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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면 의례 찾아오는 손님이기는 하지만 이거 정말 반갑지 않습니다. 황사가 심하던 날 모임 때문에 시내에 나갔다 왔습니다. 찝찝해도 오랜 만에 보고 싶은 얼굴들 보느라 빠질 수 없습니다. 전철 역까지 버스를 탈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황사를 지나가자니 타야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운동도 할 겸 멀지도 않은 길 걷자, 사실 그 몇 정거장에 교통비 지출이 아깝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황사,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나라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당해야 합니다. 찬란한 봄을 거저먹기로 받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아무튼 옛날에는 없었던 일일 것입니다. 문명의 찌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라는 부산물 덕입니다.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덧붙여 최대 우방국이라는 곳에서 관세전쟁인가 뭔가 저질러서 우리네 짐만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찌 되려나 걱정도 됩니다. 아니면 또 다른 기대도 됩니다. 폭풍이 지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테니 말입니다. 폭풍이 지나고 맞는 파란 하늘은 더욱 곱습니다. 문제는 이 때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지요. 누가 오래 버티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야 우리 5천년의 역사가 길러준 끈기로 우리가 이기리라 믿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아닙니까? ㅎㅎ 3월도 어느덧 중순인데 또 한번의 꽃샘추위가 예보되어 있습니다. 정말 쉽지 않네요. 그래도 이깁니다.
나뭇가지마다 파란 순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네 희망도 자라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5년 3월 15일 김종우 목사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 : 10)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사춘기, 처음으로 이성을 느끼던 시절, 보기만 해도 두근두근 설레던 때입니다. 보통 중고등학교 때입니다. 요즘은 성장속도가 빨라서 10대 초에 이미 겪기도 하지만 이전 세대에서는 빨라야 중학교 좀 늦으면 고교시절에 맞이합니다. 지금은 많은 경우 남녀공학이지만 그 때는 그것도 매우 드물었습니다.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면서 학창생활을 이어갑니다. 뭐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속으로 우왕좌왕하며 보냅니다. 이것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그 때보다는 한결 자유로워지고 또 대담해지기도 해졌습니다. 그 때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기도 합니다. 좋은 시대입니다.
그 시절 눈에 들었던 남녀학생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결국 결혼까지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물론 있기는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연인이 되어 결혼하여 가정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꿈 같은 이야기지만 그런 동화 같은 삶을 그리기는 하지만 이루어지기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벌어지는 변화들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가는 길이 다를 수 있습니다. 사는 곳이 그렇고 개인의 진로가 그렇습니다. 학교에서는 최소한 1년은 한 반에서 늘 보며 지냅니다. 그러나 졸업하면 달라지기 쉽습니다. 그 때부터는 보고 싶어도 서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단 시간을 맞추어야 하니까요.
더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일정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며 살게 됩니다. 학교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보다 넓은 환경의 변화를 맞게 되고 그에 따라 경험과 사고의 범위도 달라집니다. 자신의 꿈도 가치관도 변할 수 있습니다. 보다 높게 보다 깊게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대화, 깨달음 등등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모든 것을 이기며 또 서로 도우며 두 사람의 사랑을 더 신실하고 돈독하게 만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반면 서로 여태 몰랐던 다름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보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라면서 특히 사춘기와 성인으로의 길목에서 생각과 감정을 일관되게 우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혹시 정체되었거나 미숙한 결과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시기에 성장하지 않는다면 어디엔가 이상이 생긴 것이기도 합니다. 성장과 발전 그에 따른 변화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삶의 모습에도 드러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용납될 수도 있고 때로 수용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주느냐 하는 것이지요. 서로의 환경이 달라졌고 삶의 모습이 달라졌고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른 갈등이 일어날 수 있고 문제는 그 갈등을 헤쳐나가는 방법이나 능력에서도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반응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 감정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예쁘다 싶으면 눈길이 한번 더 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선아’는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뭇 남학생들의 시선을 강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좋아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친절하게 대해줄 수는 있을지언정 특별한 감정을 표현해줄 수는 없습니다. 선아를 좋아하는 남학생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선아가 좋아해줄 수 있는 남학생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선아와 ‘진우’는 가깝게 지냅니다. 남들의 선망을 받으며 인정받고 지내는 사이가 됩니다. 시간이 흘러 졸업을 합니다.
