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가 임정진 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쓴 임정진 작가를 만났다. 그는 지난 30년간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청소년소설에서 동화로, 장르는 바뀌었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는 역할은 변함이 없다. 올해는 동화를 들려주는 유튜버로도 변신했다. 글 지유리 기자 사진 고승범(사진가)
들려주고픈 이야기 끝이 없어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세운상가. 회색빛 건물엔 컴퓨터·오디오·조명 등 각종 전자기기 상점과 수리점이 즐비하다. 이곳에 아동문학가 임정진 씨(56)의 작업실이 있다. 미로처럼 좁은 길을 따라 가다, 문틈에 끼어 빼꼼히 고개를 내민 호랑이 그림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모든 사무실마다 달린 똑같은 네모 간판 대신, 작 가의 작업실은 그림이 간판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잘 찾아오셨네요. 그림 덕분이죠? 손님들 보라고 붙여놓았어요.” 반갑게 맞이하는 그가 유쾌하게 인사를 건넨다. 경쾌한 단발머리를 하고 쨍한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그는 누가 보아도 동화작가 같았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 평(3.3㎡) 남짓한 작은 공간은 동화책으로 둘러싸여 발 디딜 틈이 없다. 세운상가에서 이곳만 별세상인 듯 온갖 화려한 색이 가득하다.
[경단녀에서 청소년소설가로]
청소년 문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말을 한다. 1989년에 동명의 영화와 소설이 발표하면서 크게 유행한 말이다. 이 문장은 세상에 나온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때 그 소설을 쓴 이가 바로 임정진 작가다. 지금은 아동문학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그의 이름을 문단에 알린 것은 청소년소설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제 대표작이긴 하죠.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그 책은 제가 쓰고 싶어서 쓴게 아니에요. 순전히 우연이었지요.” 그가 소설가가 된 것은 그의 말마따나 우연이었다. 당시 영화를 제작하던 기획사가 홍보를 위해 동명의 소설을 기획했다. ?화 줄거리에 여러 에피소드를 추가해 한 편의 장편소설을 써줄 사람을 찾았다. 그야말로 써야 할 이야기는 방대하고, 마감 기한은 촉박했다. “마침 출산하고 일을 쉬고 있을 때였어요. 아는 분이 청소년소설을 써줄 작가를 구한다는 거예요. 제가 아이를 낳기 전에 청소년 잡지에서 일한 적이 있거든요. 운 좋게 저에게 기회가 온 거죠. 마감 기한이 15일 정도였어요. 따질 겨를 없이 무작정 쓰기 시작했죠.”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지. 그때까지 소설가가 되리라곤 생각한 적이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해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친한 후배를 집으로 불러다 아이를 맡겨두곤 글쓰기에 몰두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있었지만, 완성도 있는 소설을 쓰려면 당시 청소년들의 일상을 담아 이야기를 살찌워야 했다. 밤새워 글을 쓰느라 보름이 한 달 같았다.
다행히도 그의 첫 소설은 성공적이었다. 무려 20만 권이 팔려나갔다. 영화의 후광이 없었다곤 할 수 없지만, 소설이 지닌 힘도 분명 컸다. 두 번째 청소년소설 ‘있잖아요 비밀이에요’까지 흥행했다. 이번엔 그의 소설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도 나왔다.
그러나 연이은 성공에도 정작 그는 크게 감흥이 없었단다.
“소설이 성공해서 계속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좋았죠. 형편상 일을 계속 해야 했거든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죠.” 그는 스스로 ‘생계형 작가’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천생 작가’일지 모른다. 그는 부지런히 글 쓸 기회를 찾아다녔고, 기회가 왔을 땐 그의 속에서 줄줄 솟아나는 이야기를 붙잡아 성실하게 글을 썼다.
