아의 인권 문제,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라는 이야기는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1-과거--의민단은 과연 있었는가?
2-현재--의민단에 대한 국가적 예우(해외 유공자 실태)는?
3-의민단의 청산리 전투 참여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어떠한가?
4-결론-의민단 출현에 대한 오늘과 내일의 숙제는 무엇인가?
본론
1-의민단이 과연 있었는가? 답-분명히 있었다. |
1)-의민단과 기타 독립군 단체(보훈처 자료 제공)
무기1정-10원(219쪽)
M16-SP1-20,000달러
단체 | 군 인 | 무 기 | 재 정 | 수류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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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독군부 (홍범도장군) | 500명 | 500정 | 5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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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武都督府),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부대 및 신민단(新民團) 독립부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북로제일군(北路第一軍) 사령부장(홍범도)에 선출되었다. | ||||||
북로군정서 김좌진장군 | 500명 | 500정 | 기관총 2문 | 10만원 |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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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총사령관 김좌진 등이다 | ||||||
의단군 (사냥군부대) | 200명 | 권총 30정, 엽총 다수 | 10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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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산(陳相山)·지장회(池章會)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군단으로 일명 의병산포대(義兵山砲隊) | ||||||
신민회 | 500명 | 150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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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전덕기(全德基),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 | ||||||
의민단 | 300명 | 무기 400정, 권총 50정 |
| 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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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현(王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천주교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독립단으로 단장 방우룡(方雨龍, 또는 方渭龍), 부단장 김연군(金演君), 참모장 김종헌(金鍾憲), 영장(營長) 허은(許垠), 서무부장 정준수(鄭駿秀), 재무부장 홍림(洪林) 등이 주축이 되었다. | ||||||
야단 | 2만명 | 군복 수천벌 공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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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단군신앙을 결합한 민족종교인 청림교 |
번호 | 유공자명 | 심사연월일 | 훈 격 | 소 속 |
1 | 허근 | 1995 | 독립장/만주방면 | 의민단 |
2 | 김연군 | 1995 | 애족장/만주방면 | 의민단 |
3 | 정준수 | 1990 | 애족장/만주방면 | 의민단 |
4 | 박창래 | 2009 | 애족장/만주방면 | 의민단 |
5 | 김종헌 | 2009 | 애족장/만주방면 | 의민단 |
*의민단의 특징 ---- 자원 풍부-(1910년부터 10년간)-다른 단체보다 윤택하였다.
지도신부-최문식 베드로(팔도구 성당)
1-재정력-신협 성공으로 신자들 중상층 형성
2-인력-개신교보다 10배 이상 자원 확보(5,400명)
3-조직력-관습적으로 연2회 이상 모임(봄, 가을 판공)
4-교육-한국어, 국사, 지리, 교련(목총 훈련-김선자 수녀 수 편의 논문 발표)
2-최근 의민단에 대한 국가적 예우(해외 유공자 실태)는? 답-매우 실망스럽다. 앞으로는 나아질 꺼야....! |
❑이경찬 열사, 유공자 등록과 가족 포상 문제 중심으로 고찰
-국가보훈처 서류 접수-2016년 00월 00일
-접수번호-0000
-성명 이경찬, 남, 생년월일-1886년, 사망년월일-1920,11,8.(경신년 대토벌 피해자)
-본적-滿洲 間道省 延吉縣 八道溝市(팔도구 성당 주소)
-공적 정보, 포상연도-0000년, 훈격-00장, 운동계열-의민단
-공적 개요-1920.11.8 滿洲 청산리 전투에서 義民團員 중요 간부로 獨立運動을 하다가 日軍에게 被逮(피체)되어 八道溝聖堂 마당에서 銃殺 殉國.
