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
런던 특파원
런던 특파원
사회 부적응 현상을 보이는 영국의 퇴역 군인들과 각계 인사 등 도합 300명이 런던의 고풍스러운 콘서트홀에 모여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며 가재 요리까지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게 행사의 내용이었다.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복무한 뒤 사회에 복귀하려 했으나 부인에게 버림받아서, 제대로 된 직업을 못 구해서, 전쟁으로 입은 육체적·정신적 상처로 인해 정상적 삶을 포기했던 영국의 젊은 퇴역 장병 20명이 주빈이었다.
이들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밥을 먹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인척인 앤슨 부인, 카타르 왕의 조카 압둘라 알타니, 사업가인 왈더그레이브 백작 등 왕족·귀족도 눈에 띄었다. 연주 중간에는 “다른 일 때문에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찰스 왕세자의 동영상 메시지가 소개됐다. 한국전 참전용사 10여 명도 초청됐고, 박지성 선수도 턱시도를 입고 손님으로 왔다.
이 대형 식사 자리를 마련한 이는 영국의 한국인 귀족 로더미어(64·한국명 이정선) 자작부인. 3년 전 소록도의 한센인 병원에서 조용필씨와 런던필하모니아의 공연을 열어 한국에서도 제법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60년 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영국 군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에서 어려움에 처한 후대의 군인들에게 ‘그대들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행사를 준비한 동기를 밝혔다. ‘우리는 고마움을 잊지 않는 민족’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하려 했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알고 보니 그는 퇴역 군인 지원단체를 오랫동안 후원해 왔다.
후원금 모금이나 기념 촬영 같은 으레 있을 법한 일은 없었다. 음악 듣고 밥 먹고, 퇴역 군인들의 재기 과정을 담은 영상물을 보고 헤어졌다. 로더미어 부인은 “물질적 결핍보다 소외감이 사람들을 더욱 절망케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추억을 선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록도 공연도 같은 취지였다. 취재 자제 요청에 대해서는 “참석 퇴역 군인 중에는 아직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이도 있다”고 설명했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인상 깊은 자선행사였다. 그래서 참석자들의 기억 속에만 조용히 담겨 있던 일을 꺼내 소개한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방 터지는 한국의 유사한 행사들을 떠올리면서.
이 상 언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