[자유로운 아동문학의 매력]
그러나 청소년소설가의 명성이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책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서다. 청소년소?은 더욱 그랬다. 더는 그의 책을 출판하겠다는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라디오 청소년드라마 극본가, TV 프로그램 구성작가로 일하면서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매체가 무엇이든 ‘글을 써달라’ 는 제의가 오면 마다하지 않았다. 글 쓰는 게 좋았고, 그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한 출판사에서 동화를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청소년소설의 인기는 사그라지고 동화가 슬며시 인기를 얻을 때였다. 장르가 무엇이건, 독자가 누구이건 무슨 상관이랴. 세상에 들려주고픈 이야기는 여전히 많지 않은가. “누가 제게 언제 등단했느냐고 물으면 1988년이라고 말해요. 그때 계몽사라는 곳에서 주최한 아동문학상에서 동극이 당선됐었거든요. 생각해보니 대학교 시절 동아리에서 아동문학을 공부했고요. 동화와 제 인연이 꽤 깊죠.” 그는 다시 한번 ‘생계형 작가’이기에 동화를 썼다고 말했지만, 동화작가가 그의 자리인 것만 같다. 그는 동화를 쓰면서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꼈다. “동화를 쓸 때 자유로워요. 주인공이나 메시지를 마음대로 창조 할 수 있거든요. 제 동화 중에 ‘맛있는 구름콩’이라는 동화가 있어요. 주인공이 콩이에요. 콩이 구름처럼 하얀 두부가 되는 이야긴데, 제 아들이 어릴 때 두부는 잘 먹으면서 콩은 안 먹는 거예요. 그런 애들을 생각하면서 썼죠.” 그가 쓴 동화집만 30여 권, 각각의 주인공은 무궁무진하다. 동물이나 식물은 물론, 비·구름·해·다리미·버스·자석 등 온갖 것이 주인공이 된다. 어떤 이야기라도 동화가 된다. 그에겐 일상의 모든 것이 재밌는 이야깃거리다.
“여러 직업군의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자주 만나요. 그래야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동화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요. 계속해서 새로운 ‘꺼리’를 찾아야 해요.” [스토?텔링 유튜버로 아이들 만나] 요즘 그는 종종 자신을 동화작가 대신 ‘스토리텔러’(storyteller)라고 소개한다.
“몇 해 전에 K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대표로 해외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전 세계 아동문학가들이 모이는 자리였고, 참석자들은 이름과 직업이 적힌 명찰을 달고 있었죠. 우리나라 참가자는 전부 작가 아니면 삽화가였는데 외국 참가자 중엔 ‘스토리텔러’가 많더라고요.” 부끄럽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동화를 읽어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다. 그런데 행사가 진행될수록 스토리텔러의 힘을느꼈다. ?이 지닌 힘은 글의 힘보다 더욱 강했다. 동화 한 편을 듣기만 해도 그 나라의 문화와 정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는 곳마다 책을 읽겠다는 사람보다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우리나라가 그토록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질투날 만큼 아쉬웠다. 그길로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스토리텔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스토리텔링을 하려고 제가 쓴 동화를 영어로 번역해 달달 외웠어요. 발음이 나쁘면 뭐 어때요. 이야기만 재밌으면 되죠. 그거 하나는 자신 있었거든요.” 노력 끝에 스토리텔러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그는 전 세계 동화작가들과 소통하면서 영감을 주고받는다. 데뷔한 지 30년이 지난 작가지만, 그가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는 건 이런 노력 덕분이다.
올해 들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해외에 나가기 어려워지면서 그의 스토리텔러 활동은 ‘잠시 멈춤’이다. 아쉬움은 유튜브로 달랜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온라인수업을 듣는 아이들을 위한 ‘스토리텔링 유튜브’를 운영 중이다. 스마트폰 앞에 서서 자신이 쓴 동화를 읽는 모습을 촬영하고 그걸 편집해 업로드한다. 전 과정을 혼자서 해내느라 영상 한 편 올리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힘든 줄 모른다.
“세상에 재밌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아요. 그걸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아요. 아이들과 소통하다 보면 몰랐던 이야기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갈수록 책 읽는 것이 어색해지는 시절이다. 어쩌면 유튜브가 지금 아이들에겐 동화책일지 모른다. 동화책의 역할이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네 정서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그의 유튜브가 그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영상 촬영과 편집이 어렵더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는 유튜브로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나도 재밌단다. 세상에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것이 동화작가의 임무라 믿기 때문이다. 그가 오늘도 작가로, 스토리텔러로, 유튜버로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이유다.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 합니다 ..
정말 부지런한 작가분 중 한 분이시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작가^^
맘도 좋은 친구.
태평양 같은 마음. 산초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이 참 많아요.
대인배 작가 ^^
쏘쿨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