중국 신문 자료 제출
중재 의뢰-김00,(전 문체부 장관-천주교 신자)-용인시 수지구
결과-구비서류 불충분으로 반려됨
-원인1.-신원 서류 미제출(공산당 입당 확인서 미제출)
*국가기관 근무 경력 증명서 제출 요구-가족 관계, 출신 성분, 상세 기록
(중국 국가법-당원만 가능-천주교 신자 입당 불가능)
-원인2.-
*국내법 한계점(북한 거주자 포상 불가)
차선책
-포상 포기, 명예 회복....---불가
건의 사항--
*의민단은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산당 입당이 불가하므로 보훈처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원천적으로 중국측에서 발급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의민단 소속 유공자 보훈에 대한 국내법 체계 보완이 시급한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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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민단의 청산리 전투대한 교회의 반응(1919년-1921년) 답-교회는 절대 침묵으로 일관 (팔도구 주임신부 최문식베드로-사목 보고서 포기) |
간접적으로 교회 반응 추적, -주교 서품식(1921년 5월1일)
11.
....드브레 주교(명동 부주교) 및 보니파시오 사우아 아빠스 주교(원산지목구장) 서품식 날(1921년 5월1일), 주변국가의 파리외방전교회 지목구장 대부분은 서울에서의 서품 행사에 참석하였다. 서울의 뮈델주교, 대구의 드망 주교, 오사카의 카스타니어 주교, 나가사끼의 콤바츠 주교, 심양의 슐레 주교 그리고 길림의 랄루이에 주교등이었다. 그 시기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점기 중 이었다. 순수 천주교회 행사임에도 불구히고 일본 정부의 요직 인사들 역시 모두 참석하였다. 그날은 노골적으로 일본과 한국천주교회가 힘겨루기 하는 날이었다. 일본은 만주 청산리 전투에서 조직과 화력에서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대패(1919년)를 하면서 3,000명에 이르는 정규군을 잃었다. 일본은 청산리 전투 참패이후 마적단 토벌(1920-21년)이란 이름으로 민간인 3,500명 대학살을 끝내가는 시점이 바로 서울의 부주교 및 원산 지목구장 주교 서품식 날 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청산리 전투 마적단에는 천주교 신자들로 구성된 의민단이 분명 있었다. 경신년(1920년) 대토벌이후에도 유독 의민단의 중심지로 의심받는 팔도구 성당이 20여 차례 집중적으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초토화 되었다는 점은 청산리 전투에서 천주교회 신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컷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뮈델주교는 방금 만주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막 끝내면서 주교 서품식장에 들어서는 일본 관리들의 속셈을 전혀 몰랐을까? 청산리 전투후, 경신년 대토벌 당시, 전투장이 아닌 성당 마당, 수많은 신자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는 독립군 의민단 단원들을 정말 몰랐을까?
주교 서품식에 참석한 정부 요직 인사를 보면, 사이토 총독, 정무총감 마주노 박사, 마츠나까 외무국장, 총사령관 오바장군, 마에타 장군, 서울 주재 각국 영사, 러시아 영사등이었다. 일단 그들의 독설을 들어보자.
주교 서품식 날 사이토 총독의 건배 제의는 아래와 같았다.
......여러분의 한국내 포교 활동에 대한 저의 존경심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사들입니다. 90년전 여러분은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갖은 난관과 고통을 이겨 낸 그 노고가 점차 열매를 맺어, 이제는 명실 공히 한국 내 그리스도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종교와 그 종교가 주는 지혜로운 교훈은 국민들을 독실하고 경건하며 예의 바르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국민의 도덕적.신체적 안녕을 위해 여러분과 우리사이에 항구적이고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겸손과 용기를 위하여 건배!!!---(친일 외교에 협조 요청)
-여기서 사이토가 말하는 국민이란 일본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인이란 단어는 그의 머릿속에서 살아진지 오래된 일이 아닌가....? 또한 순명은 무조건 머리를 숙이는 맹종과 다르다. 옳은 것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며, 아닌 것은 그르다라고 말하는 것이 진짜 순명인 것이다. 용기 역시 맹종과 확실히 구별된다.
뮈델 주교 건배 답사는 직설적이었다.
...저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가톨릭 선교사들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용감하다는 사실을 총독님처럼 인정해도 저를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마사기 바랍니다. 용감한 분들은 신앙을 위해 피까지 흘리신 우리 선배들이셨습니다. 저는 또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모두 용감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소중한 제2의조국,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예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성교회의 영광과 원만한 선교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 파견국 중에서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한국을 위하여 건배!!!---제2의 조국 한국을 위하여.....(늘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 뮈델 주교는 분명히 한국인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해...
