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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읍 '성밖숲'에서 바라보는 '별티'고개. 성주라는 지명은 이 별티고개에서 왔다. 성산가야 고분군은 이 고개 일대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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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
| 전남 광주(光州)를 흔히 '빛고을'이라 부른다. 경북 성주(星州)도 본디 이름은 '별고을'이었다.
'별 고을' 성주는 대구의 서쪽에 있다. 이 지명 '별 고을'은 성주읍 성산리 일대에 129기나 남아 있는 가야 시대 고분군 바로 뒤쪽,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별티'고개에서 유래했다. 4세기 무렵 별티고개 일대에는 '성산(星山)가야'라고 불리는 작은 국가가 섰고, 이윽고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 처음으로 '성주'라는 이름을 얻었다.
별티고개는 성주읍에서 출발하여 성산 고분군(古墳群) 바로 옆을 지나 용암면 장학리로 넘어가는 재이다. 성산 고분군 뒤의 별티고개 바로 아래에서 동남쪽으로 성주읍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 이름은 '살망태'인데, 흔히 '산막'이라 부른다. 산막이란 성산가야 시대부터 1897년 역원(驛院)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성산산성(山城)을 수비하던 군사들의 병영 막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는 명칭이다.
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별티(星峴)라 불렀을까. 옛날에 별이 떨어진 자리라고 해서 그렇게들 부른다고 한다. 아마도 별티고개가 성산산성 봉우리가 흘러내려 살망태 마을 뒷산과 이어지는 지점에 도끼날로 폭 파낸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을 법하다.
흔히 '성산가야 고분군'이라 부르는 성주 지역의 가야 시대 고분군은 이 별티고개 아래 살망태 마을 언저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산 줄기가 성주읍으로 내려오면서 평야로 이어지는 끄트머리까지, 산줄기 여기저기에 129기나 운집해 있다.
옛날 기록을 보면, 성산에는 가야 시대 이래 둘레 1.8km의 석축(石築)산성과 성루(城樓)가 있었고, 신라 이후로는 봉수대(烽燧臺)도 있었다고 한다. 봉수대가 있었다는 말은 성산이 그 일대에서 가장 높아 사방을 두루 살피다가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이 발견되면 즉시 연기를 피워 올려 위급을 알렸다는 말이니, 별티고개 일대는 별을 바라보기에도 가장 적당한 자리였음에 틀림이 없다.
본래 별티고개의 성산에는 청운사란 고찰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본당도 없고 그 많았다던 부속건물도 흔적조차 없다. 청운사 들어가는 누각을 청운루라 하였는데 그 청운루의 문이 얼마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려면 여러 스님들이 한데 뭉쳐서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게다가, 문을 여닫는 소리가 너무나 요란해서 멀리 십리 밖까지 울렸다고 한다.
하루는 어느 따스한 봄날, 고을 시찰 길에 나선 고을 원님이 망을 탄 채 별티고개를 나른한 낮봄 졸음에 겨워 지나가고 있었다. 이 때 마침 청운사 스님들이 청운루 문을 열기 시작했다. 봄졸음을 못 이겨 간신히 별티고개를 오르던 말이 먼저 벽력 같은 문소리에 놀라 펄쩍 뛰었는데다가 원님 또한 굉음에 놀라 중심을 잡지 못하는 바람에 말도 쓰러지고 덩달아 비탈에 낙마한 원님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래서 청운사는 없어졌다. 관아에서 청운사를 없애 버리고, 고개도 그 옆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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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읍 이천변의 천년기념물 '성밖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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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
| 성주 읍을 동쪽으로 감싸고 도는 이천(伊川)가에는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성밖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읍내 중심의 봉두산(鳳頭山) 기슭 경산리(京山里)를 지맥(地脈)이 결집되는 명혈(名穴)로 신성시했다. 그래서 이천 서쪽의 대황동(大皇洞) 구등골(九等谷)을 감싸고 있는 칠산(漆山)과 대황산(大皇山)이 읍에서 보이지 않도록 해야 성주읍의 지세가 흥해진다고 생각하여 성밖 이천 강변에 커다란 밤나무 숲을 가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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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밖 숲을 휘돌아 흐르는 이 천에 눈이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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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
| '성밖숲은 1900년대 초까지는 천년백림(千年栢林)을 이루었고, 인축(人畜)의 접근을 엄하게 막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교활해져서 밤나무는 모두 베어져 훼손되었다. 지금은 갯버들로 노수림(老樹林)을 형성하여 그 운치를 유지하고 있다.' - <성주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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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가야 1500년 전 고분군. 성주읍 성산리, 용암면 장학리, 선남면 신부리 일대에 129기나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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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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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리 고분군에 눈이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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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
| 성주에서 성산가야의 1500년 역사를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 주는 대표적인 유적은 성산고분군과 독용산성이다. 성산고분군과 독용산성은 위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오늘은 성산고분군을 거닐며 1천500년 전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한번 느껴볼까 한다. 마침 눈이 내려 한결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좁혀줄 것 같다. 고은(高銀)의 시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가 생각난다.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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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리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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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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