너는 꿈이 뭐야? 변호사. 그건 직업이잖아. 꿈이 뭐냐고?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여태 가지고 있던 꿈이 과연 꿈이었나 싶었습니다. 단지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직업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지요. 직업이 꿈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꿈이 직업이 될 수 있는가? 사실 직업은 생활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꿈을 이루어가는데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직업을 택할 때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직업 때문에 꿈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꿈과 직업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해야 하겠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따라주기 어렵습니다. 안타깝지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진우의 가정은 수시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같이 있으면서 가사를 한결같이 아빠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2천년대 초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설정하였을까요? 일반적으로 엄마가 꾸려가는 것이 당시도 자연스러웠는데 말입니다. 반면 선아의 가정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선아는 그 무리의 남학생들과 인연을 맺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촉복 속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의도된 결말이라 여겨집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차라리 그것이 보다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You Are the Apple of My Eye)를 보았습니다.
<미키17>
이전에 성경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죽은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예수님이 그의 무덤 앞에 가서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랬더니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흰 천에 둘러있는 채로 무덤에서 걸어나옵니다. 대단한 기적의 사건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시 부활했던 나사로가 여태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 다시 죽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나사로라는 이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로구나. 남들은 한번 죽는 것도 무서워하고 피하려 하는데 이 사람은 두 번씩이나 죽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죽음의 사건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 보통은 잊고 삽니다. 그러나 종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혹 죽음을 맞닥뜨리면 두려워합니다. 사고를 당한다든지 몹쓸 병에 걸린다든지 하면 죽음이 조금 더 가까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대부분 두려워합니다. 왜 두려워할까요? 물론 그 뒤의 일어날 일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때로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맞기도 합니다. 특히 순교하는 신앙인들은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기꺼운 일도 아니요 즐겁게 받아들일 일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이 그리 쉬운 시간을 지나가지 않습니다. 때로는 매우 고통스럽게 맞이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특힌 전쟁 중 큰 부상을 입고 죽음을 맞는 장면은 큰 고통을 표현합니다. 어쩌면 그 고통이 두려워서 죽음을 꺼리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 결코 쾌락하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그 후의 일은 고사하고 우선 닥칠 고통이 두려운 것입니다. 만약 죽음의 시간이 마치 환각제를 복용한 것 같은 환상이나 쾌락한 느낌을 제공한다면 혹 괴로운 삶보다 죽음을 택하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죽음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살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열여섯 번을 죽는 경험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가능한가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이 무슨 볼행입니까? 그래서 말합니다.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막대한 빚을 갚으려고 그런 일을 하기로 계약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직업이 있다니! 놀랄 일이지요. 상상입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명에 관한 한 인간의 능력과는 별개입니다. 공상 속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있지만 우리는 죽은 개라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아무튼 행여 그런 직업이 있다 하더라도 막말로 차라리 죽을 지언정 택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번이면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미키’는 그렇게 소모품이 되었습니다. 지구촌에서는 윤리 종교적인 문제가 있기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구 밖으로 나와서 시행되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실험용 휜 쥐처럼 사용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한번 실험으로 사용되고 나면, 즉 죽고 나면 도로 복사되어 나타납니다. 전의 모습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모양만 똑같은 것이 아니고 그 동안의 기억까지 모두 지니고 등장합니다. 죽음의 고통을 지나 다시 그대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영생도 가능할까요? 한 가지 의문은 그 사람이 혹 짧은 시간 내에 죽지 않고 보다 오랜 시간을 지내면 늙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뒤로는 복사되어 나타나는 사람도 노인으로 등장하지 않을까요? 영생? 늙어서?
외계인이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요? 일단 우리에게 우호적일까요, 적대적일까요? 영화에서도 그 양쪽이 모두 등장합니다. 우호적이라면 대표적으로 ‘ET'가 떠오릅니다. 그 반대로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에이리언‘이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무튼 대부분은 적대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크리퍼는 우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마저 이용하려는 인간들과의 사투를 보여줍니다. 지구촌에 꼭 악당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우호적으로 대하려는 대상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인간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사실 그 행성에서는 그들이 원주민입니다. 찾아온 인간들이 침략자이지요. 하기야 이 땅에서도 우리 스스로 그런 짓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문제가 또 하나 발생합니다. 미키가 죽은 줄 알고 복사가 이미 되었습니다. 18번 미키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17번 미키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입니까? 모양도 기억도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다릅니다. 이제부터는 서로 따로 생각하며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대로 살아간다면 서로 다른 인간이 되리라 짐작합니다. 마치 쌍둥이처럼 말이지요. 현실성은 없기도 하지만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 여겨집니다. 복사가 된다 하더라도 일단 ‘인간’입니다. 어떻게 임의로 죽이면서 실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영화 ‘미키 17’(Mickey 17)을 보았습니다.