자료를 확인해 보면, 민대주교의 청산리 전투 전몰 신자들의 예우는 준 순교자 수준이었다, 일본과의 담판에서 뮈델 주교는 판정승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성직자 모두는 죽을 각오로 한국을 사랑한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들이 지도자 뜻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4)-의민단 출현에 대한 오늘과 내일의 숙제 답-대륙 횡단 철도, 평양에서 로마까지!!! |
13.
역사는 돌고 돈다. 1946년 중국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봉천이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무순, 열하, 길림, 사평가, 연길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면서 봉천 관구의 소속 교구가 됨으로써 그때까지 조선 교회에 속하였던 연길교구는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1920-1946)
조선지목구(1831.9.9.)는 중국 교회보다 늦은 1962년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다. 조선지목구에서 넘겨준 유산 중 아주 귀한 선물은 당연히 103위 성인들일 것이다. 요동지목구(1838.12.12.)에서 중국 교회로 넘겨 줄 보물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 역시 시성시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기에 한국에서처럼 요동지목구 시성시복하는 날, 로마 교황을 평양과 북경(만주)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성시복, 그것은 인권회복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핵 문제가 강자의 몫이라면, 인권회복의 완성, 즉 시성시복은 분명 한국교회의 몫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꼭 명심할 일이 있다. 교회는 독일 통일후 진리에 목 말라하는 동독인들이 스스로 성당에 찾아오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열심한 신자들이 동독 무신론자들과 어울리며 성당을 빠져 나가는 모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잊고 사는 것이 편하였을 뿐만아니라 돈맛을 알고 느끼며 멋대로 사는 동독인 모습이 부럽기 때문이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철두철미하게 미래를 준비하자.
우리는 여기서 의민단의 현실 참여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때 그 시절, 요동 대목구는 많은 이유등으로 점진적으로 쇠퇴해 갔다. 그러나 조선 지목구는 성장을 거듭해 갔다. 때가 되었다. 간도의 작은 부분 재치권으로 시작된 한국과 중국 교회와의 새로운 관계, 그리고 이어지는 연길지목구 창립은 오늘과 같은 우리의 모습을 예견함이었다.
비록 50년이란 짧은 기간(1904-1953) 이었지만,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의민단에 이어 공산당 출현으로 인한 희생은 한국교회 초기 대원군 시대와 비교될 만큼 대형 사고가 분명했다. 남북한에서 출발하여 이웃나라 중국도 이 문제에 깊숙이 관계되어 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출발점인 한국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종점은 중국이다. 북경과 평양이 로마와 화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손해 볼일은 없다. 그들은 수많은 친구들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15.
중국과 로마는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부분은 예측될 수 있다. 아래 글은 아주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들어 있다. 요동지목구가 중국교회에 주는 귀중한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에서처럼 로마 교황이 중국 연길에 오실 때 주는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눈 여겨 보자.
1).
2007년. 5월.10일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동료 순교자에 대한 시복 소송 착수하여 교령까지 발표하게 이르렀다.(대원군의 박해시대와 비교된다) 이미 출발한지 10년이나 되어갔다. 인권 문제,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 광화문 평화의 물결처럼....!
2).
시복 준비의 첫 단계는 사실성(事實性)의 확인(確認) 작업이다. 이어서 용서(容恕)와 화해(和解)가 이뤄질 것이다. 소설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의민단에서처럼 지금 이 시각 평신도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로 당면한 역사 문제를 풀어 가 보자.
대륙 횡단 철도, 서울에서 로마까지 이어진다면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전 세계인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의지와 행동들이다. 새로운 출발에 앞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용서와 화해의 증거들을 당당히 보여 줘야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세계인들은 그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눌 것이다. 이 일은 한국교회가 이미 10년전부터 준비해 왔다. 2007년, 시성시복 준비가 바로 그것이다. 시성시복, 그것은 인권회복의 최고 정점으로 여겨진다. 한국은 이미 그 영광을 맛보았다. 로마 교황이 평양과 북경을 방문하는 날,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도 광화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서울에서 평양, 그리고 북경을 거처 로마까지 대륙횡단 철도가 이어지길 다시 한 번 간절히 바란다
3).