지식 없는 열심의 결과
성경이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용되는 용어의 의미의 차이에서 옵니다.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보겠습니다. 혹시 북한의 나라 이름을 아십니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분명히 민주주의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민주주의입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사용하는 ‘민주주의’와 북한이 생각하고 사용하는 ‘민주주의’는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용어이지만 다릅니다. 성경 안에서도 그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 23 :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여기서 사용된 ‘세대’와 마 24 :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 말씀 속에서 사용된 ‘세대’가 같은 의미일까요? 사실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려면 많이 공부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보자면 마 23 : 36절은 의인들의 피의 값이 이 세대에 돌아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저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마 24 : 34절에서 말씀한 세대는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신 후의 세대이기 때문에 똑같이 생각하면 이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다녀가신 후 벌써 2천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때의 사건인데 그 당시 그 세대에 이루어졌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세대’는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어진다고요? 벌써 2천년이 지났는데? 아무래도 시간의 긴 공백이 느껴집니다. 아무튼 그것을 뛰어넘어 똑같이 ‘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각 절을 읽으며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긴장된 마음을 좀 풀도록 하겠습니다.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습니다. 충치가 심해서 빼내야 했습니다. 이 하나 빼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먼저 치료비를 물어보았습니다. 3만원이랍니다. 환자가 생각하기에 이건 너무하다 싶은 거죠. 아니 십분도 안 걸릴 텐데 3만원이나 받아요? 그랬더니 의사가 대답합니다. 그러면 한 시간 동안 빼드릴까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0분 안에 빼고 3만원 내실랍니까, 한 시간 걸려서 빼고 3만원 내실랍니까?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치과의사가 10분 안에 충치 제거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경비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현관문 자물쇠가 고장 났습니다. 기술자를 불렀습니다. 5분 만에 끝났습니다. 2만원 달랍니다. 억울합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기술자는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만한 시간과 돈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기꺼이 줘야지요. 성경의 용어를 보는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금방 보이지 않습니다. ‘세대’라는 용어에도 숨겨진 시간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실제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 숨겨진 시간 말입니다. 이것도 좀 어렵기는 하네요. 아무튼 하나님 말씀 알기 위해서도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 화를 이야기하십니다. 마 23 : 29 - 31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선지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입니다. 그런데 조상들이 어떻게 했답니까? 죽였답니다. 그리고 그 자손 된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답니까? 그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비석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뭐라 합니까? 우리가 그 때 있었더라면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텐데, 그러죠?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너희 입으로 너희가 바로 그 조상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도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다를 게 뭐 있느냐? 다 똑같은 놈들이지. 너희들 그 때 있어봐야 똑같은 짓 했을 거다, 그 말입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아니다? 이방인들 불신자들이 죽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누가 죽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백성, 그것도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같은 지도자들이 죽이는 겁니다. 백성의 목자들이 누구를 핍박하고 죽입니까? 하나님 보내신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인답니까? 자 지금 예수님을 핍박하고 멸시 천대하며 죽이려는 자들은 이방인입니까, 유대인입니까?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입니다. 그것도 백성의 지도자들, 목자라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 장로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겁니다. 그리고 왜 그래야 했느냐 그거죠. 아무튼 예수님이 그들에게 저주하십니다.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들을 뭐라 부릅니까? 뱀, 독사입니다. 성경에서 뱀은 좋은 의미의 짐승입니까? 무엇을 의미하지요? 이제 배워서 압니다. 마귀입니다. 뱀이 처음 등장하는 성경이 어디입니까? 창세기입니다. 정말 뱀으로 알았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배우고 나니 뱀이다,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뭐라고 부른 겁니까? 이 마귀 새끼들아, 하고 부른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알아들었을까요? 아마도 몰랐을 겁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그들을 어디로 보내시는 겁니까?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셨지요? 어디로 가라? 지옥에나 가라. 왜요? 마귀 자식들이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보입니까? 그러니까 그들의 영을 누가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체를 가진 사람은 모두 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고 살기를 원하십니까, 모르고 살기를 바라십니까? 사람을 죽였습니다. 경찰관이 와서 범인으로 잡았습니다. 왜 잡아요? 살인죄를 범했잖아요? 아니 살인이 죄입니까? 몰랐는데요. 몰랐다고 살인죄가 면죄됩니까? 자기 안에 마귀가 들어와서 마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도 지옥 간다, 안 간다? 지옥행입니다. 그러니 배워서 알고 정신 차리고 마귀 짓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몰라서 그랬는데요,’가 통한다, 안 통한다? 참작은 하실지 모르겠지만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알아야겠다, 몰라도 된다?
자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목자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 뭐라고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누구를 믿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보내신 종들을 죽입니까? 자기네는 지금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겁니다. 왜 죽인다고요? 하나님을 위해서. 참으로 기막힐 일이지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미워합니다. 당연히 핍박하겠지요.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십니다. 요 15 :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여기서도 이 ‘세상’이란 용어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이 지구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상대하는 세상은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누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미워합니까? 하나님 믿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미워하는 겁니다. 그것은 곧 누구를 미워하는 것이다? 23절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이 사실을 알까요, 모를까요? 당연히 모르지요. 알고서야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는 알도록 노력합시다. 배워야 합니다.
이어서 보겠습니다. 마 23 :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예수님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뱀이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질타하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이 일이 전에 일어난 일입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까? 앞으로 이렇게 되겠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다는 겁니까? 너희들이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전에 너희 조상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채찍질하고 구박한 것처럼 앞으로도 또 그런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는 종들을 누가 핍박하고 죽인다는 말이지요? 안 믿는 자들입니까, 믿는 자들입니까? 믿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35절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압니다. 아담의 둘째 아들로서 그 형인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죽임을 당했습니까?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한다면 신경질 나서 죽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일 3 :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은 소속이 달랐습니다. 누구에게 속하였답니까? ‘악한 자’입니다. 성경에서 ‘악한 자’라고 하면 누구를 지칭합니까? 사단 마귀입니다. 육체로는 같은 아비인 아담의 자손이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가인과 아벨은 소속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 편에, 가인은 마귀의 편에 속하였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본인은 이 사실을 안다, 모른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알고서야 가만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네 아버지를 누구라고 합니까? 당연히 유일하신 하나님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그들의 아비가 누구라고 말씀하십니까? 성경에서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입니다. 요 8 : 41 - 44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을 믿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살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는 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 하니 말이 됩니까? 웬 미친놈이 나타나서 미친 소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자기들이 마귀에게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릅니다. 당연히 자기네가 지금 마귀 짓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습니다. 알고서야 그 짓을 하겠느냐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모르고 했다고 해서 죄가 죄 아닌 것으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죄는 죄입니다. 또 한 사람 나오지요? ‘사가랴’입니다. 남유다 요아스 왕 때 일어난 일입니다. 구약에서는 ‘스가랴’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은 스가랴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니 왕과 백성이 꾀하고 살해합니다. 보겠습니다. 대하 24 : 20 - 21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물론 사가랴 이전에도 이후에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많이 핍박을 받고 희생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대표적으로 스가랴를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종을 누가 죽입니까?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하나님 백성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짓을 누가 한다고요? 하나님 백성, 그 중에서도 백성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행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탄식을 들어봅니다. 마 23 :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여기 예루살렘이 그냥 성입니까? 아니지요. 그 안에 있는 하나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했다고요?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품어주려 애쓰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그렇지요? 그런데 어떻게 했답니까? 받아들였답니까, 받아들이지 않았답니까?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리려고 애쓰셨지만 하나님 백성은 받아요, 안 받아요? 안 받습니다. 왜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왜요? 우리 예수님이 장차 또 그 사자를 보낸다 하십니다.(계 22 : 16) 그 때는 누가 하나님 백성입니까? 예수를 믿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인 줄 믿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하나님 백성이 예수님 보내시는 그 사자를 어떻게 할까요? 잘 대접할까요, 구박하고 채찍질하고 죽입니까? 방금 뭐라 하셨지요?
중요한 것은 그 짓을 하면서 그들은 자기네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한답니까? 다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그런다는 겁니다. 그러니 열심히 할수록 그들의 핍박이 더 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대표적으로 누가 그랬습니까?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녔습니까? 유대 땅에서만이 아니라 이방 땅에까지 쫓아가서 잡으려 합니다. 그 당시는 바울이 아니고 사울이었습니다. 행 9 : 1 - 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어디까지 쫓아갑니까? 다메섹입니다. 뭐 하러 갑니까? 그리스도인들 잡으러 가는 겁니다. 바로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지요.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내가 잘못되었구나. 이게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로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고백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것이지요. 롬 10 :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이게 누구 이야기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신앙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바르게 알고 합시다. 엡 4 :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신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입니다. 오늘은 예배라고 하지만 구약시대는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종류도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예배가 여럿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주일예배가 있고 수요예배가 있고 새벽기도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일예배도 낮예배가 있고 저녁예배가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 곧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 백성이 해야 할 기본사항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사, 예배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여러 번 보았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번제는 제사들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제사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앙의 기본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합니다. 옛날에 전도하며 그런 말도 했습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어봐.’ 그런데 모를 때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신앙하면 안 됩니다. 도대체 누구를 믿는 것인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행여 사단 마귀를 믿고 섬기면 안 되잖아요. 물론 세상에는 사단숭배자도 있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지옥 가기를 자청하는데 어쩌겠습니까. 아아무튼 우리가 원하는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합니다. 그러면 알고 신앙하자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믿는 대상이 하나님인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천국은 단순이 믿어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니 아버지가 누구신지 아버지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데 미안하지만 무식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선지사도들을 통하여 오랜 시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성경을 만들어주신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내어 읽고 배우고 알고 신앙하라는 뜻입니다. 지식 없는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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