신나는 安圖县 本堂 巡禮, TR[大陸橫斷鐵道=transcontinental railroad] |
유럽까지 뻗어 갈 TR[大陸橫斷鐵道=transcontinental railroad]는 부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한반도를 지나 광활한 중국 대륙을 관통할 TR는 각 플래트 홈의 엇갈린 이해(利害) 관계 속에서 신중론자들에 의해 한동안 억류되었다. 우려(憂慮)가 확신(確信)으로 기우러 가자 대범한 친구들은 TR를 무조건 출발시켰다. TR는 자신을 알리는 기적 소리와 함께 유럽을 향하여 전력 질주(疾走)해 갔다. TR는 출발과 함께 점차 괴물화 되어갔다. 식성(食性)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TR가 머무는 풀랫트 홈이라면 어김없이 TR의 불랙홀로 변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TR는 정치(政治), 경제(經濟), 문화(文化) 뿐만아니라 극비밀로 감추어진 군사(軍事) 비밀까지 거침없이 집어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랙홀, 그 곳은 크고 작은 다툼이 없는 고요함과 평화만 흐르고 있었다.
태여 난지 얼마 안되는 TR이지만,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는 식욕으로 인하여 급성장하면서 때 이른 꽃망울을 터 트리고 있었다. 꽃 중에 꽃, 그것은 바로 능금화[能金花]였다. 오고가는 물량 만큼 살찐 과수나무의 열매[黃金]는 아름답고 풍요롭다. 그뿐이랴. 열매에서 풍기는 향기 역시 유별났다. 그것은 많은 이들의 이성 뿐만아니라 예민한 오관을 마비 시켜갔다. 만일 누가 자신의 몫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폭동(暴動)도 불사할 모양세이다.
TR는 말 그대로 철길이다. 정해진 대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TR를 멋대로 진화 시켜 버렸다. 탈선 시켜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기차를 전복 시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TR를 따라 자동차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서민들에게 오토캠핑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벨라도와 동료 일행은 의민단(義民團) 깃발을 앞세우고 용인(龍仁)의 은이 성지(聖地)로 모여 들었다. 安圖县 聖堂을 목적지로 오토 캠핑를 하기 위해서였다. 1,000Km의 대장정이었다. 쉽지 않은 여행이 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사는 차질없이 진행되어갔다. 출발을 알리는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캠프카는 안도현을 향하여 출발했다. 의민단(義民團) 오토캠프카 일행은 어느듯 서울과 개성을 벗어나자 북간도 특급열차 노선을 따라 온성을 향하여 전력 질주해 갔다. 온성에 도착한 의민단(義民團)은 곧바로 경신 성당을 향하여 두만강을 건너 갔다. 간도에 처음으로 입성(入城)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길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한중(韓中) 자유 여행 지역으로 선포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유럽에 들어 온 기분이다. 1,000Km의 긴 여정 끝에 의민단(義民團)은 안도현(安圖县)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지나 온 길은 아래와 같다
용인(은이 성지) ➟ 서울 ➟ 개성 ➟ 평양 ➟ 평성 ➟ 순천 ➟ 고원 ➟ 함흥 ➟ 북청 ➟ 단천 ➟ 길주 ➟ 청진 ➟ 라진 ➟ 온성 ➟ 敬信镇 ➟ 板石镇 ➟ 珲春市 ➟ 英安镇 ➟ 密江乡➟ 凉水镇 ➟ 图们市 ➟ 長安镇 ➟ 延吉市 ➟ 朝阳镇 ➟ 銅佛寺镇 ➟ 老头沟 ➟ 石門镇 ➟ 安圖县
安圖县 本堂 주임 박신부가 의민단(義民團)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박신부는 수 차례 안도현을 방문해 왔던 의민단(義民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올 때이면 단동 - 장하 - 개주 - 심양 - 장춘 - 길림 - 교하 - 돈화 - 안도를 택하였다. 항공기인 경우는 장춘(또는 연길)으로 와서 기차로 오곤 하였다. 그러나 이 번 만은 달랐다. 자가용으로 대륙을 횡단(橫斷)한 것이다. 한탄강을 따라 가다가 임진강을 넘은 곳이다. 그 곳은 수 십 년 금단의 땅이었다. 연길로 가는 길 역시 막힘이 없었다. 그들은 평양을 지나자 원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함흥을 지나 청진에 도착했을 때 잠시 머뭇거렸다. 나진, 선봉 지역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미개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듯 안도현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도현 본당 주임, 박신부 옆에 정씨가 보인다. 그들은 지금 둘도 없는 친구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이었다. 이미 지나간 세월일 뿐이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만은 지금도 또렷하였다.
朴神父, 汽车用一下吧(박신부, 차 좀쓰자!)
很忙(몹시 바뻐.)
啊,你刚才说什么?(니, 지금 뭐라고 했나?)
很忙, 我去, 靠那边! (바쁘다고 했다. 갈란다. 비켜라!)
你什么?(뭐라고?)
....,!?(.....,!?)
박신부와 정씨의 인연은 특별했다. 주종(主從) 관계(關係)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묵인(黙認)되어 왔다. 중국 정부는 지난 수 십 년 간......, 법률적으로 완전한 종교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명문(名文)상 일뿐이었다. 실제적으로는 극도로 종교의 자유를 제한시켜 왔다. 그런 이유로 박신부는 늘 범법자로써 사회로부터 소외되었고, 정씨는 집행자로써 막강한 국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씨는 수시로 권력 남용하여 범법자들을 사유화, 또는 노예화 하였으나, 그런 사실을 비난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종교인들이 정씨의 횡포에 굴복할 뿐만 아니라, 흔적없이 사라져 갔다. 정씨는 지방 행정부의 일급 전범자가 분명했다. 그는 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그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다만 박신부는 달랐다. 슬기롭게 정씨와 맞섰다. 위의 대화 내용은 자세히 살펴보면 극도로 예민한 양면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따져보자. 정씨가 박신부의 승용차를 쓰자고 하였다. 그때 박신부는 정씨에게 중국어로 정중히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어에는 존칭이 없다. 사실은 분명 둘 다 조선 사람이었다. 조선말로 정중히 대화를 하려면 존칭을 사용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박신부는 의도적으로 중국어로 쏘아 붙혔는데 그것은 박신부 심기가 몹시 불편하여 정씨에게 막말을 퍼 붙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알아 차린 정씨는 박신부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덤벼 들었다. 그러나 박신부는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끝까지 중국어로 정씨를 몰아 붙이고 있었다.
박신부와 정씨는 평상시에도 늘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박신부의 경우, 정씨의 권력 남용은 한 점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정씨는 늘 불쾌하였지만 박신부와의 대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참패(慘敗)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바뀌었다. 중국 정부가 로마 천주교회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로마 교황 방문을 요청한 일로 정씨가 실직되고 만 것이다. 정씨는 실직과 함께 일급 전범자로 몰려가고 있었다. 정씨는 갑자기 떠 밀려 온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박신부가 정씨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사제관으로 불러 들였다.
“정분도씨, 직장은 잡으셨나요?”
“신부님, 어떻게 제 본명을 아셨지요?”
“분도씨, 어머님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고백성사를 보시겠어요?”
“신부님, 고맙습니다.”
정씨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정씨의 거친 성격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진화된 것이었다. 그는 편하게 살고자 함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날 들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정씨는 박신부 권유에 따라 그동안 부정축재로 모아 온 재산을 포기하고 전액 사회에 기부하기로 결심하였다. 교회는 정씨를 정중히 받아 드렸다. 그의 진정한 회개(悔改)와 고백(告白), 그리고 보속(補贖)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는 정씨는 폭권을 누리던 때보다 주름살이 펴지고 생기가 돌더니, 본래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60대가 넘은 중년이었지만 40대 정도의 장년처럼 힘과 패기가 넘쳐 보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